걷다가 멈추면 2

05. 술맛 나는 목소리

by 이단단

언니는 원래 소주파다. 그것도 안주 따위는 거추장스럽다는 듯 생소주를 목구멍에 털어 넣는 독종. 안주야 있으면 좋지만 생소주면 더 좋은.그런 언니를 만나러 목포에 내려갈 때면 언니는 굳이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해 둔, 그러나 누룩 묵직한 막걸리병을 꺼내 든다.


"무겁게 뭐 하러 샀노. 또 술먹으라카나.(무겁게 왜 샀어. 또 술 먹으라고 그래?)" 내뱉는 내 말투는 퉁명해도, 그게 나 마시라고 사는 '동생용 맞춤형 술'인 걸 모를 리 없다. ​내가 퉁퉁거리면서도 한 손은 병 몸통에 한손은 병뚜껑을 잡아 야무지게 돌리는 모습을 보면 언니는 냉장고에서 사이다를 찾는다.


언니가 막걸리를 꺼내면 항상 시작되는 말은. "니 누룩 먹나? 닌 이 텁텁한 걸 뭔 맛으로 먹노? 야, 사이다 좀 타봐라."이고, 내가 받는 말은 "아, 막걸리 하면 누룩 아이가? 이걸 빼면 뭔 맛으로 먹노?"이다.


​뽀얀 막걸리 속으로 투명한 사이다가 콸콸 쏟아진다. 탄산이 터지며 단내가 확 올라온다. 자기 입엔 아무래도 텁텁해서 못 먹겠다는 술을, 언니는 사이다를 타서라도 기어이 나랑 같이 마신다. 그 희한한 혼합주를 사발에 가득 채우고 나면 "... 이게 더 센 거 아니가? 훅 갈낀데(훅 갈 건데?)" 물어보는 내가 있다. 낡게 바랜 사발에 한 사발, 두 사발 마시면 언니와 나의 얼굴은 불콰해진다.


어느 경상도집 자매의 클리셰. 술 들어가면 옛날 이야기가 나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조금 더 얼굴이 붉어지게 되면, 언니의 '술기운 섞인 철학'이 시작된다.


​"야, 내는 말이다. 진짜 좋아하는 사람이랑 전화하면 그 사람이 좋아하는 물건이나 맛이 막 생각나거든?"


'​또 시작이다.' 낯간지러움 경보를 마주했다 싶은 표정으로 쳐다보는데, 언니가 사발을 든 채 툭 던진다.


​"니는, 딱 술맛 나는 목소리다. 니한테 전화할 때마다 술 먹고 싶다."
​"...뭐라카노"


​무심하게 대꾸하며 잔을 부딪치지만, 목을 타고 넘어가는 막걸리가 평소보다 달았다. 가끔 서울에 있을 때 종일 남의 몸뚱이 챙기느라 내 몸은 다 쉬어빠진 누룩처럼 쿰쿰해져 있는데, 언니는 귀신같이 그 냄새를 목소리로 맡아낸 모양이다.


내 목소리에서 술맛이 난다니. "아이고, 시인이여. 시인." 하며 오글거리는 게 죽기보다 힘든 자매의 낯간지러운 장면을 회피해 보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다정한 말에 그만 피식 웃고 만다. 그건 아마도 가장 힘들 때 생각나는 '집술' 같은 맛일 것 아닐까 싶어서 정겨웠기 때문이겠지. 세련되지는 않았어도 한 모금 들이키면 속은 뜨끈하게 데워주는 그런 때문이겠지.


나보다 12년을 먼저 태어난 언니는 그만큼의 책임감 때문에 가끔 소주처럼 독하고 투명한데, 동생이랑 마주 앉을 때는 사이다를 타서라도 내 텁텁한 세계에 기어이 발을 담궈준다.세상에 한껏 안테나를 세우다가 비로소 다가 멈춘 순간, 몸에 힘이 풀리며 글몽글해지는 자매만의 막걸리 타임.


가족이란 그런 것 같다. 내가 좋아하는 맛을 기억해 주는 것, 그리고 자기 취향을 고집하지 않고 싫어하는 술에 사이다를 한 번 섞어 웃으며 같이 비워내주야 마는 것.
종종 우리 집 자매의 사발 속에는 누룩 향보다 더 짙은 사이다 맛 애정이 보글보글 끓어오른다. 집에서나 어디 어느곳 가게에서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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