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

04. 내 것.

by 이단단

가끔은 바다 같은 시간 속에 던져지곤 한다. 아무런 일정도, 진행 상황도 없는 망망대해. 몸의 회복을 위해 혹은 마음의 쉼을 위해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소설 속 장면을 되새김질하는 소위 '생산성 없는' 시간들이다.


무심코 숏츠를 넘기다 배우 한소희의 인터뷰 한 대목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올해로 10년 차 배우가 되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녀는 "내가 10년 차가 맞나?"라며 망설였다. 그 망설임은 곧 나의 것이 되었다.



나 역시 간호사로 산 지 10년 째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대하는 '성실한 백의의 천사'다운 일직선의 성실함과는 거리가 멀다. 호기심에 이끌려, 혹은 교대 근무를 하다가 몸의 고통을 견디지 못해 내과, 외과, 치매 병동과 정신과를 부지런히 옮겨 다녔다. 쉼표가 잦았고 항로는 자주 바뀌었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당신은 어떤 간호사입니까?" "10년 차 맞아요?"라고 묻는다면, 나 또한 그녀처럼 대답을 주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고민하는 그녀에게 배우 정영주는 명쾌한 답을 건넸다.


"그 시간을 허투루 안 보냈으면 온전히 네 건데 뭐."


그 문장이 가슴에 박혔다. 우리는 늘 연차에 걸맞은 숫자와 결과물로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는 압박 속에 산다. 하지만 진짜 나를 만드는 것은 외부의 장식이나 그럴듯한 타이틀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소란스러운 세상의 소음을 끄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신에게 집중하며 쌓아온 순간들을 그녀는 정확하게 짚어주었다.


글쓰기는 10대 때부터 시작했으니, 글을 써온지는 20년이 되어간다. 그동안 공모전 입상, 공저 한 권, 독립출판 한 권 해봤다고 하더라도 서점에 낸 이름 석 자 박힌 책 한 권 없다는 것이 때로는 콤플렉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영주 배우의 말을 듣는 순간 돌이켜보니 아무렇게나 흘러간 듯 보이는 시간도 내 안에서 밀도 있게 쌓이고 있었다. 사진 속에 담아둔 찰나의 시선들,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마이크를 들고 시험을 치르던 열정, 그리고 수십 년째 이어온 고독한 글쓰기의 문장들 그 증거다.


그 시간들이 당장 눈에 보이는 화려한 결과물을 가져다주지는 않았을지라도, 그것들은 내 몸의 감각이자 생각의 깊이가 되었을 거다. 평소엔 단단히 서 있다가도 바람이 불면 유연하게 흔들릴 줄 아는 나무의 잎이 되기도 했을 거고.


이제는 누군가 내 방향이 틀렸다고 말해도, 혹은 나의 무명을 낮게 평가해도 쉽게 움츠러들지 않을 수 있 것 같다. 내가 성실하게 통과해 온 그 불규칙한 시간만큼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온전한 나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쉼표로 보이는 시간에도 글을 쓰고 삶을 살며 허투루 보내지 않은 날들이 걷다 멈추기를 반복하던 내가 쓴 글에 서 있다. 책이라는 실체는 없을지언정, 나는 오늘 내 삶이라는 두툼한 원고 위에서 충분히 든든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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