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

13. 미터기가 계산하지 못한 거리

by 이단단

첫 차를 타러 가는 서울역으로 향하는 길오늘은 명절의 초입이었다. 이른 시간인데도 양손 가득 선물 꾸러미를 든 사람들, 상기된 얼굴들 속에 섞여 고향까지 내려왔다. 이번 연휴는 좀 이르고 길게 쉬다 올 생각이었다. 못 다 읽은 책들도 읽고 다음 기사도 쓰고.. 이런저런 계획들을 세우며 종이 위에 적었다.

수시로 열차 시간을 확인하는 가족들. 다음 행선지로 가는 사람들을 뒤로하며 고향역에서 내렸고 다시 올라탄 택시 안은 바깥세상의 들뜬 소음과는 전혀 다른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 ​무심코 펼친 소설 속으로 몰입하려던 찰나, 정적을 깨고 기사님의 깊은 한숨이 들려왔다.

명절을 앞두고 콜을 받아 고향으로 향하는 손님들을 실어 나르는 기사님의 목소리에는 흐뭇함 대신 씁쓸함이 배어 있었다.


“고향 가는 길이라 다들 들뜨셨겠지만, 저는 참 마음이 답답할 때가 많아요.”


​그가 털어놓은 사연인즉슨 이러했다. 낮에 탑승하는 손님과 밤에 탑승하는 손님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낮에는 최고점이었던 별점이 밤에는 무참히 깎여나가 일을 하는 고충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다음 날 콜 수도 현저히 줄어들어 일에 지장이 생기게 된다. 밤에 만취한 손님에게 걱정되는 마음에 이러저러한 소리를 했는데 돌아온 것은‘돈을 냈으니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 무슨 충고냐. 내 맘대로 할 테니 신경 끄라는 식의 서슬 퍼런 폭언이 오고 간다고 한다. 그냥 빨리 가라며 재촉하는 짜증과, 운전하다가 덜컹거린다고 "씨X, 운전 X 같이하네." 하는 욕설까지 내뱉는다는 손님들. 불편한 것을 폭언으로 발설하는 현장에 대한 설움이었다.


내 돈을 쓴다는 명목 하에 기사님을 마치 풍경의 일부처럼 여기는 무례함을 듣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운 집으로 향하는 설레는 여정이지만, 그 여정을 돕는 기사님에게는 명절 또한 '손님은 왕이다.' 갑질을 견뎌야 하는 가혹한 노동의 연장이었다.


​그의 푸념을 들으며 나는 내 일터를 생각한다. 나에게도 명절은 그리움보다 긴장이 앞서는 시간이었다. 모두가 떡국을 나누며 웃을 때, 누증된 피로와 예민함이 밤을 지키던 직원들에게 폭언으로 변해 쏟아지는 과거 응급실의 밤들이 떠올랐다.

택시의 미터기와 병원의 영수증은 비용을 계산할 뿐, 그 이동과 치료를 위해 쏟아붓는 노동자의 존엄까지는 계산하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달리기만 고집하고 있을 때, 걷다가 멈추어 봐야할 지점이 아니었을까.


그때 기사님의 푸념이 저 공중의 연기가 되듯 기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저 열차에 무엇을 싣고 가는 걸까.

누군가의 안전한 귀향을 위해 핸들을 잡은 손과 환자의 밤을 지키는 눈동자. 그들의 수고로움을 ‘지불한 비용’으로 환산해 무시해도 좋다고 믿는 마음의 파편들이 도로에 뒹굴고 있다. 당연한 권리라고 믿는 것들이 어느새 우리의 공기 속에 이상하게 변질되어가고 있다고 느끼며.



​이번 설날, 우리가 고향에 들고 가야 할 진짜 선물은 화려한 보자기 속 상자가 아니라, 내 여정을 돕는 이름 모를 이들에게 건네는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다정한 말 한마디가 아니었을까.


기사님은 몇 번을 묻고 물어 가까이 가주시곤 요금은 더 안 받겠다며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나는 명절 선물을 꼭 쥐고 덮어두었던 소설책을 눈으로 만지작거리며, "감사합니다. 명절 잘 보내세요." 라며 요금을 지불하고 내렸다. 기사님이 내린 뒤에 남겨진 그의 한숨 섞인 파편들을 마음으로 조용히 주워 담았다. 당연한 것들이 고평가 된 현장 앞에서 조금 어색한 걸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작가의 이전글걷다가 멈추면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