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

14. 주머니 속에 숨겨둔 사랑의 근력

by 이단단


멜라토닌 없이는 잠들지 못할까 봐 걱정했던 밤이 무색하게, 아침의 햇살은 다정하게 눈꺼풀을 두드렸다. 걱정이라는 건 늘 닥치기 전엔 거대한 그림자 같다가도, 막상 빛이 비치면 한 줌 연기처럼 흩어지곤 한다.

2월, 경남의 공기는 예상보다 따뜻해서 엄마와 장을 보러 나선 길엔 어느새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기온은 14도. 봄이 벌써 담벼락 너머까지 마중을 나온 모양이다.


장바구니의 짧은 손잡이를 함께 나눠 쥐고 걷다가 문득 곁을 보았다. 언제 이렇게 작아졌을까. 내 어깨 아래로 쑥 내려앉은 엄마의 정수리를 보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분명 체구는 내가 훨씬 더 큰데, 가끔 엄마가 나를 지키려 팔을 뻗을 때면 나는 다시 아주 작은 아이가 된 것만 같다. 그 작고 마른 몸 어디에 그런 단단한 힘줄이 숨어 있는 걸까. 사랑하는 것을 지켜낼 힘은 대체 어느 주머니에서 꺼내는 것인지,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신비였다.

집으로 돌아와 장 본 음식을 정리하고, 김초엽의 <지구 끝의 온실>을 마저 읽었다. 예전에는 손에 잡히지 않았던 소설이 왜 이렇게 간절해지는 걸까. 계속 읽어봐야 알 것 같았다. 요즘 부쩍 사람냄새나는 소설을 찾는 중인데 김초엽 작가의 소설은 펼치면 차가운 과학용어 뒤에 아주 따뜻한 손이 감싸안는 것 같다.

등장인물 중, 아영의 핵심 기억 속에 있는 이웃 할머니 이희수의 문장들이 유독 오늘따라 여린 마음 구석구석을 쿡쿡 찔렀다.

"나도 어느 순간 깨달았지. 싫은 놈들이 망해버려야지. 세계가 다 망할 필요는 없다고. 그때부터 나는 오래 살아서, 절대 망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단다. 그 대신 싫은 놈들이 망하는 꼴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성공하셨나요?"

"글쎄, 그런 것 같지는 않아. 그놈들도 아직 잘 살고 있는 걸 보면 말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덕분에 살아가며 다른 좋은 것들을 많이 볼 수 있었지. 전부 망해버렸다면 아마도 못 봤을 것들이지." _77p

"미워하는 사람의 끝을 보고 싶었으나 꼭 그렇게 되지도 않고, 그 순간에도 자신은 행복을 보고 있더라."


어릴 적엔 그저 모순처럼 느껴졌던 그 말이 이제는 위로로 다가온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보다, 그 척박한 순간에도 내가 발견할 수 있는 한 조각의 행복이 더 소중하다는 것. 이희수 같은 어른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문득 거울 속의 나를 본다. 이제 나는 누군가에게 기댈 이희수를 찾기보다, 아영이 같은 맑은 영혼에게 손을 내밀어 줄 수 있는 나이에 더 가까워져 간다.


거창한 서사나 대단한 깨달음이 아니어도 좋다. 오늘 내가 느낀 이 온기의 기록이면 충분하다. 어떤 날에는 뜨거워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평온하다. 엄마의 작아진 어깨에서 느낀 뭉클함, 햇살 아래 맺힌 땀방울, 그리고 소설 속 문장이 건넨 다정한 위로들. 1월보다 조금 처지는 2월이라 자책했지만, 따지고 보면 삼시 세끼 잘 챙겨 먹고 엄마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이미 나만의 행복 주머니를 채워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로서 내가 해야 할 일은 이 파편 같은 온기들을 정성껏 줍는 일일 것.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단단한 마음으로, 내 곁의 소중한 것들을 지킬 힘을 꺼내 보아야겠다.



<공지>


공휴일은 휴재합니다.

모두 설 잘 보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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