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2

24. 방역전야

by 이단단

누군가 가지런히 정돈한 책장의 책들을 본다. 겉으로 보기엔 정돈된 질서 같지만, 사실 그 안은 채 비워내지 못한 문장들로 빽빽하다.
​어제는 『죄와 벌』을 다시 읽었다. 6부 7장,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영영 안갯속으로 사라지는 장면까지 반복해서.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하는 의문이 잠시 머물다 떠났다. 누군가의 절절함도 결국은 타인에게 닿지 못한 채 허무하게 질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심히 삼킨다.


​내일은 방역 오는 날이다. 공간을 소독하고 먼지를 털어내는 일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의식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3월을 말하며 새 출발을 이야기하지만, 나에게 3월은 그저 소독액 냄새와 함께 시작되는 또 다른 계절의 반복일 뿐이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다는 생각도, 새 다이어리를 사려던 마음도 이제는 희미해졌다. 무언가를 새로 들이는 것보다 지금은 비워내는 감각이 더 절실하다. 굳이 무언가를 기록하려 애쓰지 않기로 했다. 하던 것만 하기로. 묵묵하게. 기록되지 않은 슬픔은 그저 흘러가게 두면 그만이다.


​3월이 오고 있다. 빗소리 주파수를 틀어놓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세상의 소음은 차단되고 오직 심해 같은 고요함만 남는다. 나는 그저 내 몫의 파편들을 주워 이 책장 구석에 꽂아둘 뿐이다.
​살아간다는 건 거창한 기록이 아니라, 내일의 일에게 문을 열어주고, 다시 책장을 넘기는 일상적인 움직임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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