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3

16. 해원 (解冤).

by 이단단

"너는 매듭을 풀어야 할 것 같아."

병원에 근무했을 때 수 선생님이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해주었던 말이다. 땐 몰랐다. 그저 첫 만남에 무례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그토록 오래 남았을 이야.


​어떤 날은 내 눈이 너무 퀭해서 거울 속의 내가 낯설 때가 있다. 병원 복도의 소독약 냄새와 환자들의 밭은기침 소리가 몸에 문신처럼 새겨진 퇴근길. 광화문의 높은 빌딩 숲을 지나노라면, 보이지 않는 바람들이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가는 것 같아 발끝이 자꾸만 휘청인다. 누군가는 예민하다고 하고, 누군가는 기가 약해졌다고 말하지만, 나는 안다. 나는 그저 세상에 흩어진 슬픈 조각들을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발견하는 안테나를 가졌을 뿐이라는 것을.


​ 좁은 방으로 돌아와 낡은 노트북을 켠다. 창밖으로 보이는 옆 건물 창문들 속엔 이름 모를 파편들이 살고 있다. 라면 국물에 하루의 고단함을 마는 청년, 좁은 침대에 누워 천장의 얼룩을 세는 노인. 그들의 맺힌 숨소리가 얇은 벽을 타고 내 등에 닿을 때, 나는 비로소 내 가슴에 엉켜있던 매듭의 무게를 실감한다.


​해원(解冤).
단단히 ​맺힌 것을 푸는 무사의 칼이자, 모든 것을 받아내는 바다의 소망. 나는 소설을 쓰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문법도, 화려한 수사도 나에게는 먼 나라의 이야기다. 하지만 이 밤, 만트라의 낮은 파동이 방 안을 채우면 나는 상상한다. 내 퀭한 눈이 타인의 고통을 투명하게 비추는 거울이 되고, 내 투박한 손마디가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맑은 문장으로 씻어내는 그림을.


​알바를 하며 주워 모은 낡은 구두 뒷굽의 슬픔, 간호사로 일하며 목격한 생의 마지막 눈빛들. 그 보잘것없는 파편들이 내 원고지 위에서 비로소 제자리를 찾는다. 나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그저 나 자신의 고통을 먼저 해원 하기 위해, 그리고 내 곁의 고독한 방들을 위해 펜을 든 평범한 기록자일 뿐이다.


​오늘 밤, 나는 브런치의 하얀 화면 위에 이리저리 튀어버린 파편을 내려놓는다. 매번 글이 떠오르지 않지만 괜찮다. 내가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누군가의 꼬인 매듭 하나가 아주 조금은 느슨해졌을지도 모르니까.

오늘은 한강 작가의 그대의 차가운 손을 읽었다. 나도 E와 장운형처럼 서로를 꺼내어주는 해원의 글쓰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한강처럼.

작가의 이전글걷다가 멈추면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