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가 멈추면 3

25. 변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뿐.

by 이단단

사랑이 어렵다고 느낄 때마다 나는 습관적으로 낡은 영화 한 편을 꺼내 본다. 20여 년 전의 영화 <봄날은 간다> 속 상우는 대나무 숲에서 바람 소리를 채집하지만, 2026년의 나는 내 마음속에서 서성이는 소음들을 채집한다.


​누군가를 내 삶의 목록에서 지워내는 일은 손가락 몇 번의 움직임으로 끝난다. '삭제'. 하지만 시스템상에서 사라진 이름이 왜 내 마음의 '추천 친구' 목록에는 여전히 유령처럼 떠도는 걸까.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을 때 그 부재의 부피는 더 커지곤 한다.
​어쩌다 보니 일터에서 수많은 이별과 상실을 지켜봤다. 다 제각기 민낯이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그 일이 죽음이었다. 그때는 누군가를 달래려고 담담해지려 애썼으면서, 정작 내 삶에 찾아온 작은 균열 앞에서는 여전히 쩔쩔매는 삼십 대의 나를 발견한다. 이제는 법학을 공부하며 세상의 시시비비를 가리려 하지만, 내 마음의 시시비비는 도무지 가려지지가 않는다.


​내일은 누군가의 흔적이 남은 방을 치우기로 했다. 물리적인 먼지를 털어내고 나면, 내 안의 눅눅한 감정들도 조금은 건조해질까. 금요일에는 차가운 냉장 센터로 떠난다. 영하의 공기 속에서 뜨거웠던 고민들을 얼려버리고 나면, 비로소 이 긴 봄을 마무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은 여전히 어렵고, 나는 여전히 길을 잃은 채 파편을 줍는다. 하지만 이 파편들이 모여 결국 내 삶의 문장이 된다는 것을 믿는다. "사랑은 가네, 우리도 가네."라는 내용을 담은 노래 가사처럼 흘러가는 것들을 붙잡지 않고 그저 배웅하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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