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러나는 시간

by 이단단



야간 출근, 혹은 오후 출근이거나, 아예 휴무인 경우에는 하루의 출발선이 항상 여유로운 편이다.

요가수업은 지금 좀 쉬고 있고, 학기는 종강을 한 상태라 비교적 여유롭다.

자, 이 한가로운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까.


우선 장미 꽃잎을 조개 배 모양의 다합에 한 스푼 올리고, 그 중 몇 알을 집어 뜨거운 물 위에 올려두었다.



엄마는 항상 장미 꽃잎 차를 마시라고 권유하면 장미를 겨우 2알을 집어 올렸다. 그건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다. 옆 사람이 불안한 표정을 짓거나 생각할 순간이 필요하다고 하면 나는 장미차를 권유하곤 한다. 그러면 받아 든 사람의 표정에는 여러가지 복잡한 심경이 얼굴에 비치곤 하는데, 생소함. 두려움마저도 그순간 그대로 표정에 나타나곤 한다. 근데 더 웃긴건, 그런 것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 몇 분은 물의 뜨거움이 그대로 전해지는 찻잔을 집어들기 힘드니 키보드 옆에 놔두고 식기를 기다린다.

기다리면서 차( Tea) 는 기다림의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식기를 기다리는 동시에 우러나오기도 하니, 인내의 결과는 '우러나옴' 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일년을 고생한 끝에 네 번 가량의 시험을 끝내고 종강한 학기와, 늘상 쫓기듯 마무리짓던 글쓰기 모임의 원고 마감들. 그리고 타인과의 약속들을 생각한다. 제대로 우려낼 시간도 없이 급하게 붓고 들이켰던 순간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밀려드는 한가로움을 불신하기 시작한 것 같다. 다양한 친구들을 만나며 기분이 좋았지만 쓰지 못하면 그들보다 뒤쳐질지 모른다는 불안감과 나는 뭘 하고 있나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사람들이 내가 권유했던 장미차를 집어들 때의 표정과 비슷하게 살았던 것이다. 생소한 것을 대하는 사람이라면 으레 그렇듯이.


생각보다 차기작 없는 작가. 술만 마시고 다니는 작가, 책을 한 권도 제대로 읽지 않는 작가.로 불리우면 어떡하나 라는 고민이 무거워졌고, 작가라는 이름으로 안하무인하게 살고있다는 소문이 돌까봐 노심초사하기도 했다. 어느새 좋아서 시작했던 일이 무거운 돌덩어리같은 고민이 되어 가슴 한 쪽을 짓누르기 시작했던 것 같다. 자기검열은 의도는 좋지만 항상 과해지면 자기 자신의 목을 조르기도 하니까.

게다가 간호사일도 지겨워지고 그저 출근과 퇴근뿐인 일상에 회의감에 젖는 일이 꽤 많이 발생되었다. 그냥 일상이 모두 지루해졌다. 이걸 모두 다 술로 푸는 건 한계가 있었고, 대화를 하기에는 잡담의 기술이 부족해서 바로 무거운 주제로 넘어갈 수 있는 기회도 적었다. 내가 일단 일에 대한 흥미나 관심이 없으니까 간호쪽 사람들과는 잘 만나지도 않았을뿐더러 피해 다닐 정도였다. 엮이고 싶지 않았고, 나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쪽의 세계에서 배제되는 느낌을 느끼기 싫어서 더 피하기도 했던 것 같다. 간호사로 일한지가 몇 년인데, 아직까지 깊이 친한 동료가 얼마 없다는 사실은 자주자주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하기도 했다.


이런 느낌은 순간순간 공허의 구멍으로 나를 빠트렸다. 잘 살고 있나. 괜찮은 건가. 에 대한 불확신.

우려나올 정도로 깊이 몸과 마음을 담가본 적도 없었던 것 같은데 이렇게 살아도 되나. 삶에 대한 회의감.

불안감. 등이 똘똘 뭉쳐 나를 절벽으로 굴러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래서 사직을 결정했다. 다시는 간호계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다. 는 생각으로. 계속 책과 글에 대한 일을 업으로 삼고 싶다는 생각으로. 글로써 우러나는 사람이 되자고. 빠르게 빠르게 성과를 내야하고 그 순간 문제 해결을 위해 끊임없이 냉정해져야하는 분위기와 나는 맞지 않으니까 .천천히 고찰하고 관찰하는 일을 즐기는 나니까. 하고 느껴서.


지금은 그 터전에서 오래 일한 결과로 이상한 잔재들이 내 가치관과, 행동패턴에 깊게 새겨졌다. 사직한 다음 날부터는 매일 아침마다 길게 차를 한 잔 우려내듯 나를 우려낼 것이다. 매일 책을 읽고 요가를 하고 명상을 하고 최소한의 소비를 하면서 내 훗날을 도모하고 싶다. 언젠가 우러난 삶을 빠르게 들이 마실 날을 대비하기 위해서. 최종적으로 그것은 변두리에 있는 작은 책방을 오픈하는 것이 될 테고, 아주 느리게 느리게 책 한 권을 더 출간하는 결론이 될 것이다. 우려낼 찻잔과 재료를 찾느라 돌아다닐 시간이 필요하니 , 아주 오랜 세월을 보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인내하듯, 쌓아가듯 하루를 살아가다보면 어떻게든 우러나오게 되겠지. 나는. 그렇다고 우러나기만 하면 영혼마저 탈수된 것처럼 바짝 마르고 말 것이기에 적당한 움직임도 필요할테다. 그게 현실에서는 바로 일을 하는 것 아닐까.


집게로 집어낸 장미잎처럼. 과연 어떻게 우러날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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