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테의 수기'를 읽다가 문득 든 생각
글을 쓸 때는 마침표를 잘 찍는 것이 중요하다. 문장의 의미를 명확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다음 문장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네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많은 문장들로 삶을 채워가고 그 문장들 끝 무렵에 수많은 마침표를 찍는다. 하지만 정작 인생의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자신이 찍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많이 하지만 마침표를 어떻게 찍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잘 하지 않는다. 삶이라는 책에 문장을 채워가는 데 있어 ‘언제, 어디서, 무엇을, 누구와, 어떻게, 왜’는 어느 정도 내 자유의지로 구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책의 마지막 문장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다가, 누구와 있다가, 심지어는 왜 마지막이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사람들은 인생의 마지막 문장에 찍힐 마침표인 죽음에 대해 논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들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가 ‘어떻게’ 생의 마침표를 찍을 것인가에 관해서만큼은 조금 관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논할 때 죽음에 이르는 방법은 논외로 한다.)
내가 죽음을 인생의 테두리 안으로 들고 와 생각해보기 시작한 것은 몇 달 전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였다. 외할머니께선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셨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20일간 우리에게 아무 말씀도 하실 수 없는 상태로 누워계셨다. 하지만 돌아가신 후에 우리는 할머니께서 평소 원하셨던 대로 마침표를 찍어드리고 할머니의 책을 덮어드리고자 노력했다. 그것은 할머니께서 오래전부터 언제 올지 모르는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차근차근 준비를 해두셨기에 가능했다. 흔한 죽음이 아닌 오직 자기만의 죽음을 위한 준비를 하셨던 것이다. 우리 가족 모두 할머니를 보내드리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지만, 적어도 할머니 생전 뜻에 따라 이승에서의 삶을 마무리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만큼은 마음이 편했다. 그때 우리는 모여 앉아 각자 자기만의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육체의 숨이 멎는 것은 의지로 정할 수 없을지언정 내 영혼이 육신과 이별하는 방법만큼은 나의 뜻대로 진행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체적으로 나는 삶의 마침표를 나의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찍고 싶다. 그래서 내 장례식은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마지막으로 나를 떠올려주고 나란 사람, 그리고 나와 함께한 추억들을 각자의 마음속 어딘가에 간직해줄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면 한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이 그 날 어딘가에 둘러앉아 나와 함께 했던 추억, 곁에서 지켜본 나란 사람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해주었으면 좋겠다. 같이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나를 떠나보내는 그 다양한 감정을 그들이 함께 나눌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죽으면서 나의 책은 마무리되겠지만 내가 그동안 살며 채워온 이야기들을 그들이 떠올려주고, 읽어주고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여 공유함으로써 내 이야기는 끝났어도 영원히 끝난 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가 책을 다 읽고 책장 안에 넣어두고 다시는 꺼내보지 않는다 하여도 그 내용과 의미가 우리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 있듯 나의 이야기가 내 소중한 사람들 중 단 한 사람의 마음속에라도 남아 있을 수 있다면 나는 마침표를 잘 찍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릴케는 말테를 통해 흔한 죽음이 아닌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것과 앞으로 있게 될 것을 합쳐서 죽는 것을 자기 자신의 죽음이라 하며, 자기만의 죽음을 가지려는 소원은 갈수록 보기 드물어질 것이고 좀 더 지나면 자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의 삶처럼 흔치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살고 있으면서도 아직 삶에 대해 이해할 수 없기에 직접 맞닥뜨리지 않은 죽음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어렵고 두렵다 하여 피하진 않겠다. 존엄한 내가 자기만의 죽음을 가질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죽음이 나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하고 준비해나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