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소외되는 사회

'부활'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

by 이상한 나라의 옥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게 바로 내가 살고 싶은 사회다. 사회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법과 제도들을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일부만 잘 살기 위한 도구로 쓸 때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주위를 둘러보면 현실에서는 단지 사회 안정성을 견고히 하기 위한 목적만으로 현존하는 법과 제도를 문언대로 집행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정작 사람은 소외되기 일쑤다.




톨스토이는 부활이라는 작품에서 네흘류도프를 통해 당시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법정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했고 그 안에서의 위와 같은 모순들을 고발했다. 누군가는 지금은 소설의 배경이 되었던 그 시대보다 사법 체계가 발달한 만큼 그 시대의 법원과는 비교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재판을 방청하며 느낀 점은 1800년대 후반의 네흘류도프가 느낀 점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작년 성폭력 피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제대로 보호받고 있는지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재판 동행을 하게 되었다. 사건 특성상 재판 과정에서 특히 더 배려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들은 아직까지 명목적으로만 존재하고 있음을 재판 방청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피해자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가 부족하다 못해 폭력적이다고 느끼게 된 건 동행한 재판에서 가해자 측 변호인이 사건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피해자의 평소 행실이나 성격 등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목격했을 때였다. 가해자 측 변호인은 피해자에게 사건과 관련 없는 잘못된 사회적 통념에 근거한 질문을 던졌고 그 안에 있는 그 누구도 그 질문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제지하지 않았다. 재판이 진행되는 공간 안의 그 누구도 그러한 질문들이 피해자의 인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이가 없었다는 것은 그 누구도 피해자의 관점에서 질문을 이해하려는 노력의 필요성조차 갖고 있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피해자에 대한 각별한 배려가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법정 안은 피해자에게 여전히 폭력적이고 또 다른 상처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공장 같았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에게 인간적인 배려조차 하지 않는 제도적 한계와 인간적 한계는 이해하고 넘기기엔 부당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재판에서 마주한 현실과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에서 마주해야 할 것들을 생각하며 마음이 불편했다. 하지만 불편하다고 외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부당한 부분들을 하나씩 찾아내고 함께 이의 제기하는 동시에 이 부당함이 그 누구보다도 폭력적으로 다가올 피해자에게 조금이나마 심리적으로 힘이 되어주고 그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네흘류도프가 까쮸샤의 재판의 배심원으로 참가하여 큰 심경의 변화를 겪을 때 검사보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검사 보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자신의 성공과 명성에 어떤 영향을 줄지에 대한 생각에 갇혀 있을 뿐 자신이 하는 일이 이 사회에 왜 필요한지, 타인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다. 내가 방청한 재판들에 있던 검사나 판사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자신들이 현재 하고 있는 업무 자체에만 집중할 뿐 그 업무와 그 업무를 집행하는 데 기준이 되는 법률이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은 하지 않는 듯했다. 그 일을 당신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인지 아님 당신 말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것인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이는 사회 정의를 수호하고자 하는 법원 내의 법조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모든 이들이 인간애와 인권감수성을 우선적으로 가질 수 있고 그에 기반을 둔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사는 곳인 만큼 사람과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그 마음에서 모든 것들이 시작하고 끝을 맺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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