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파수꾼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다가 문득 든 생각

by 이상한 나라의 옥

삶을 살아가다 보면 지키고 싶은 호밀밭이 몇 개 생기기 마련이다. 그중 관계의 호밀밭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호밀밭을 스쳐 지나갔고 개중에는 호밀밭 안에서 마음껏 거닐고 뛰놀던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출입한 그들 모두가 호밀밭의 구석구석을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니며 호밀밭 어딘가에 있는 절벽의 존재를 알 수는 없다. 이 호밀밭에는 몇 가지 원칙이 존재하는데 파수꾼은 모두에게 이 원칙을 고지하지는 않는다. 원칙을 고지받은 사람들은 절벽의 존재를 알고 호밀밭을 조금 더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라 하더라도 원칙을 지키지 않고 호밀밭을 즐기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위기상황에서 파수꾼에 의해 모두 보호받을 수는 없다.



그 호밀밭은 멀리서 보았을 때 고요한 호숫가와 같았다. 호밀이 흔들리는 것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있는 듯하면서도 너무 조용해서 도통 몇 명의 사람들이 함께 하고 있는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어느 날은 밖에서 호밀밭을 보았을 때 보이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파수꾼은 호밀밭 근처에 누워 호밀밭과 그 안에 뛰놀고 있는 이들의 존재 자체가 주는 충만한 감정들을 온몸과 마음으로 여유롭게 느끼고 있었다. 얼마가 흘렀을까. 저 멀리서 가능한 자신이 지닌 모든 사물들을 이용해 자신의 존재를 소리로 증명하고자 하듯 요란하게 걸어오는 사람이 보였다. 파수꾼과 호밀밭을 대충 훑어본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크기로 파수꾼과 호밀밭의 외양을 제멋대로 평가하며 지나갔다. 그가 지나간 후 호밀밭과 파수꾼에 대한 소문이 떠돌았다. 그 소문으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지만 호밀밭에 머물기를 제안하고 싶은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파수꾼은 개의치 않았다.


계절이 몇 차례 바뀌자 소문도 잠잠해진 듯 호기심과 색안경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방문도 급격히 줄었다. 그 후 다가온 첫여름은 무척 더웠고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호밀밭도 즐기다 떠난 사람, 절벽 아래로 가버린 사람들로 변화를 겪었다. 웬일인지 호밀밭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기쁨을 느끼던 파수꾼조차도 그런 변화들에 지쳐 호밀밭에서 몇 걸음 떨어진 곳 나무 그늘에 종종 드러누워있곤 했다. 파수꾼은 자신이 호밀밭을 지키고 싶었던 것인지 그 안의 사람들을 지키고 싶었던 것인지 아님 도통 무얼 지키고자 했는지 혼란스러웠고 알 수 없는 회의감에 시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괴로워하던 파수꾼은 이 문제에 대한 답을 호밀밭 안에서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수많은 내외부적 변화들을 겪으면서도 호밀밭을 사랑하여 그 안에서 함께하고 있고, 파수꾼이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준 그 사람들을 관찰해보기로 한 것이다. 그 사람들이 호밀밭을 즐기는 모습 속에 그가 호밀밭을 지킴으로써 추구하고자 한 형이상학적인 가치들이 담겨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파수꾼이 지켜본 호밀밭에서 오래 함께한 사람들은 편안해 보였다. 그들은 호밀밭에서 그들의 결점을 가리려 하지 않았고 육체를 치장하여 존재를 더 화려하게 보이려 애쓰지도 않았다. 그렇게 자신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호밀밭을 대했고 교감하고자 했다. 또 호밀밭에서 즐기며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을 파수꾼에게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파수꾼과도 종종 호밀밭에 대해 애정 어린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들은 호밀밭을 그들의 취향에 따라 제멋대로 바꾸려 하지 않았고 호밀밭의 변화를 함께 하고 있었다. 파수꾼의 호밀밭을 지키는 방식도 존중해주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을 지켜보며 생각해보니 파수꾼은 그들이 호밀밭에 존재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편안했고 행복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지금은 매 시간 그들을 지켜보며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해주지 않아도 될 만큼의 신뢰도 쌓여있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파수꾼은 깨달았다. 자신이 호밀밭을 통해 지키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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