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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Aug 23. 2019

(어쩐지) 운수 좋았던 날

day4. 태초의 자연에 표류하며


 우지끈. 철퍼덕. 꽝. 엉덩이가 붕 떴다가 풀썩 내려앉았다. 아니 허공에 떴다가 좌석으로 곤두박질했다. 나름 튼튼한 차라고 빌린 사륜구동 포드가 균형을 잃고 양옆으로 몸서리친다. 무슨 소리냐고? 피야다르글리유푸르 캐년에서 파그리포스(fagrifoss) 폭포로 가는 길에 만난 비포장도로 덕분이다. 형광 녹색이 너울너울 등선을 이룬 기암괴석은 초현실적인 달리의 그림 속에나 있을법한 풍경인데 몸이 4D로 막무가내로 흔들리는 거 보니 꿈은 아니다. 거친 자갈밭을 올라타는 순간 익스트림 스포츠 선수가 된 기분에 사로잡혔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티비가 아니라 현실이야! 그것도 내가 당사자라고! 자갈밭의 울퉁불퉁한 표면에 몸이 상하좌우로 덜컹대자 도시 촌뜨기인 우리는 곧장 겁에 질려서 사색이 됐다.


 게다가 우리는 어쩌다 가-끔 운전대를 잡는 운전이 능수능란하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그나마 가장 운전에 능숙한 sunnyi가 운전대를 잡았지만 핸들 마스터는 잘 닦인 포장도로에서의 이야기였다. 내비게이션은 이 거친 자갈길을 10km는 더 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몸이 이렇게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는데 차량 바퀴가 펑크 나진 않을까. 1번 국도에서 한참을 내륙으로 와버렸는데 오지에 sos가 가능할까. 별별 생각이 들었다. 단지 여름에만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고 그 외에는 기상 사정으로 완전히 폐쇄되는 이 내륙 구간. 그 사실로부터 이미 직감했어야 했다. 이 청정지역에서는 이산화탄소를 뿜어대는 우리 존재가 지구의 오염 분자라며 환영받지 못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바로 직전 피야다르~블라블라 캐년에 완전히 도취되어 자연으로 환각 상태를 체험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알았던, 환희에 넘쳐 “올-롸잇”을 외쳐대던 모습은 이 구불진 길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자연의 위엄 앞에 새파래진 쫄보 셋만 남았다.


여기서 잠깐. 방금 전 향했던 피야다르글리유프르 캐년을 소개할까 한다.


* 피야다르글리유프르(Fjaðrárgljúfur)캐년

 깊이 약 100m, 길이 약 2km에 이르는 협곡.

약 9000년 전에 빙하가 녹아 이 곳으로 흘러들어 200만 년 동안 축적된 땅을 깎아내려 형성되었다. 기본 스케일이 만년. 나무 한그루, 로키, 태백산맥 같은 거대 산맥 없이도 굽이굽이 협곡과 그 사이로 흐르는 청아한 빙하의 아우라에 만취한 감흥을 경험할 수 있다.


피야다르글리유프르 캐년. 눈 앞에 벌어진 광경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저너머 끝이라는게 있는건가. ‘지구는 둥그니까’를 실감했던 광활함.


폭포까지 10km 남았다.

 

 벌게진 눈으로 앞으로의 내비게이션만 응시했다.

20리만 더 가면 되는 거야. 옛날엔 걸어서 등교도 한 거리였어. 그럼 전설의 엘프들이 살 것 같은 폭포가 나타날거야. 라고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수다수다가 넘쳤던 차 안도 바깥처럼 적막에 휩싸였다. 조금씩 1킬로씩 이렇게 단 열 번만 참으면 되겠지. 덜컹이는 몸을 붙잡고 심신의 캄-다운에 도전했다. 차창 풍경은 여전히 끝을 모르고 펼쳐지는 동산이었고, 마치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던 태초의 자연 그대로인 것 같았다. 가도 가도 사방이 고요하고 망망대해의 고즈넉함에 소름이 돋았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그 아름다운 식인 섬이 연상되는 적막함과 이에 대비되는 생기 넘치는 풀빛들이 우리의 기력을 꿀떡꿀떡 흡수하는 것 같았다. 이때 살아 움직이는 동물이라곤 보이지 않던 이 지대에 무언가가 유심히 우리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새 한 마리였다. 혹시나 우리가 찾던 아이슬란드의 상징인 새 '퍼핀'인가 싶어 잠시 우리는 환호했다. 자세히 보니 벌건 눈을 가진 새였다. 주홍빛으로 가득 찬 눈을 들여다보자 음산한 기분이 전해졌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사랑받는 새 퍼핀은 눈 테두리가 주황색이었고 펭귄처럼 뒤뚱이는 귀여운 자태의 몸이었는데, 이이는 홀쭉하게 빠졌다. 그 새는 우리가 다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서 와. 이런 태초의 자연은 처음이지?"라고 말하는 루시퍼의 속삭임처럼.


아이슬란드의 상징 퍼핀 vs  파그리포스로 향하던 길에 만난 새 (레이캬비크 서점의 조류 도감에서 빌췌)


 그렇게 덜컹이다보니 조금씩 키로수가 줄어드는 것이 보였다. 이제 목적지까지 1km- 로 접어들었나 했더니 왠걸. 남은 거리가 3Km로 늘어나 있었다. 갑자기? 분명히 미터 단위로 줄어드는걸 확인했는데 흑마술에 씌었나. 급히 구글 지도를 재확인하려하자 인터넷 연결이 끊겨있었다. 허. 왜 거리가 늘어났는지 좀체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제야 오프라인 지도도 다운로드할걸 하는 후회가 엄습했다. 그나마 기대고 있었던 hope 마저 사라진 것이다.

갈까. 스톱할까

갈수록 목적지까지의 거리는 조금씩 더 늘어났고 마음 졸이며 우리는 '선택'이란 걸 해야 했다.


  인내 게이지는 바닥으로 향하고 있었고 이쯤이면 폭포의 스산한 기운이 느껴져야 했지만 여전히 그 동산에 그 나물이다. 그러다 눈 앞에 개울이 펼쳐진 것이 보였다. 하하. 우리가 잘 못 본 걸까. 아니다. 나의 시력은 라섹이라는 의학의 힘을 빌린 후로 헛것을 보는 일이란 없다. 물가가 맞다. 설마 우리 저길 건너야 하는 건가요.. 왜 재난영화 공식처럼 장애물은 끊이지 않는 걸까. 급기야 이 차가 수륙양용이 될지도 가늠하지 못했다. '아 이래서 멋진 모험가들은 지프차를 타는구나' 싶은 마음도 들었다. 사륜구동을 빌리긴 했지만 도시인인 우리가 차로 개울을 건넌 성공 경험을 가졌을 리 만무했다. 급히 차에서 내려서 물의 깊이를 확인했다. 깊이는 얕은 편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잔뜩 겁먹은 우리 멘탈로 어찌어찌 폭포에 당도한다고 해도 one way인 이 곳에서 10km를 고스란히 되돌아가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혹여나 생길 돌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오프라인 지도도, 운전실력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기에 이대로 직행한다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되었다.

언뜻보면 신차 광고CF 같지만 개울가를 맞닥뜨린 후 실제 표류 상황.

 

 스톱. 결국 폭포를 포기하고 다시 돌아가기로 모두 동의했다. 더 이상 운전자에게도 무거운 책임감과 곤경을 안겨다 주고 싶지 않았다. 폭포라는 장엄한 광경도 좋았겠지만 혹여나 차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앞으로의 일정에 지장을 줄만큼 중요한 광경이었던 것은 아닐 것이라 판단했다. 이제 어렵게 결정했으니 최선을 다해 돌아가면 된다. 우리는 다시 왔던 길을 조심조심 돌아왔다. (차의 전면엔 숱하게 자갈이 튄 흔적이 여실히 우리의 모험을 증명했다)


아이슬란드 1번 국도에서 벗어나 내륙으로 들어가는 여행자들에 건네는 팁
1. 사전에 오프라인 지도를 다운로드하여 갈 것
2. 수륙양용이 가능한 사륜구동을 빌릴 것
3. 차량보험에 자갈 보험이 있는지 확인할 것. 비포장도로 주행도 커버되는지 확인(자갈 보험이 된다 해도 보통 주차할 때 잠깐의 자갈길만 허용한다)
4. 개울을 만났을 때의 상황도 대비해서  차량 침수 커버가 되는 보험을 들어둘 것 (풀커버 보험에 포함이 안되므로 추가 이중 보험을 알아보는 것이 좋다)


 돌이켜보니 어쩐지 오늘 운수가 좋다 했다. 일정도  여유로워서 충분히 소화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다. 오기 전 참고한 여행 후기들에는 흐린 날씨들이 주를 이뤘는데, 우리가 간 날 해는 청명했고 바람 한 점 없어서 아이슬란드에서도 귀한 날씨였다. 사진도 기가 막히게 잘 나왔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캐년은 우리가 도착한 전날부터 개방했다. 그런데 다시 한번 여행도 우리 인생살이도 모든 전리품에는 대가가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된다. 여행 일정이 원활하게 굴러간다면 한 번은 의심해보아야 한다. 그래서 마음을 조금 내려놓는 것도 좋다. 내가 사는 터전에서도 내 맘대로 되지 않는데 이국땅은 오죽하랴. 배산임수의 숙소를 등지고 나올 때 바다를 빛내던 쨍쨍한 날씨, 햇살이 넘치는 스코가포스, 운 좋게 개방되어 본 캐년의 장엄한 굴곡과 우윳빛 빙하. 우리에게 허용된 것은 거기까지였다. 아 아니다.

그러고 보니 우리에게 깜짝 선물로 제공된 풍경이 하나 더 있었다. 생각지 못한 즉석 경품이었다.

 

기기묘묘한 돌탑 풍경(Lauskalavarda)


 숙소를 나와 캐년으로 향할 때 들렀던 돌탑들(Lauskalavarda)이다. 저멀리 설산이 아득하고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펼쳐진 암회색 돌탑들은 이 세상 것이 아닌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었다. 마치 외계인이 화성에서 쌓아 올렸을 것 같은 기괴함이었다. 누가 여기에 탑을 쌓기로 결정한 걸까. 한편으로는 웅장한 자연 광경에 겁을 내면서도 한 땀 한 땀 돌을 올리는 건, 선사시대부터 이어진 인류의 DNA인 것 같아 반갑기도 했고 그립기도 했다. 수만 년간 이어져온 인류의 무한개의 소원들도 모두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내 마음의 평화와 사랑하는 이의 건강과 행복 같은 기원들을 담았겠지. 돌탑의 기운을 담은 실바람에 지구의 반지름만큼 떨어져 두고 온 나의 가족들과 잊고 있었던 소망들도 생각났다. 태양계의 일부인 지구, 또 그보다 아주 작은 일부인 대기권에 형성된 이 자연과 자연이 허락한 곳에 옹기종기 사는 인류의 소원들이 어우러진 절경이었다.


또 한반도 역사만큼 오천 년을 살아온 이끼 군락(Scenic green lava walk)을 본 것도 큰 수확이다. 그들은 아직 숨을 쉰다. 밟으면 꿈틀대진 않지만 폭신하다. 그래서 밟으면 자연 유산을 침해한 격이 되는 이 곳. 우리는 또 지구의 작은 티끌, 모래, 먼지가 되어 희희낙락했다.

천년 넘은 이끼밭 앞에 이제 겨우 삼십년 산 그림자를 드리운 지구의 티끌,모래알,먼지


 비록 어떤 실패도 있었지만 그 전과는 또 다른 아이슬란드를 담뿍 보았던 날. 강풍으로 신음하는 보통날과 달리 솔솔 부는 미풍에 햇살이 환해서 외투를 벗고 땀을 흘려본 날. 서울로 돌아와서 차분히 파그리포스로 가는 길을 검색해보니 조금 더 대비해 갔다면 당도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지만 미련은 남지 않는다. 우리는 충분히 아이슬란드가 허락해 준 날씨를 흠뻑 즐겼고, 보았고, 얻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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