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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Aug 20. 2019

운수 좋은 날

day4. 긍정이라는 게 폭발하면서

 운수 좋은 날이 있다. 버스 전광판에 '곧 도착' 이라며 내가 타야하는 버스번호가 흐를 때, 우당탕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해 계단을 막 뛰어 내려갔는데, 지하철이 나를 향해 문을 활짝 열고 기다리고 있을 때, 점심시간에 회사 근처 맛집을 갔는데 딱 한 테이블이 남아있어서 기다림 없이 앉았을 때가 그렇다. 하물며 이게 하루에 일어난 일이면, 불현듯 뒷통수에서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도 먹질 못하냐'며 닭똥같은 눈물 쏟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이 떠오르면서 불안해지지만 말이다.


 그 날도 운이 좋았다. 산을 타시는 분들은 흔히 산이 나를 허락해줬다는 겸허하고 순응적인 표현을 사용하신다. 자연이 나를 받아 주었다고. 그동안 나는 너무나도 시티즌citizen이기 때문에 이를 제대로 느낄 일이 전무했는데 이 곳에 오고 나서는 하루하루 너무나도 절실하게 이 말을 느끼게 되었다. 감사하다는 말이 술술 나오는 걸보니 인격이 뭔가 진화되는 느낌인게, 나 본투비네이쳐였던 걸까.



  춤을 췄다. 이 파란 하늘에 랜덤재생 된 노래가 너무 좋아서 풀밭으로 막 뛰쳐나가 춤을 췄다. 그 날 아침, 우리가 다같이 춤 춘 이유는 그냥 날씨랑 노래와 기분의 궁합이 너무 좋아서다. 심지어 셋이 바다를 향해 함성도 발사하고, 말도 안되게 폴짝폴짝 뛰다가 갑자기 기록을 해야한다면서 동영상을 켰다. 둥둥거리는 이 노래의 베이스처럼 분명 이 순간을 영원히 가슴 둥둥거리며 기억하고 그리워 할 것이라며, 강요된 흥이라도 좋으니 기록하자 했다. 춤이랄 것도 없는 우악스러운 서로의 몸짓에 한참을 깔깔거리면서 웃었다. 서울에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보고있자니 액자 속 그림 같았던 뷰
이 푸른 앞마당이 우리의 스테이지


all right !


 오늘은 좀 더 남쪽으로 달리는 날이다. 오늘의 목적지는 피야다르글리유푸르캐년-파그리포스 2곳뿐이라 어쩌면 가장 여유로운 일정이었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이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호기심어린 곳들이라 그 곳으로 향한다는 것에 말 그대로 설렘사 할 지경이었다. 한 곳은 1년 중에 아주 잠깐씩만 개방되는 곳이었고, 나머지 한 곳은 그 와중에 다소 험악한 길을 헤쳐야 하는 곳이라 정보의 사각지대에 놓여져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친절하지 못한 곳들인만큼 어떤 돌발상황이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런데 뭐 안 되면 말고, 아니면 말고, 그럴 수도 있지, 되는대로 살자. 하루에도 몇 번씩 구글맵에 별을 달아뒀던 내가 아닌가. 부지런만 하면 갈 곳은 많다. 옭아매는 것 하나 없이 오히려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이 곳을 굳게 믿으며 이례적으로 볼륨을 크게 틀고 출발해본다. 당연히 첫 곡은 아침에 우리를 저 바다의 활어같이 춤추게 한 그 노래! green day의 holiday다. say hey!

 

 첫번째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한 너덧번은 멈칫 한 것 같다. 파란하늘마법에 이끌려 어제와 다른 스코가포스를 다시 한 번, 길 가다가 집과 자연이 어울어진 모습이 너무 멋져서 한 번 (사유지라서 못 들어갔다), 갑자기 분위기 돌탑이라서 벌판에서 한 번, 물개처럼 보이는 5천년 된 이끼밭에서 한 번. 잔뜩 흥분했지만 막상 내려서는 기지개 한 번 쭉 펴고 너무 좋다고 한바퀴 둘러보고는 별 일 없다는 듯 다시 차에 타기를 반복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입에 한 단어가 철썩하고 붙어버렸다. ALL RIGHT! 어쩌다 시작됐는지, 왜 말하는지도 모르게 우리는 시종일관 그 단어만을 말했던 것 같다. 올-롸잇! 무큐리의 그 사람좋은 미소는 덤이었다.


어제와는 달랐던 오늘 파란하늘의 스코가포스
풍경은 지루할 새가 없이 신비롭고 웅장하며, 고요하다 캬


 혹시 이 쪽 길로 가야하는 건가요. 선글라스-처음에도 말했지만, 선글라스 없이 내 눈은 무사할 수가 없는 날씨였다-를 껴도 밝은 이 날씨가 주는 조증으로 근심걱정 없던 우리는 처음으로 돌길을 만났다. 돌길은 우리 예상에는 없는 단어였지만, 피야다르글리유프르 캐년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었다. 오마이갓. 이 곳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제일 먼저 '저, 이 곳에 꼭 가야겠습니다!'라고 선언한, 맵에 무려 하트표를 쳐 둔 기가막힌 머스트해브스팟인데다가 무려 우리가 아이슬란드에 도착하고 나서도 닫혀있다가 어제서야 개방 된 완전 소중한, 이 때가 아니면 못 볼 협곡이었다. 가야만했다. 나는 선글라스를 벗어제끼고 안전운전차 자연스럽게 앞으로 더 수그려졌고, 잠잘 때 말고는 오디오가 1도 비지 않았던 우리에게도 잠시 침묵의 시간이 찾아왔다. 간간히 ‘다 온 것 같아요. 조심하세요.’라는 응원의 목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대 박 사 건


 미쳐버렸다. 눈을 비비고 봐도 미친 풍경이었다. 어쩜 한 프레임 한 프레임마다 새로운 장면이 꽂혔다. 도대체 이 곳은 왜 알려지지 않은걸까. 분명 읽을 수 없는 이름때문일거라고 생각했지만, 당분간은 이렇게 철저하게 아는 사람만이 왔으면 하는, 악마의 주머니라도 훔쳐서 이 곳의 일부만이라도 넣어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흔하지 않은 곳에 우리가 있다니, 가고싶어도 갈 수 없는 이 선물같은 이 곳에 우리가 와 있다니. 서울로부터 8,500km쯤 떨어진 곳에 우리의 아지트가 생긴 느낌이었다.



 그런데 파그리포스로 향하면서부터 유난히 길을 잃기 시작했다. 그럼 그렇지, 현진건의 김첨지가 생각나면서 뒷통수가 시큰해졌다. 길 한가운데인데 도착했다고 하질 않나, 엄연히 방향이 다른데 제대로 가고 있다고 안내해 주질 않나. 우왕좌왕하면서도 다시 바른 길을 들었는데, 그 길은 시작부터가 무지막지한 자길길. 무려 10km를 더 가야하는데.. 우리는 그 길을 갔어야 했을까, 말았어야 했을까. 멈췄어야 했을까, 끝까지 갔어야 했을까. (자세한 이야기는 이번주 금요일 dana님의 글에서 확인)


모든 선택의 순간


 갈림길 앞에서의 판단은 모두 후회가 남는다. 할 껄, 하지말 껄. 처음에는 그 선택지 중에서 ‘정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그 기대한 값이 나오지 않으면 잘못된 선택을 한 내가 부끄러웠고, 다른사람들이 나를 비난할까봐 두려웠다. 누가 선택 좀 대신 해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난 그냥 하자는대로 한 죄밖에 없는 것처럼. 하지만 이제 안다. 모든 선택에는 정답이 없다는 걸. 다만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 남는다는 걸 말이다. 겁이야 나겠지만, 모든 것은 사필귀정이 아니던가. 결국엔 다 좋게 될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all right이라고 외쳐대던 오늘의 운수를 한 번 믿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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