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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nyi Aug 16. 2019

선명하게 푸르렀던 곳으로

day3. 숙소에서마저 관광객 모드

 레이캬비크 밖으로 나서 아이슬란드 남쪽으로 향하는 첫날. 운전대를 잡은 내 어깨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너울거리는 2차선 도로와 슬쩍슬쩍 들리는 돌 튀는 소리 그리고 반대편에서 위협적으로 달려오는 큰 덩치의 버스들까지. 슬로우 슬로우 또 슬로우. 조금이라도 음악소리가 커질라치면 흥에 겨워 주의력이 떨어질까 봐 일정 볼륨 이상으로 키우지 않았고, 과속 벌금이 30만원이라는 어마 무시한 소리에 일정 속도 이상을 밟을라치면 이야기를 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해뒀다.

 

 비록 나는 긴장했으나 차 안은 대화가 익어가기에 좋은 공간이었다. 영화에서나 봤음직할 지구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을 배경 삼고, 자박자박한 BGM을 귓등으로 흥얼거리며, 제법 익숙해진 여행 라이프에 우리는 주머니에 넣어 온 이야기를 하나씩 꺼내놨다. 취업준비생일 때 희망했던 직업이 무엇이었는지, 무엇이 그것을 돌연 그만두게 한 것인지, 지금은 어떠한지에 대한 것들이 우리 토크의 첫 주제였던 것 같다. 글자만큼 무겁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알맹이 없이 가볍지도 않았다.  


이 건 그냥 지나치는 한 장면에 불과하다


 그 와중에도 자연은 시시각각 변했지만, 시종일관 채도만 변하는 푸른색이었다. 언제는 희푸른 이끼 동산이더니 언제는 투명하게 푸른 만년설 병풍이었고, 언제는 결코 색이 바래지 않은 회갈색의 돌산이었다. 그러더니 쏟아질 것 같은 산이 내 옆으로 이어졌다. ' 악! 내 옆에 산 진짜 쏟아져 내릴 거 같아. 여기에서 사는 사람들은 너무 무서워서 잠이 안 올 것 같은데 어떻게 살죠'라고 말한 지 2분이 채 지나지 않아 들려온 말. '여기가 오늘 우리 숙소인 거 같은데요?'


 여행을 할 때 숙소는 매우 중요하다. 가장 중요한 것은 뷰다. 일단 문을 열 때 탁 트여 있어야 한다. 보이는 것이 하늘이든, 바다든, 나무이든, 빌딩숲이든 무언가가 통창을 통해서 와이드하게 보여야 한다. 시차 때문에 새벽에 문득 눈이 떠져도 작은 탄성을 내뱉게 되고, 아침에 푹 자고 일어나 눈을 떴을 때도 왠지 모를 푸근한 마음에 두툼한 이불의 무게감을 느끼며 쭈-욱 기지게 한 번 켜게 될테니까.


 그래서 방금 지나쳐 왔던 거기가 바로 내가 꼭 잠자고 싶다고 해서 예약한, 뷰가 정말 좋다고 해서 가장 기대한 곳인데 산사태가 일어나지는 않을까 걱정하게 생긴 거다! 물론 걱정인형의 예사로운 걱정임을 눈치챈 여행 메이트들이 여기 뷰가 환상적이라면서 기대된다고 재잘거리는 바람에 금세 잊긴 했다. 그 덕에 이어지는 셀야란드폭포-스코가포스-디르홀레이-레이니스파라까지 우리는 텐션의 불씨를 활활 태워 올렸고, 그야말로 그 구역의 유쾌 상쾌 호쾌한 웃음 낭비꾼들이 되었다.


· 셀야란드포스 selijalandfoss - 자칭 체험형 폭포. 출발 전 날까지 고민했던 '우비' 덕을 톡톡히 봤던 곳, 결제가 안 되는 카드 덕분에 주차비 해결을 하고자 식은땀을 한 바가지 흘렸지만 결국엔 해피엔딩.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날씨 못 잊어! (자세한 내용은 dana님 글 추천)

· 스코가포스 skogafoss - 남쪽 폭포 중에서 가장 웅장했던 폭포. 셀야란드포스와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데 날씨는 극과 극이라서 깜짝 놀람. 덕분에 이 폭포의 남성성을 더욱 극적으로 느낄 수 있었음. '쓸데없는 짓이 제일 재밌음'을 여실히 느끼게 해 준 곳.

· 레이니스파라 reynisfjara - 원래 바람이 많이 불어서 인명사고도 종종 난다던 무서운 곳이라지만 우리는 바람 1도 못 맞아본 곳. 굽신거려 사진 찍어 달라고 해놓고 기회는 한번뿐 just one chance이라고 엄포. 꺄르륵거렸던 하이텐션의 근원지. (자세한 내용은 sophia님 글 추천)


왜 사람들이 스코가스코가 하는지 알겠더라



숙소 앞에 주차를 할 때부터 우리는 돌고래가 되었다. 웃느라고 이미 쉬어버린 목으로 꺅! 하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목은 더 잠겼지만 비실비실 터져 나오는 미소와 탄성은 숨길 수가 없었다. 뒤로는 깎아지른듯한 산이 있고 앞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잔잔한 바다가 일렁이는 완벽한 배산임수. 게다가 옆으로는 양 떼들이 2+1 (큰 양 2, 아기양 1)로 삼삼오오 모여 풀을 뜯는 걸 보니 이것이야말로 가히 최고의 풍수다.


그 날의 우리 집. 여기도 우리도 다 미쳐버렸다
세상에서 제일 아늑했던 또 그 날의 우리 집
세상 섬세했던 또또 그 날의 우리 집


배정받은 방 문을 열었다. 푸르렀다. 푸른색이 눈의 피로도를 줄여준댔던가? 문을 열어젖힘과 동시에 운전하느라 앞을 쏘아보던 눈의 피로감이 슥 종적을 감췄다. 정확히 하늘 반, 풀 반, 양 떼 많이의 기가 막힌 '푸른 뷰'였다. 또다시 이 장면에 우리가 속해 있음이 믿기지 않았다. 게다가 내부 곳곳이 섬세함 그 자체. 1인 1 플러그 보장! 1인 1 램프 보장! 침구류와 정확히 매칭 되는 푸른 수건이 1인 2장 제공! 연신 좋다는 말과 함께 어짜피 사진으로 이 분위기를 담을 수는 없을테지만 이 곳을 잊어서는 안 된다며 여기저기를 사진 찍고 돌아다니는 메이트들의 웃는 모습을 보는 것도 좋았다. 들어온 순간부터 '아 내일 아침에 여기 떠나기 싫겠다'는 생각이 든 건 나뿐만이 아니었나 보다.


내 눈 속에 영원히


 바랄 것 하나 없는 일상에서도 집은 ‘빨리 가고 싶은 곳’이다. 탈출하고 싶은 곳이 활개띄는 생활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환대받는 장소인 셈이다. 하물며 여행인데 숙소가 ‘잠자는 곳’으로만 존재하는 것은 왠지 서글프다. 몇 시간 머무르지 않는다고 아무 곳이나 머무는 건 괜찮지가 않다. 서울에서 볼 수 없는 풍경을 무려 그 날의 우리 집에서 더없이 생생하게 느끼니 모든 순간이 아쉽게 행복하다. 많이 누릴 일 없는 이 푸름을, 눈이라도 부릅떠서라도 선명하게  박제하고 싶다. 부르면 언제든 내 앞에 굽이굽이 펼쳐 낼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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