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5. 빙하와 검은 폭포에 서서 생각한 것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아니다. 나는 그 반증으로 아이슬란드를 떠올린다. 하늘 아래 한 번도 못 본 ‘원형’을 보려면 아이슬란드에 와야 한다고 말이다.
우리는 아이슬란드를 가로로 반 잘라 남부를 돌았다. 그렇기에 서쪽인 레이캬비크에서 조금씩 동쪽으로 향했다. 사실 우리가 아이슬란드에 첫 발을 내딛었을 때는 우리가 사랑하는 남쪽 섬 제주도 같다는 의심도 했고 황량한 들판에 Hollywood 간판이 내걸린 미서부 어디쯤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며칠 전의 우리를 단죄하기로 한다. 동쪽으로 가면 갈수록, 남미의 문명 발상지 같기도 하고 알래스카의 극지 같기도 한. 그야말로 대자연이란 말론 다 표현이 안 되는 nowhere nature다. 뻥 뚫린 시야를 디폴트 값으로 들, 풀, 눈, 바람, 햇살을 총집합한 지구의 사계와 빙하와 화산이라는 물과 불의 극한을 품은,
진정 어디에도 없는, 그러나 지구의 모든 이름인.
이날은 대망의 빙하 트래킹을 하는 날. 오늘의 목적지인 스카프타펠 국립공원(skaftafell)에 도착하자 저너머 빙하가 덮인 산이 우리의 시야를 강타했다.
빙하를 실물로 보자 우리는 생애 처음 두 발로 빙하를 밟는다는 기대로 풀가동되었다. 먼저 우리를 이끌어줄 가이드를 만났다. 호주에서 왔다는 그녀는 비타민c를 머금은 듯 활력 넘치는 하이톤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빙하에서 사는 유일한 생명체도 손에 꼭 쥐고 있다가 펼쳐내며 소개해 주었다. 쥐와 같은 모양이라 해서 ‘마이스’라 불리는데 정말 금방이라도 찍찍할 것 같은 모양새였다. 너도 보통 내공이 아니구나. 혹한을 이겨낸 극지식물을 쓰담쓰담하는 것으로 이 투어는 시작됐다.
빙하 트래킹은 가이드 투어로 전 세계 여행객들과 팀을 이뤄 움직이게 된다. 우리 팀에는 한 인도인 가족이 있었다. 미국에서 살며 가족여행을 온 부모와 7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 딸이었다. 아이는 가이드에게 종달새처럼 쉴 새 없이 말을 걸었다. 미국에 산지 오래됐는지 인도식 억양도 스미지 않은 네이티브 영어다. 순간 나는 우리 셋이 독서모임 도서로 함께 읽었던 인도계 미국 작가 <줌파 라히리>의 소설에 등장한 인도인 이민자들을 떠올렸다. 작가는 인도의 뿌리 깊은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이민자들과 미국 문화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 사이의 가치관의 충돌을 이야기로 쓴다. 이 곳에서 실제 미국에 사는 인도인들을 만나자 그의 소설과 매칭 되어 버렸다.
설마 너도? 나도! 셋이 일제히 같은 소설을 떠올리는 텔레파시가 통했다. 이 참에 북극의 기운을 받았는지 빙하 문턱을 오르면서 우리는 이 가족을 닮은 주인공들을 가정하고 릴레이로 이야기를 지어나가는 가공독서회를 열기 시작했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상황극을 하다보니 설원이 펼쳐진다. 이제 빙하 투어의 최정점까지 왔다.
반전이 있었다면 빙하 체험은 눈 깜짝할 새에 끝나버렸다는 것. 투어 3시간 중 체험 준비와 등반 시간이 2시간반. 빙하에는 30분도 있지 못하고 내려오게 돼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우리에겐 스카프타펠이 가장 자랑하는 볼거리가 남아있었다. 검은 폭포 스바르티포스(Svartifoss)였다. 용암이 식으며 형성된 거뭇한 현무암 주상절리가 폭포를 감싸주고 있는 곳이다.
폭포까진 한 시간 가까이 걸어야했지만 이르는 길 또한 최고의 여행 코스가 되었다. 지옥의 인터뷰(나만 시켜 자꾸), 징검다리 건너기 내기(가위바위보에서 져서 당첨), 눈 안의 요쿨살롱 관찰하기. 야자 끝난 여고생들이 떨어지는 낙엽에도 우스워 배를 잡고 웃다가 집에 들어가기 아쉬울 정도와 흡사한 여정이었다. 어느새 스바르티포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멀리서도 이 폭포는 뭔가 특별해!라고 직감했다. 굴포스, 셀야란드포스, 스코가포스(앞의 글들 참조) 등 굴지의 폭포를 보았으니 이들보다 더 장대할까도 싶어 반신반의했는데. 이 폭포가 오늘의 하이라이트였다. 푸른 동산 안에 U자 형태로 굽이친 언덕이 비밀스럽게 폭 쌓여 있었고 정중앙으로 투명한 물줄기가 낙하하고 있었다.
폭포는 거대한 품으로 우리를 맞이했다. 시원한 물줄기와 함께 새까맣게 빼곡한 주상절리들이 우릴 압도했다. 가만히 물소리를 듣고 있으니 청량한 기운이 나를 감아들어왔다. 이상한 안정감이 들었다. 거칠어 보이지만 세상 고요하게 내 양어깨에 진 삶의 고단한 짐을 잠깐 내려놓아도 된다고 말해주는 공간이었다. 현무암의 까만색이 풍요와 정돈의 색이었을까. 꿈에서라도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있었을까.
돌아가는 길에 표지판을 보니 우리가 느낀 안정감의 정체는 놀랍게도 팩트였다. 자연 상태에서 육각형의 형태가 가장 효과적으로 스트레스를 이완해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말없이 나를 감싸 안아준 위로 같은 느낌의 기원이 이거였다. 몇백만 년에 걸친 시간이 선사한 천연 주상절리들 안에서 심신이 안정되는 진귀한 경험이었다.
게다가 이 폭포의 옆면은 선이 굵직한 흑백의 천연 수묵화가 새겨진 듯했다. 억겁의 형성 시간이 안겨다준 화선지의 붓글씨 같기도 했다. 보기만 해도 새 것의 생각이 샘솟아날 것만 같은 미지의 광경. 그토록 예술가들이 갈망하는 영감이 이 기묘한 공간에 들어서면 번개처럼 꽂히며 천상의 곡조와 안 풀리던 이야기의 타래를 풀어줄 것만 같다. 세상 모든 아티스트들에게 이 곳을 와봐야 한다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레이캬비크의 상징 할그림스키르캬 교회도 이 폭포에서 영감을 받아 건축되었다고 하니 영감의 원천지로는 엄지 척할만한 곳이었다.
살아갈 영감
살아낼 힘
인생에서 스쳐간 찰나의 아름다운 풍경이 일생을 살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고려청자의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운 푸른색을 보며 난 착하게 살고 싶어졌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내게 검은폭포도 그런 곳이 되었다. 막연히 힘에 부칠 때, 골똘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때 나는 이 한 컷에 기댄다.
따지고 보면 우리끼리 상상하고 즐거워한 줌파 라히리 배 가공독서회는 빙하보다 기억에 짙게 남았고, 스바르티포스로 향하며 여고생처럼 깔깔대며 걸은 오솔길은 넋 놓게 즐거웠던 에피소드로 회자하곤 한다. 사무실에 있다가도 실없이 웃음 짓게 하는 기억들. 지금보다 추억을 더 많이 더듬으며 살아가는 나이가 되면 이 날의 기억은 꺼내볼 때마다 타오르며 삶의 윤활유가 되는 연료가 되어줄 것이다. 어린아이들처럼 거름망 없이 보고 느낀 것 그대로 감동하고, 체면도 놓아두고 온 몸으로 춤추고 상황극을 했던- 그것은 빙하가 준 말랑한 상상력이었으며, 주상절리가 내어준 폭신한 쉼터였다.
역시 자연이라는 영감이 최고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