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5. 피터팬의 길
여행에는 스타일이 있다고 한다. 깃발을 꽂아가며 바쁘게 스팟을 찍어야 하는 사람, 그 나라의 유명하다는 음식은 모두 먹어봐야 하는 사람, 도착했음에 안도하며 아무것도 안하고 여유를 즐기는 사람 등등. 공교롭게도 이번 우리 여행은 식도락과는 거리가 멀었다. 예정되어 있는 외식은 네번뿐이었고, 도착해서 짐을 풀다보니 각자가 혹시 몰라 끝까지 한 두개씩 더 넣어온 어마무시한 양의 레토르트에 놀라는 와중에, 끊임없이 마트를 들러 요거트, 과자, 계란, 소시지 등을 구매 했기 때문에 결국 외식은 사치라는 결론을 내게 되었다.
한식은 옳았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당황스러웠다. 김과 진미채, 깻잎만 있으면 우리는 돌이든, 이끼든 그게 뭐라도 다 싸먹을 기세였다. 그 와중에 골뱅이쫄면은 일품요리 못지 않았고, 긴 비행을 우리만큼 잘 견뎌준 연어장은 기특하기까지했다. 국물없는 떡볶이라고 사온 레토르트를 국물떡볶이로 만들어도 즐거웠고, 바람에 날아다니는 김만 봐도 행복했다.
드디어 첫번째 외식찬스가 왔다. 완벽한 화성(뷰) 호텔은 주방이 없는 관계로 밥을 사 먹을 수 밖에 없어서 생긴 찬스였다. 두 끼를 먹기에는 비싸기도 하고, 짐도 줄여야 하고, 무엇보다 태초의 자연에 기를 빨린 바람에 입맛도 없이 피곤한 까닭에 후루룩 마셔버릴 수 있는 라면으로 저녁은 때웠다.
오후 6시같은 밤 11시도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지만, 아침마다 암막커튼을 젖히며 들어오는 햇살에 설레는 마음 또한 매일이 새롭다. 이 볕을 놓치기 싫어서 쿵짝만큼이나 잘 맞는 손발로 서로 후다닥 준비하고 챙겨 나갔다. 게다가 오늘 아침은 남이 차려주는 빵이 아닌가! 레스토랑에 들어가는 순간 내가 백조가 된 줄 알았다. 어제 슬쩍 곁눈질로 마음에 새겨둔 그 테이블이 비어있음을 확인 하는 순간 상체는 여유있는 듯했느나, 하체는 이미 그 테이블을 향해 부지런히 발장구를 치는 느낌은 백조의 그것과도 같았다. 나이스! 이 광활함을 앞에 두고 먹는 조식은 아 이려려고 돈벌지 싶은 최고의 낙이다. ‘전 아침을 잘 안 먹어서 저녁을 먹으면 좋겠다’고 말하던 sophia의 말은 거짓으로 판명. 외국 나오면 빵보다는 밥이 생각난다는 내 말도 거짓부렁이. 와플 굽고 빵 굽고 쨈 바르고 계란 얹고 치즈 자르고 한 상 거나하게 먹어제끼니 세상이 다 아름답게 보인다.
배도 부르니 이제 우리는 인터스텔라의 그 곳으로 넘어간다. 아이슬란드에 가서 흔히 한다는 스카프타펠 빙하투어다. 이 날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이 기분에서 왠지 모르게 듣고 싶어 플레이한 곡은 Queen이다.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은 쉴새없이 리듬을 좇고, 의식할 새 없이 따라 부르게 되르는 마성의 프레디 머큐리말이다. 마마- 저스트 킬 더 맨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 로 시작해 올 위 히얼 이즈 뤠뒤오 가가 뤠디오 구구를 지나 요 마이 엑스터시라는 아 워즈 본 투 러뷰i was born to love you로 도착하니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 여행은 벌써 중반을 지나가고 있고, 벌써 기억은 희미해져가는데 이 시간을 잡으려 아둥바둥하는 그 감정이 웃펐다.
인사이드 아웃을 보면 노랗고 파랗고 단색으로 이뤄져있던 기억구슬들이 주인공이 성장함에 따라 붉으면서도 푸르게 울긋불긋 해진다. 이 곳에 대한 나의 기억구슬들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지구가 아닌 어느 별쯤에 와있는 듯 한 기분에 돌고래처럼 꺅꺅거리다가도 문득 서울로 돌아가서 다시 갇혀버릴 현실적인 문제들을 생각하면 부지불식간에 입을 닫고 동굴로 들어갈 채비를 하는 걸 보면 내 기억들은 얼룩덜룩 온갖 기억의 색으로 뒤덮이다 검은색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가 분명하고, 기대치 않은 선물처럼 주어진 잔상은 여운이 깊다. 그러니까 퀸이 주는 상념에 빠져드는 것도 잠시, 기대했던 스카프타펠의 기억도 잠시(만 머물고 이미 가물가물)여서 다행이었고, 오히려 이름조차 헷갈렸던 스바르티포스의 엄마같은 따뜻함, 무려 두번째 외식으로 향하는 길에 만난 요큘살롱의 청량함은 오래도록 회자되었다.
아, 생각해보니 오늘이 그 날이구나. 유일하게 콕 찝어 가고자 했던 그 디너의 날. '아이슬란드 맛집'이라고 치면 바로 나오는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한 번쯤은 가서 포식했다던 그 곳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날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먹기 위해 서울에서부터 한식보부상을 자처했는지도 모른다. 랑구스틴은 작은 바닷가재인데, 세계의 모든 진미가 집약되어있는 우리나라에서도 보기가 아주 어렵고, 아이슬란드에서 그 진가를 알 수 있다길래 이것만큼은 설레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나 우리가 시킨것은 당연히 랑구스틴과 오늘의 요리라던 대구. 소고기와 와인까지 야무졌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모든 발자국은 나에게로 온다는 황지우 시인이 떠오른다. 와인 두 잔과 빵맛부터 홀리더니 메인요리가 왜 이렇게 늦게 나오건지 상냥한 종업원의 발소리가 모두 우리 테이블을 향하는 것 같다. 들어올 땐 분명 조용했던 레스토랑 전체가 웅성웅성 시끌시끌해졌다. 하루를 돌이키며 흥분해버린 쪼끄마한 우리 세 명의 쉴새없는 재잘거림과 웃음소리가 발단이 된 것이 분명하다. 요리는 말 할 것도 없고(여백이 없어 맛의 표현은 생략), 입맛을 돋구는 백색소음과 마주하고 있는 좋은 사람들까지, 눈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born to love you 라고 말하고 싶었다.
피터팬되기
시간과 공간의 밀도가 빽빽하게 들어차가는 이 여행에서 희미한 감정이나 막연했던 생각들이 선명하고 분명하게 느껴진다. 이 대자연 속에서 미물인 내 모습에 헛헛해하면서도 밥 먹으면서 하는 의미없는 삼라만상에서 얻는 그 소소한 안정감이 좋은 걸 보니 나는 그냥 평생 감정이 무뎌지지 않는 어린이로 지내려나보다. 왜 어른이 되지 못할까에 스스로를 자책하지 말고 좋은 것도 많고, 우울한 것도 많은 피터팬의 길을 선택하겠다. (이왕이면 팅커벨)
그러니까 밥상에서의 웃고 울고 싸우고 보듬는 소소한 즐거움을 위해, 우리 같이 식샤를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