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월요일 학교에서 만난 그녀는 원래의 털털한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여전히 우리의 관계는 조금 어색한 긴장감이 돌았지만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교실에서도 몇 번 그녀를 힐끔힐끔 쳐다보다 눈이 마주쳤다. 수줍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니 토요일 호수공원서의 일이 문득 떠올라 온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그 주 주말 우리는 압구정 맥도널드 앞에서 만났다. 그녀는 베이지색 면바지에 폴로 체크무늬 남방을 입고, 긴 머리에 폴로 모자를 눌러쓰고 있었다. 오버사이즈 옷들로 그녀의 몸매는 완벽히 가려져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청순한 느낌을 풍겼다. 뽀얀 피부와 긴 머리 때문이었으리라..
정말로 의외였지만 그녀도 나처럼 햄버거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스테이크나 랍스터만 먹을 것 같은 그녀였지만 여느 고등학생과 다를 바 없었다.
맥도널드 안으로 들어가 나는 빅맥을, 그녀는 불고기 버거를 각각 시켜 2층으로 올라갔다. 햄버거를 먹으며 우리는 종종 눈이 마주쳤다. 웃을 때마다 눈이 반달 모양으로 바뀌는 그녀를 보니, 마음이 괜히 두근거렸다. 무표정할 때 다소 새침해 보이는 얼굴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햄버거를 후딱 해치우고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 토요일 압구정에는 잔뜩 멋을 내고 나온 사람들로 붐볐다. 그중에는 비슷비슷한 차림에 우리 같은 고등학생들도 있었다.
스티커 사진을 찍자고 그녀가 말했다.
온 사방이 칸막이 천으로 둘러싸인 기계 안으로 들어가자우리의 몸이 밀착되면서 그녀의 어깨가 내 팔에 부딪혔다. 나는 조심스레 그녀에 어깨에 손을 올렸고 그렇게 사진을 찍었다. 출력된 사진을 보니 둘의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다소 쑥쓰러운듯 다소 경직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우리는 사진을 나눠 가지고 길거리로 나왔다. 그리고 로데오 거리 구석구석을 걸어 다녔다. “인디언 실버” 매장에 들어가 액세서리를 구경하기도 하고, 산리오 매장도 구경했다. 그녀는 산리오의 문구들을 아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 시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많지 않았지만 사람들 북적이는 거리를 함께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갈 때 그녀를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집 앞에서 고백하리라 마음먹고 있었던 것이다. 한남동으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갤러리아 백화점 앞으로 길을 건너 갔다.
“나 버스 안 타봤어. 택시 탈까?”
그녀는 당황한 듯 내게 물었다.
“버스 타고 한남대교만 건너면 돼. 얼마 안 걸려.”
“아 참 너 버스카드 없겠구나. 내 카드로 찍어줄게”
나는 버스에 올라타며 “두 명이요.”라고 기사님께 말했다.
그녀의 집에서 제일 가까운 정거장인 북한남 사거리에서 내렸다. 그리고 그녀의 집을 향해 걸어갔다. 길가에는 연둣빛 나뭇잎들이 돋어나기 시작했고, 지난주보다 날씨가 많이 풀려서 걷기에 딱 좋았다. 걸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망설이기만 하다가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집은 하얏트 호텔 아래 언덕에 위치하고 있었다. 조금 경사진 언덕을 걸어 올라가니 내 키보다 훌쩍 높은 담장들이 우뚝 서 있었고 언뜻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크기의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내가 사는 잠실과는 수준이 달랐다. 우리 동네에서는 기껏해야 제일 좋은 건물이 황금색으로 빛나는 롯데캐슬 건물이었다. 이런 담장 높은 개인 주택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너 좋은데 사는구나.”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곳에 살고 있는 그녀를 보자 순간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오늘 고백해야 한다. 고백 후 키스도 하면 어떨까? 내 머릿속은 괜히 바빠졌다. 나는 이 감정이 사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와 있으면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고, 그녀를 향한 마음이 조금씩 커져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커다란 대문 앞에 도착하자 데려다줘서 고맙다며 얼른 가라고 말했다.
“잠깐만.. 할 말이 있는데…”
나는 우물쭈물 거리며 망설이고 있었다.
“아니야, 이따 통화하자. 얼른가.”
해야 할 말이 있었지만 그녀에게 떠밀리듯 나는 그곳을 내려왔다.
그녀는 재빠르게 대문 안으로 들어갔고, 실망한 나는 터덜터덜 걸어서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나는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돌아오면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 내가 창피했나? 왜 그리 급하게 나를 보낸 거지? ’
‘ 이제 내가 싫어졌나? ’
별의별 생각들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음의 거리만큼이나 그녀와 멀게 느껴졌다.
나는 침대에 누워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