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3월 말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어느 날 그녀와 난 단 둘이서 소풍을 가기로 했다.
“나 일산에 있는 호수공원에 가보고 싶어.”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이유는 말하지 않았지만 사연이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애써 캐묻지 않았다.
그 주 토요일 우리는 대화행 전철을 탈 수 있는 옥수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녀의 집에서 비교적 가까운 3호선 전철역이 바로 옥수역이었던 것이다.
대화행 열차가 들어오자 올라타서 자리를 잡고 나란히 앉았다. 그녀는 상기된 표정으로 지하철 안을 두리번거렸다. 지하철이라는 것을 처음 타 본 모양이었다. 마치 신기한 것을 처음 보는 아이 마냥 눈이 반짝거렸다.
옥수역에서 일산호수공원이 있는 정발산역까지는 무려 24 정거장을 지나야 했다. 아직은 조금 어색한 사이였던 우리는 멀뚱멀뚱 거리며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했다.
“근데 너 집에다가 뭐라고 말하고 나왔어?”
그녀는 비교적 외출이 자유롭지 않았다. 주말에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일은 거의 없었다.
나에게는 주말에 집 밖으로 나오는 일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녀에게는 일종의 “일탈”과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 다 방법이 있지.” 그녀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 방법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그녀는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급생 친구였지만, 나와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려야 할 곳을 지나치기라도 할 까봐 잔뜩 긴장한 채로 정발산역이라는 글자가 보일 때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우리는 지하철에서 내려 일산호수공원으로 걸어갔다.
예상했던 것보다 추위는 더 기승이었다. 겨울 잠바를 챙겨 입었지만 귀가 꽁꽁 얼어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우리 저기 벤치에 앉아서 도시락 먹자. 김밥이랑 샌드위치 싸왔어. “
”아뿔싸, 나는 지하철만 타고 가면 된다고 생각했을 뿐 그 무엇도 준비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아까부터 예쁜 가방을 양손에 소중하게 들고 있었다.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쳐다봤었다. 그것이 도시락이었던 것이다.
우리를 위해 도시락을 준비해 준 그녀를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그녀가 조금 사랑스럽게 보였다.
우리는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도시락을 꺼내었다. 3월에 일산호수공원은 그녀가 생각하던 풍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곳은 황량하고 쓸쓸한 느낌이 가득 풍기는 곳이었다. 나뭇가지들은 앙상하게 말라있었고, 잔디조차도 누렇고 납작하게 눌려져 있었다.
게다가 차가운 바람까지 불어와 분위기는 한층 더 음울하게 만들었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친구를 만나 공원이라는 곳을 와 본 건 처음이었다. 게다가 집 앞 석촌호수도 아니고 일산호수공원이라니..
우리는 채 다 먹지 못한 도시락을 집어넣고 얼른 따뜻한 카페로 들어가기로 했다. 도무지 추워서 버티기가 힘들었다.
카페를 찾아가다 보니 공원 귀퉁이에 커다란 조형물이 보였다. 그 뒤에 숨으면 바람을 잠시 피할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우리 잠깐 저기 조형물 뒤에 있다 가자.”
그녀와 나는 그리로 가 바람을 피했다. 사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터라 조형물도 바람에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추위에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잠바의 지퍼를 내려 안으로 들어오라고 눈짓을 했다. 나는 단지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가 우리는 다시 길을 재촉했다.
추운 날씨 탓인지 공원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가끔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한 아주머니께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서 지나갈 뿐이었다.
그녀와 나란히 걷다 보니 자꾸만 손등이 스쳤다. 분위기는 묘해졌고 나의 마음도 일렁거렸다. 문득 그녀와 키스를 하고 싶어졌다.
“우리 잠깐 저기 앉았다가 갈까?”
말라비틀어진 등나무 아래 벤치가 보였다. 그녀는 “왜?”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잠자코 나를 따라 주었다.
그녀와 나란히 앉아있긴 했지만,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녀는 순진무구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고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입술은 차갑고도 촉촉했다. 나는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감쌌고, 그녀는 양팔로 나를 끌어안았다. 우리는 키스를 하고 또 했다. 언제 멈추어야 할지 모르겠기도 했고,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녀와의 키스는 무척이나 달콤했다.
한참 뒤 입을 떼고 소매 끝으로 그녀의 입술을 닦아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수줍은 소녀처럼 볼이 발그레해졌다.
”이제 가자. “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고, 우리는 호수공원 근처에 있던
”쟈뎅“이라는 카페에 들어갔다. 2층에 위치하고 있던 커피숍에 올라가니 푹신하고 등받이가 높은 소파들이 놓여있었다. 자리에 앉아 따뜻한 커피를 주문했다.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있었지만, 조금 전 키스 때문인지 서로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색한 기류가 흘렀고, 그 사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커피 두 잔이 테이블에 놓였다.
나는 그녀의 옆자리에 앉고 싶어졌다. 그녀가 앉아있던 소파로 자리를 옮겨 나란히 앉았다. 내가 옆으로 가 앉자 그녀는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다.
“나 처음이야.”
나는 순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아직 사귀자는 말도 못 했고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건지 동경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미안해.”
그녀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나를 올려다봤다.
“ 왜 그렇게 말해. 난 좋았단 말이야.”
“그리고 내 처음 상대가 너라서 좋아.”
우리는 마주 보고 씩 웃었다. 우리는 따뜻한 커피를 마시며 몸을 녹였다.
별 말이 없었지만 불편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다시 지하철에 몸을 실은 우리는 추위 때문에 잔뜩 움츠렸던 탓인지 노곤노곤 해지면서 금세 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벌써 옥수역이었다.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든 탓에 어깨가 저려왔다.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이현아 옥수역이야. 얼른 내려.”
잠에서 깨기 힘든 듯 눈을 비비며 잠시 눈을 뜬 그녀는, 아직 꿈을 꾸고 있든 듯했다. 나의 팔을 끌어안더니 “너랑 헤어지기 싫어. 너 갈아타는 데까지 같이 갈래.”
결국 옥수역에서 내리지 못한 그녀는 계속 내 팔을 꼭 끌어안고 있었다. 지하철은 동호대교를 건너 압구정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현아, 우리 학교에서 매일 보잖아. 이번 역에서 내려서 반대 방향으로 갈아타고 다시 옥수역으로 가자. “
나는 그녀를 달래듯이 얘기했고, 그녀는 이내 착한 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이가 이렇게 애교가 많은 아이였나?’
숫기 없어 보이기만 하던 그녀는 첫 키스 후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왔다. 먼 길을 오가는 게 제법 힘들었나 보다. 처음 해보는 공원 데이트는 나에게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비록 황량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었지만 서울을 벗어나 우리끼리 제법 먼 곳을 다녀왔다는 자체가 뿌듯했다.
그리고 그녀와의 키스는 너무 좋았다. 마치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마음이 두근거렸다.
‘그녀를 사랑하는 걸까?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침대에 누워 다시 그 장면을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다짐했다.
‘ 고백해야겠다. 사귀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