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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니 Dec 31. 2020

결국엔 사람이다

위드 코로나 시대, 사람이 가장 크게, 진하게, 깊게 거론되고 있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유독 이런 말을 많이 해왔다.



"항상 사람이지"

"늘 결국 사람 아니야?"

"언제나 사람이잖아~"



밑도 끝도 없이 기승전'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게 된 것은 그야말로 여러 사람을 지켜보고, 그 사람들 속에서 나 또한 사람으로 사회화 과정을 겪은 이후라 해야겠다. 경험과 해프닝, 에피소드와 추억의 면면마다 자연스럽게 '사람'이라는 존재가 인생 정곡을 늘 꿰차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사람'이 말이다... 데이터 기반 테크와 AI에 밀려 '사람'은 하마터면 트렌디하지 못한 키워드가 될 뻔했다. 딱 12개월 전, 우리 사회의 모습이다. 


그리고 현재, '코로나'라는 바이러스가 장기화되며 'With Corona' 시대 속에 우린 그 어느 때보다도 사람이 가장 크게, 진하게 그리고 깊게 거론되고 있다.






 



함께 일을 하다 보면 '내 무리'인지, '니 무리'인지 정도는 쉬이 알아차릴 수 있다. 회사에서 조우하고, 살을 부딪히며 밥을 먹고, 히히 락락 둘도 없이 떠들다가도 주말에 연락하면 왜 인지 아주 살짝 어색하고 닭살 돋는 연대감 발생. 딱 적당한 수준의 '사회 사람'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회사 사람'이라고도 한다. 무엇이든 간에, 나는 이런 관계가 참 좋았다. 정말 객관적인 관계이기 때문이다. 나이, 경력, 출신을 떠나서 나를 모르는 그로부터, 그를 잘 모르는 나로부터 나는 더 자유로울 수 있고, 더 객관적일 수 있고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요새, 나는 가끔 이런 생각을 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은 생각을 하고 사는 것 같았다. 여기저기 보이는 유독 몇몇의 생각이 '대표 생각'이 될 필요는 없는데,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사람들이 코로나를 핑계로 자기 계발의 유행에 젖어들고 있었다. 유명 스피치를 하는 유튜버의 클립마다 댓글을 달며 칭송했고, 그들이 원하는 삶을 응원해주기 바쁜 사람들이 너무 빠르게 많아졌다. 내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고 유튜버의 책 리뷰로 독서를 대신했고, 그들이 착용한 옷, 사용한 물건, 먹은 음식이나 약 까지도, 우리는 그 셀렉션을 큐레이션이라 신뢰하며 절대적인 컨피던스를 일방향으로 던져줬다. 남들의 생각을 카피하는 데에 익숙해졌고 고유의 색이 사라지는 듯(심지어 면접을 보다 보면, 지난주에 참석한 면접자와 똑같은 말을 하는 이번 주 면접자를 대면하게 된다)한 움직임을 나는 뚜렷하게 보았다. 


vs.


반면, 누굴까? 몇 살 일까?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도대체 어떤 영향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영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평소에 무엇을 읽을까? 볼까? 생각할까? 정말로 그야말로 팬심으로 가득 차, 사소한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기도 했다. 이렇게 나의 생각 고리 유발자들을 위와 동일한 생태계에서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찬란한, 정제되지 않은, 용기 있고 섹시한 생각과 콘셉트는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하는지, '내 경험에 따르면 말이야…..'라는 라떼워드를 애초에 잘 감추길 참 잘한, 그런 친구들을(대체적으로 모두 나보다 어리다) 발견할 때는 정말 나를 다시 한번 설레게 해 주어 참으로 고마웠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무엇을 잘하려고 하는가 - 


 


나는 늘 중간이 없었다. 불을 켜려면 환하게 모든 방 불을 켜고, 그렇지 않다면 싹 꺼 버렸다. 한 발짝 앞으로 디딜 빛의 그림자도 없이. 그렇게 확실한 것이 좋았다. 아니, 그것이 좋은 것인 줄 알았다. 그렇게 '도' 아니면 '모'처럼 올인하고 달리고, 중독처럼 몰두하는 것이 '프로 일잘러'라고 생각한 무수한 직장인의 삶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마흔이라는 나이가 친구처럼 느껴지는 어느 날, 갑자기 이러한 생각이 들었다.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어떠한 철학도 따르지 않고,

원래 이런 것도, 원래 저런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요새 잘 나가는 누구의, 혹은 무엇의 방향성도 관계없이,

다 필요 없고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보면 어떨까





 


그런 일을 하면 행복할 것 같다고(지금 불행한 것은 아니지만) 미로에게 말을 꺼냈을 때, 그녀는 묘하게 내 꿈을 자꾸 업그레이드시켜줬다.(더 아름다운 미사여구가 필요하지만 업그레이드 이상의 단어가 없다) 미로와 나는,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세상의 소리 중 서로에게 블루투스 이어폰 같은 존재다. 세상에 자욱한 무수한 소음 속에서 나의 단어와 문장을 가슴으로 듣는 자, 그녀가 말하는 작은 소음과 자꾸 꼬였던 전파를 마냥 풀어주고 공감하고 싶었던 자. 나는 그랬다. 귀에 대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가슴으로 듣는 관계에서는 아무런 확성기가 필요하지 않았다. 


 


만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사회 친구. 우리가 영리적 목적이 아닌 진짜 '느낌'에 충만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단 한 번도 이렇게 시작한 적은 없지만, 내 경험과 업계의 통상이 정답은 아니니까. 단 한 번도 이랬던 적이 없어 너무 즐거웠다. 아주 작은 하나를 만들더라도, 정말 치열하고 치열하게 사람이 정중앙을 관통하는 그런 무형의 서비스, 유형의 제품을 만드는 것이 꿈이었다. 내가 사회 사람 관계에서 미로를 발견하고, 미로의 즐거움과 슬픔, 고민과 꿈을 엿보고 들으며 그냥 그렇게 미로와 자연스럽게 북어게인을 함께 하게 되었다. 2020년의 나는 새로운 친구도 새로운 꿈도 함께 얻었다.




코로나가 나에게 준 것은

역시, 사람이다



- 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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