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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Aug 03. 2022

MBTI






나 때만 해도, 그러니까 내가 10대를 전후한 2000년대엔 사람을 평 하는 데 있어 혈액형은 꽤 중요한 요소였다.

바야흐로 2000년대 초반, <B형 남자 친구>라는 영화와 <B형 남자>라는 노래가 나올 정도로 B형이 유별나다고 몰아가는 분위기였고, A형은 소심하고 우유부단하면서 자존심만 센 인간으로 그려졌다. A형 여자와 B형 남자의 만남을 그린 영화 <B형 남자 친구>에서 배우 신이가 했던 대사가 아직 기억난다.     


전형적인 B형이시네요. 맞아요. B형은 부정적이죠. 비정상, 비상식, 비양심, 비겁한, 비굴한, 비열한, 비극적, 비도덕적, 비신사적, 비뚤어진, 비인간적이죠. `비`자 들어간 것 치고 뭐 좋은 게 하나라도 있나요? 비아그라도 과다 복용하면 바로 가죠!      


오, 비아그라도 그렇구나.

아무튼 어릴 때라 또렷이 기억해내지 못하지만, 저 대사에 많은 이들이 끄덕였던 분위기였는데 지금 보니 내가 B형이 아닌데도 억울할 지경이다.

모든 B형이 저렇다면 세상이 정말 쓰레기 같지 않을까. 살아가며 지켜본 주변 B형은 죄다 성격이 다르고 성향도 다르다. 혈액형으로 사람을 판단하던 때, 괜히 억울했을 프레임에 큰 칼과 오라를 짊어져야 했던 많은 B형에게 굉장히 많이 미안한 마음이다.

그것뿐이 아니라 혈액형별 궁합이 또 있어서 누굴 만나는 데 있어서 맨 처음에 혈액형을 묻거나, 혹은 그전에 소개받기 전부터 혈액형을 콕 집어 요구하던 사람도 많았다.

나 역시 O형 남자 아니면 A형 남자가 좋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어린 날엔 좋아할 듯 말 듯 한 연예인이 생겨 막 입덕 부정을 할 때도 그이의 혈액형이 무언가에 따라 마음을 정할 만큼 진심이었다.

A형인 신혜성과 O형인 믹키유천을 빼두고선 나의 청소년기를 설명할 수 없다. 사이사이 좋아했던 스쳐 간 많은 아이돌 오빠들이 거의 다 A형, O형이었던 것에는 치졸하다만 다 그런 이유가 있었다.     


더 어릴 때는 음료수를 마실 때 친구가 한 입 달라고 할 때마다 혈액형을 물었다.

난 A형인데 너는 O형이라서 못 주겠다고 하면 그 뭔 도라이 같은 소리냐고 반문하는 게 아니라 아, 하고 수긍하는 유치한 무식함을 지니기도 했었다.

그러다 사람의 성격 유형이 얼마나 다양하고 복잡한데 꼴랑 4가지 유형으로 구분 짓냐는 의견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탄력을 받았다.

그래, 피의 종류로 사람 성격이 나뉘고 불이익을 받는 게 말이야 방귀야.

혈액형으로 사람을 나누다니, 남한 사람 75%가 A형인데. 그러면 다 우물쭈물 소심하고 생각 많아서 느린 것이냐, 짚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과연 그런 사람들인가. 득달같이 성격 급한 사람들이 넘치는데 말이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아주 자연스레 혈액형은 믿을 게 못 되는 거라고 깨달았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사람이 딱 네 가지 유형이기만 했다면 사회생활과 모든 인간관계가 단순할 거였다. 암기하듯 혈액형별 성격만 줄줄이 외워 다니면 어려울 게 없을 텐데 절대 그렇지 않음을 지금의 우린 너무 잘 안다.

내 편협한 데이터로 비춰볼 때 너무나 O형 같은 사람이 사실 AB형이었고 누가 봐도 넘치게 당당하고 자신만만해서 내심 B형이겠다 싶었는데 A형인 사람 같은 경우가 너무 많았다. A형인데 할 말 다 하는 사람도 있고 O형이어도 부끄럼쟁이가 많았다. AB형이 독특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지극히도 상식적이고 보통의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걸 몸소 겪어 깨달은 적도 있다.

예외라고 생각할 일들이 쌓이면서 어느새 혈액형 따위로 사람을 가르는 일을 관두게 됐다.

지나 보니 어이가 없어도 너무 없는 판별법이었다. 편견이 그리도 쉽게 많은 사람 안에 스밀 수가 있다는 게 무섭기까지 할 정도로.      


비록 어릴 때지만 혈액형이라는 개인 정보로 얼마나 많은 사람과의 기회를 놓쳤을지 생각하면 그저 미안하기만 하다.

친해질 수 있던 친구였는데 나와 안 맞을 거란 지레짐작으로 가까워질 기회조차 가져 보지 못한 거, 막상 만나보면 천생연분처럼 잘 맞았을 텐데 혈액형부터 안 맞는다며 거절했을 많은 만남 속 인연도 다 아쉽고 미안하다.     



한참 전, 술자리에서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옆에 앉아 술 한 방울 안 마신 사람이 있었다.

그때 다른 걸 알아볼 생각도 없이 B형 남자라는 정보 하나로 이미 그에게 무형의 껍데기를 씌운 상태였다.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른다며 열심히 밀어냈는데 대체 과거의 나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 귀여운 노력을 고작 혈액형 따위로 불순하게 곡해한 내 안목에 탄식이 절로 흐를 뿐이다.

결국 진짜 괜찮다면서 세종문화회관 앞 신호등에서 술 한 방울 안 마신 그를 두고 혼자 택시를 탔었는데 왜 그랬을까. 그 사람과 천천히 버스를 기다리면서 이번 주말에는 어디 가서 뭐 할 거냐는 이야기 정도는 나눴어도 됐을 텐데.

진짜 나는 그때도 안 될 애였구나, 싶다.          


아무튼, 이렇게 오해와 그릇된 정보로 가득하던 혈액형의 대항해시대가 끝나고 바야흐로 ‘MBTI’의 시대가 왔다.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할 때 분위기를 풀기 위해 꺼내어지는 주제가 될 만큼 이 MBTI는 어느새 또 사람들의 인식에 제대로 스며들어 있다.

나 역시 몇 번이나 검사했고 한 학교에서 돈 들여 검사해준 덕에 내 MBTI를 알아냈다. 혈액형과는 또 다르게 그럴싸하다고 느낀 구간이 있는데, 바로 한 번도 어김없이 같은 유형이 나왔다는 거다.

그래서일까 혈액형이나 이거나 다를 게 없어 뵈는데 어느덧 나 역시 사람들 사이에서 열심히 열 올려 MBTI에 관련한 이야기를 한다.

I와 E를 단숨에 알겠다며 쉽게 또 사람을 평가하고 즉흥적인 사람을 두고서는 ‘너는 누가 봐도 P’라며 단정 짓는다.     


4가지일 때보다 16가지로 늘어났으니 그나마 조금 더 유연하게 확장되어 세밀해진 기분이지만 사실 혈액형과 마찬가지로 사람 기질을 16개로만 나누는 거라 어딘가 편협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그러면서 또 귀는 얇아서 혈액형처럼 한두 나라에서만 난리인 게 아니라 전 세계인들이 몰입하지 않냐며 끄덕대는 모순을 발휘한다.      



나의 유형을 두고서는 나뿐만 아니라 모두 정말 딱 그럴 거 같다면서 끄덕였다. 무언가 하나의 이미지에 입체적인 사람을 입히고 끼워 맞추는데 참 희한하게 억지스럽지 않은 게 MBTI의 그럴싸함 같다.     

여하튼 쥐뿔도 없는데 퍼주기 좋아하고 사람을 좋아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이 꼭 필요한 인간, J 중에 가장 P 같은 유형, 다 좋은 척하지만 사실 그 안에서 호불호의 선이 뚜렷하다는 데는 사실 많이 동감한다.

속 얘기를 타인에게 잘하지 않는 것과 쿨한 척 아닌 척하며 눈치 되게 많이 보는 것 역시 다 내 얘기였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건 정말 너무 잘할 수 있는데 내 얘기를 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려운 건지. 어차피 결정은 내가 할 일이고 책임도 내가 져야 한다는 생각에 혼자 있는 시간이면 다른 사람인가 싶게 부정적인 인간이 되는 것도 끄덕여졌다.

타인과 공유하고 같이 머리 싸맨다고 뭐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것도 아닌데. 그런 걸로 남의 시간 뺏기 싫은 부담을 무슨 수로 어떤 말로 설명하고 설득할까.

그래서 면대면으로 만나 속을 털어놓는 대신 주절주절 늘어놓는 글을 택했으려나. 잠시 그런 생각도 했다.

     

그러다 이 유형의 연애 특징이라는 글을 죽 읽다가 슬며시 뼈가 시린 대목이 있어 한참 생각했다.     


눈이 높은 거 같아도 사실 아니며 신중한 척하지만, 사실은 신중하지 않다.

참아주다가 설명도 안 하고 단번에 내치고 돌아선다. 끝낼 듯 끝내지 않다가 끝이 나면 정말 뒤도 안 돌아보는 의외의 유형.     


정말 누가 내 모든 역사를 몰래 지켜보다 내린 결론이 아닐까 싶었다. 민간인 사찰은 불법인데 대체 누가 내 일기장을 훔쳐봤으며 졸졸 쫓아다니며 기록하기라도 했나.

신중한 척해놓고 사실은 신중하지 않았던 지나간 모든 선택을 속속들이 다 들킨 기분이었다.     

한껏 머리 싸매고 이 고민 저 고민해두고 에라 모르겠다, 하며 다른 선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A와 B를 두고 고민하다가 냅다 C로 정해버리는 바람에 그 전의 고민이 다 멋쩍고 무의미해진 경험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비단 연애 유형이 아니라 삶의 전반적인 선택이 늘 조금씩 그랬다. 신중한 척 실컷 해도 실은 신중하지 않다는 게. 정말 창피한데 매 순간 그랬다.


얼마 전에 정수기를 바꾸는 문제도 그랬다. 물망에 있던 두 회사의 제품과 렌털 기간을 열심히 비교해두고서는 아예 후보에도 없던 회사의 제품을 덜컥 계약했다. 결과야 만족스럽지만 그렇게 쉽고 빠르게 다른 대안을 골라 해치울 거였는데 대체 왜 고민했나 싶다.

정말이지 나란 인간은 왜 그렇게 머리 빠지게 고민하다가 맥 빠지게 다른 선택을 해댈까.     



과연 나의 선택지가 정말 최선일까.

매번 엉뚱한 선택을 한 데에는 그런 기저가 깔려 있었다. 모든 것에 늘 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 고집을 부리느라 남의 얘기에는 귀를 닫고 내 안에서 실컷 헤매다가 삐끗, 혹은 어쩌다 뒷걸음으로 쥐를 잡곤 했다. 하긴, 학교 다닐 때 객관식 찍는 것도 너무 어려웠다. 주야장천 우직하게 한 번호만 미는 것도 아니고 요령껏 이것저것 비과학적인 방법을 동원해 노력하는 편도 아니었다.

늘 스스로에게 불안한 의문을 품었다. 지금도 나의 심약하고 얕은 바닥이 버둥대는 발끝으로 느껴진다.

내가 담긴 곳이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이 있는 성찰로 가득 차 있다면 현명한 선택을 하고 덜 후회하며 살지 않았을까. 그만한 지혜는 얼마나 더 살아야 재채기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와 그릇된 선택을 막아설까.

어차피 매 순간이 후회고 헤어지는 과정이며 선택하지 않은 쪽을 아쉬워하는 인생이라지만 말이다.      


어느 순간이 되면 혈액형이 그랬듯이 이 MBTI도 시들해지리라 믿는다. 봐, 진짜 어떻게 사람을 16개로 구분 지었을까? 진짜 웃기지 않냐? 하며 또다시 타인을 알고 이해하기 위한 새로운 구별법이 유행처럼 번질 거다. 그러면 또 그 시류에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수영장 파도 풀을 따라 흘러가듯 별수 없이 휩쓸릴 거다.

 유행 속에 한껏 몰입해 나는 이렇고 너는 그렇구나. 서로를 알기 위해, 서로를 섣불리 쉽고 빠르게 단정 짓기 위해 그 새로운 무언가에 한껏 열광할 것이다.

    

모쪼록 혈액형이 다르면 물도 한 입 안 주던 어린 내가 이제는 좀 덜 그러하듯, 그렇지만 여전히 사람 보는 눈이 진득하니 깊지 못해 실수를 반복하는 내가 훗날의 언젠가는 좀 더 너그럽길 빈다.

또 다른 유행이 광풍처럼 몰아치고 너는 이렇고 너는 저래야 한다고 우겨대도 조금 초연히 그 막 뒤에 있는 사람의 진짜 알맹이를 지혜롭게 잘 들여다보는 안목을 가질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물론 그전에 실컷 똑똑한 척, 쿨한 척, 신중한 척해두고 혼자 끙끙대는 이 조금 모자란 소심함부터 돌봐야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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