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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Aug 14. 2022

7년 동안의 잠






작년 여름 가로수를 가로지르며 걷던 때, 아이가 갑자기 귀를 틀어막았다. 

고개를 들어 하늘 한번 보기도 어질할 정도로 태양이 내리쬐고 있었고 바람은 내내 에어컨 실외기가 코앞에 있는 듯 후텁지근한 날이었다. 

그야말로 한여름이어서 주변 나뭇잎이 얼마나 짙게 우거졌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마어마한 초록에 압도되어 둘러볼 틈도 없이 온도와 습도에 숨이 턱턱 막혀왔다. 그러던 와중에 별안간 아이는 걸음을 멈추고 귀를 막고 두리번대던 거였다. 

얘가 또 왜 이러나, 더위 앞에 조금 예민해진 나는 아주 조금 욱, 하려다 말았다.     


“얼른 가자. 덥다. 너 땀 봐.”     


“엄마 나도 얼른 가고 싶은데 매미가 너무 시끄러워.”     


어서 에어컨이 있을 어디로든 가자며 걸음을 재촉하기 바쁜데 당최 그게 무슨 소리람. 매미가 울면 얼마나 운다고 걸음을 방해할 정도씩이나 되니. 엄마도 어서 들어보라며 눈을 맞추는 아이는 몹시 진지했고 엉뚱했다. 

여름에 매미가 우는 게 당연하지 그게 뭐라고. 그까짓 매미 소리가 뭔데. 걷던 걸음을 멈춰 귀를 틀어막고 여기저기 두리번댈 정도로 매미가 시끄러웠나 싶었다.

그러다 당장 공감해주지 않는 엄마에게 한껏 짜증이 나버린 아이의 찡그린 콧등에 평생 못 듣다가 듣기 시작한 사람처럼 귀가 열렸다.     

정말 아이 말대로 매미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울어대고 있었다. 카페에서 스무디를 만드느라 믹서를 돌릴 때 정도의 소음쯤 될까. 단체 손님의 주문이 들어와 제각각 종류가 다른 스무디를 시켜서 한 네 잔쯤 동시에 돌리는 때의 거한 소음과 맞먹었다. 

위이위잉 불규칙적으로 울려대는 소음 속에 안 그래도 아이는 평소보다 목소리 톤을 조금 높이고 크게 말하고 있었다.     


“아유 진짜 왜 저렇게 울어대는 거야? 쟤넨 덥지도 않나!”     


제법 일상에 찌든 어른의 한탄 같은 투덜거림이 귀여워 금세 짜증을 잊고 같이 두리번거리게 됐다. 정말이지 이 뜨거운 날 빽빽이 심어진 높다란 나무의 어디에 그렇게들 모여서 울어댈까.

짙은 고동색 나무껍질 어딘가에 발을 착 붙이고 나 여기 있다고 목 놓아 울어댈 매미를 찾아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분명 한 두 마리의 데시벨이 아닌데, 잡아끌고 가기 바빴던 걸음의 속도를 늦추고 따라서 목을 길게 뺐다.

그런다고 소음을 유발하는 트러블메이커 매미를 찾을 순 없었다. 하지만 아이와 매미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울어도 왜 하필 저런 소리일까. 비 오는 날에는 왜 안 울까. 아침부터 울긴 하는데 밤에는 잘 안 울지 않냐 등등. 아무 말 대잔치지만 이렇게 흘러가는 별 의미 없는 대화를 아이는 꽤 오래 기억하곤 했다. 자기 전이면 수다쟁이가 되어서 ‘엄마 오늘 매미가 너무 시끄러워서 왜 우나 얘기했지? 내 생각엔...’ 식으로 곱씹을 때면 해 준 것도 없이 슬며시 뿌듯해지곤 한다.     



매미에 관련한 이야기를 재밌게 해 줄 만한 게 없을까. 그러다 만난 책이 故 박완서 작가가 쓰고 김세현 작가가 그린 <7년 동안의 잠>이라는 동화책이었다.     

매미는 7년씩이나 애벌레의 상태로 땅 아래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흉년에 지친 개미들이 크고 실한 매미 애벌레를 발견하고 몰려든다. 그만한 크기의 매미면 굴속 온 개미가 배부르게 나눠 먹고도 남을 식량이었으니 내내 쫄쫄 굶었던 개미들의 분위기가 과열되는 건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서 지혜 많은 늙은 개미가 곧 땅 위로 날아 올라가 매미가 될 터이니 안 된다고 반대하면서 갈등이 벌어진다. 

설득당한 결국 개미들은 매미를 잡아먹는 걸 포기하고 외려 돕기로 한다. 그러면서 깨달아지는 것들을 책은 이야기한다. 

내내 어떤 성취와 풍요를 취해야 한다는 강요는 결코 없다. 하지만 개미들은 7년씩이나 잠들어 있던 매미가 박차고 날아오르는 것을 보면서 배부름 그 이상의 것을 느끼지 않았겠냐고 넌지시 전할 뿐이다.  

 

아이는 이 책을 7살이었던 그때 꽤 오래 자주 열어봤다. 한 책에 꽂히면 몇 년이고 두고두고 꺼내 보는 편이었는데 그 무렵 꽂힌 게 <7년 동안의 잠>인 모양이었다.

다른 이야기인데 책을 읽는 건 참 좋은데 정말 질문을 많이 쏟아낸다. 심지어 어제도, 엊그제도 한 질문을 또 한다. 똑같은 질문과 수다를 며칠 내내 들으면 미안하다만 어딘가 조금 성가셔져서 건성이 된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고. 분명 대답을 들었을 건데도 자꾸 묻는 데에 혹시 새로운 대답을 기대하나 싶어 머리를 굴려야 하는데 머리가 굳어서인지 신선한 대답이 떠오르질 않는다.      


질문은 대개 ‘왜 매미는 7년이나 자야 해?’와 ‘개미는 그래서 매미를 못 먹어서 죽었어?’였다.

비효율적인 매미의 생태가 이해되지 않으면서 동시에 순순히 잡아먹지 않은 개미들은 또 걱정되고 그랬을까. 

‘매미는 그냥 그런 애야. 7년 내내 잠만 자고 버티다가 나와서 7일 살다가 죽어. 그냥 그러기로 합의됐나 보지 뭐. 엄마가 매미를 만든 사람이 아니라서 완벽히 알 수는 없어.’ ‘개미는 매미 아니어도 먹을 게 많을 거야. 너도 길 가다가 아이스크림 떨어뜨리고 마이쮸 껍질 까자마자 떨구잖아. 그런 것만 발견해도 개미는 땡잡은 거야. 열심히 집에 옮겨가서 그거 먹고살 거야.’     


매미가 7일만 살고 죽는다는 소리에 아이 눈이 동그래졌다. 슬슬 7일이 일주일이라는 개념을 알아갈 때라서 더욱 놀란 듯했다. 아니 세상에 월요일에 나와 일요일에 죽는다니. 그렇게밖에 못 사는 게 어딨냐며 기막혀했다.

그 이야기를 나눈 뒤부터는 지나다 거리에 매미가 배를 뒤집고 누워 죽어있는 모습, 모든 힘을 소진해 느릿느릿 땅바닥에 붙어 겨우 기어가는 걸 보면 안쓰러운 얼굴로 몸을 숙이곤 했다. 


    


“엄마 매미가 일주일을 다 썼나 봐.”     


얼마 전 어떤 날은 배를 뒤집고 죽어 말라가는 매미를 발견하고는 쪼그려 앉았다. 무슨 생각이 있는지 어디서 짤막한 나뭇가지를 주워 와 땅을 팠다. 

그러고선 마음은 앞서도 자기 손으로 잡긴 무서웠는지 내 손으로 죽은 매미를 잡아 묻어주라고 시켰다. 순순히 시키신 대로 매미를 오목한 땅에 눕히자 아이는 맨손을 포클레인처럼 그 위를 흙으로 덮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뙤약볕 아래서 그러고 있었다. 그만하고 얼른 좀 가자, 라는 말이 목젖에서 울리는 데 잠자코 둔 적이 뒀었다. 잠들기 전 사소하고 흐뭇한 오늘의 수다로 뿌듯하고 싶어 꾹 참았다.

아이는 매미를 묻어준 데다가 속닥댔다.     


“7년 뒤에 봐.”     


삐질삐질 서툰 손길로 참으로 열심히 매미를 묻어두고 꼭꼭 덮기까지 하며 돌아오는 길, 둘 다 손톱에 습한 흙을 끼고 있었다. 

순간 별안간 대체 왜 매미한테 또 매미로 태어나라고 빌어줬는지 궁금했다. 분명 7일만 살고 또 죽을 매미인데. 7년씩이나 아무것도 못 하고 잠만 자면서 겨우겨우 날개 하나, 눈 하나씩 만드는 지루한 삶인데 매미한테 그걸 또 하라니. 

매미가 다른 걸로 태어나고 싶지 않겠냐고 물었더니 아이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매미가 일주일 살면서 행복했는지 슬펐는지 엄마가 어떻게 알아?”     


그 현답에 음 그래. 어어. 그렇구나.라고 끄덕이는 걸로 허무하게 대화를 얼버무려 마쳤다. 너무나도 일리 있었다. 매미가 사는 동안 어쨌는지 그동안 관심도 안 줬던 내가 함부로 그 7일간의 생을 단정 지을 게 아니었다. 아이의 상상과 사고를 침범하지 않겠다고 늘 다짐했으면서 조심성 없이 불쑥불쑥 어른의 잣대를 들이댔다.

과연 아이 말대로 매미가 우느라 피곤했는지, 좋은 짝을 만나 바빴을지 어땠을지 내가 다 알 수 없었다. 

7년 동안 잠만 자느라 지루했는데 7일 동안 시원하게 울고 나니 미련 없다며, 인간은 오르지도 못할 높은 나무에서 다이빙으로 땅에 곤두박질쳤을지도 모를 매미를 상상했다.

그런 화끈한 7일의 매미에 비하면 여기저기 질질 끌려 겨우 사는 내 삶을 감히 우위라 할 수 있겠나.

만일 매미가 그렇다면 오히려 부럽기까지 한 부분이다. 하지만 이것도 다 나중에 혼자 한 생각일 뿐, 당시엔 생명의 가치를 멋대로 재단하는 오만함을 아이에게 은근슬쩍 퍼트린 게 아닐까 싶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분명 매미라는 곤충의 삶보다 더 나은 존재, 먹이사슬의 맨 꼭대기에 있을 딱 인간 같은 삶과 생활이 좋을 거라고, 7년을 우직하게 버텨낸 매미의 삶을 쉽게 깔봤던 나는 꼬질꼬질 정성스러웠던 아이의 손길과 매미를 묻어준 장소를 그날 이후로 자주 떠올린다. 

한낱 곤충의 시체기만 했던 것을 조심조심 묻어주던 아이의 굵은 땀방울도 자주 떠오른다.      



껍질을 벗기 전 다 보이지 않는 매미의 세계는 누구보다 바쁘며 매일 새로움이 탄생하고 끊임없이 분열하다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 완성될 터였다. 나와 아이의 단출한 삶 역시 웅크려 있는 정체의 상태가 아니라 우리만 아는 작은 이야기를 차곡차곡 쌓아가는 때려니, 그리 여기 여겨보자. 죽어버린 매미와 박완서의 책에서, 매미의 울음을 찾아 목을 길게 뺀 아이에게서 공교롭게 그런 걸 배웠다. 그러니 왠지 쉽지 않은 여정을 택한 멋진 존재가 된 기분이었다.

누구에겐 어찌 보일지 모른다. 하나 때로 궁핍하고 옹색해도 그 안에서 행복하면 누구도 우리 삶을 쉽게 재단할 수 없으리라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한 단락 마치니 대체 어디서 기인했는지 모를 자신감이 슬며시 얼렁뚱땅 채워졌다.     


결국 이렇게 또 한 번 아이에게 위로를 받았고 자신감을 채웠다. 행복한지 아닌지는 우리만 안다. 우리만 알면 된다.      


끝내 그거면 되겠단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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