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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Aug 19. 2022

Money 01






이혼하면서 가장 빡쳤던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려 한다. 굳이 화, 억울함, 서러움, 분노 등으로 표현하지 않은 건 정말 단어가 주는 천박하고 직설적인 뉘앙스 그대로 ‘빡’쳤기 때문이다.      


전남편은 내 소송장을 진즉 받아 들고서 변호사를 선임하고 나름의 항소를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 아는데 웬일인지 항소장을 보내지 않고 미적댔다. 

경제권을 쥐고 있었던 전 남편은 나눠줄 돈이 없다고 주장했다. 감정에 북받칠 때는 집 보증금과 매달 50만 원을 주겠다고 해놓고서 이성을 챙겼을 땐 믿기지 않겠지만 ‘엄마가 너 돈 나눠주지 말래.’라고 했었다.

어쨌거나 그래 놓고서 선임한 변호사는 여기저기 매체에 얼굴을 비추는 이혼 전문 변호사였다. 당연히 로펌도 아주 빵빵한 곳이었다. (아 물론 나도 소송에 돈을 아끼지 않았다.)

대체 저의가 뭘까. 한때 서로를 너무 사랑해 모든 걸 알고 싶어 동동대던 사람을 향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슬프기도 할 법한데 그럴 틈도 없었다. 모든 분노와 얼떨떨함이 휘모리장단으로 휘몰아쳐가며 조정 날이 다가왔다.     


전 남편 쪽의 작전이었겠지만, 참 황당하게도 항소장을 조정 당일, 법원의 지하 주차장에서 받았다. 마치 KBS1TV에서 방영할 일일드라마의 피가 거꾸로 솟는 신과도 같았다. 정말 딱 로펌의 담당자가 주차를 마치고 기어를 바꾸는 순간 전화를 줬다. 

당황스럽게도 내내 구경하기 힘들던 항소장을 지금 받았고, 그래서 메일로 급히 보내니 확인하고 조정실로 이동하라는 목소리는 늘 침착하던 때와는 조금 달랐다.     


“진짜 너무 어이가 없네요. 내용이 별 건 없지만 차분하게 한번 읽고 올라가서 마무리 잘하세요.”     


차분하게 마무리를 잘할 수가 있을까. 일부러 항소장을 보내지 않으며 준비할 시간도 안 주는 건 많이 치사한 처사였다. 일부러 엿 먹어보란 식으로 조정 날, 조정 시간을 한 시간도 남기지 않고 보낸 항소장에 침착함을 유지하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그 탓에 위장이 떨리는 기분으로 주르륵 읽어 내려간 항소장에는 명명백백한 증거 제출에 억울하다는 소리뿐이었다. 악마의 편집처럼 상대가 의도적으로 그 부분의 대화나 파열음만 녹음해 제출했다, 나는 억울하다. 그리고 줄 돈은 없으며 혼인 파탄, 경제 파탄에 저쪽도 분명히 잘못이 있다.

그러면 그 잘못에 대해 나열하면 되는데 또 그런 내용은 없었다. 그야말로 알맹이 없는 항소장이었다. 지금에야 이렇게 말하지만 읽어 내려가면서 혹시 내가 다 알지 못하는 결정적인 한 방이 까꿍, 하고 튀어나올까 봐 입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나올 듯이 뛰어댔음이 아까울 정도였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내가 힘들게 버텨내고 이 악물고 참아낸 시간을 죄다 부정하며 본인은 그런 적이 없다는 데서 1차적으로 혈압이 올랐다. 그리 나올 거라고 알고는 있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아닌 걸로 생각한다는 게, 배웠다는 변호사라는 사람들이 그 말도 안 되는 주장을 또 편들어 주장해준다는 게 어이없었다.                



그렇게 이미 한바탕 진이 빠지는 기분으로 조정실에 출석하던 때, 정말 그날은 마주한 순간부터 막연하게 쌍욕이 입안에 맴도는 기분이었다. <발로 차주고 싶은 등짝>이라는 일본 소설이 있는데 내용을 떠나, 내용과 아주 다르게 제목만이 공감되는 순간이었다. 막연하게 정말 그런 등짝이라고 생각했다. 

한때는 사랑해 마지않던 넓은 등이 어쩜 그렇게, 비수를 꽂는 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으리만치 보였는지. 사람의 감정에 따라 모든 건 그렇게 다 달라지기 마련이었다. 이전의 사랑과 삶과 생활은 다 아무짝에도 의미가 없는 거짓 농담 같았다.

좁은 복도에 차례를 기다리는 수많은 이혼 예정 부부들이 다 나 같은 심정일까. 토요일 아침 9시에 그토록 붐비는 법원에서 차마 발로 차고 싶고 냅다 후려치고 싶은 욕지기 어린 마음이 치밀던 경험은 꽤나 색다르고 다시 겪고 싶지 않은 감정이다.     


조정까지 오기 전, 협의 이혼을 하자며 먼저 법원에서 기다릴 때였다. 그 아침에 술에 잔뜩 취해 걷지도 못하는 전 남편은 늦게 나타나 휘청대며 서류에 사인하고 설명을 들었다. 옆에서 느낀 숙취에 쩐 옅은 담배 냄새는 다소 역한 정도였지 빡칠 정도는 아니었다. 

당장 그 아침 몇 시간 전에 집에 경찰이 왔다 갔었다. 몇 번 그랬듯이 술 취해 들어와서 욕하고 위협하기에 신고했고 아침밥을 먹던 아이가 생생히 아빠의 폭주를 지켜본 뒤여서 더 놀라고 화날 힘도 없었을지 모른다. 얼떨떨한 얼굴로 노란 어린이집 가방을 등에 메고 유모차에 오르던 아이에게 어찌나 미안했는지. 지금이 아니라면 나중의 초등학생, 사춘기의 아이가 이 모습을 보고 뭘 느낄까 싶어 섬찟했다.

그래, 이런 사람이니까 지금 결심 아주 옳은 거야. 하며 내 결정에 정당성이 부여되어 나름 참을 만했다. 더한 것도 참고 살았는데 그 하루 십 분쯤이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이혼을 하네, 마네, 얼마를 주네, 마네, 하던 날은 정말이지 쉽지 않았다. 끝을 보는 건 언제나 어떤 식으로라도 사람을 힘들게 하는 모양이다.     


양육비라는 게 있다. 미성년 자녀가 있다면 성장할 때까지 양육하지 않는 비양육자가 매달 얼마간 지급해야 하는 돈이다. 당사자들의 마음과 기분이야 어쨌든 간에, 말 그대로 낳음을 당한 아이의 성장을 모른 척하지 않아야 하기에 도의적으로, 사람이라면 줘야 할 돈이기도 하다. 

당연히 내 입장을 떼어 놓고 본다 해도 양육비란 것은 ‘최소한의 책임’이다. 사실 최소의 최소도 안 되지만 뭐든 해야 하니 마지못한 생색 같은.     


나는 매달 25일 아이의 아빠에게 50만 원을 받기로 했다. 

협의가 되지 않아 소송에 항소로 끌고 갔던 결정의 날, 법원에서 판결받은 금액이 딱 저만큼이었다.

5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하도 까먹고 산 게 많아 재산분할은 별 의미가 없었다. 딱 변호사 수임료만큼 받고 털었다. 소송을 준비하며 이것저것 썼던 비용들이야 수업료라 퉁치면 된다고 생각했다. 정말 벗어나고 싶었는데 돈 백만 원을 더 받겠다고 질질 끌고 내놓으라고 조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변호사도 다음 조정을 잡고 기다리며 고통받느니, 더 받을 것도 줄 것도 없으니 여기서 조정을 마치는 편이 좋겠다 했다. 다음 조정을 기다리며 속 끓이고 스트레스받느니 너무나도 맞는 말이었다. 그리고 정말 빨리 이 지긋지긋한 과정을 떨쳐내고 싶었다. 거기까진 괜찮았다.     



전 남편은 정말 낯선 얼굴로 아이가 보고 싶다며 엉엉 울었다. 그러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얼굴을 바꿨다. 아니 늘 그러던 대로 소리도 질렀다. 미친 거 아니냐, 배 째라는 말을 워딩 그대로 모두 앞에서 내질렀다. 그 엄마가 주지 말래서 못 주는 돈이 꽤 아까웠을까. 이제 아이를 데리고 살아야 하는 내가 길바닥에 나앉든, 어디 가서 빌어먹든 자기와 무슨 상관이냐던 사람다운 언행이었다. 그 돈 나눠 받는다고 당장 원룸 보증금도 안 되는데 그랬나 보다.

하긴. 나는 애 못 키우니까 너도 못 키우겠으면 보육원 보내자고 했던 사람인데. 그런 사람이라 전 아내에게 만 원 한 장 아깝고 고까울 거였다. 이해는 하다만 내가 이해해 줄 일은 아니었다.   

  

2015년 양육비 산정 기준표에서는 최소로 정해진 금액이 50만 원이었다. (그래서 혹시 물가상승과 비례해 조금 오르기라도 했나, 싶어서 찾아보니 2022년 현재 기준 만 0세에서 만 2세까지 정해진 금액은 52만 3천 원이다. 만 3세에서 만 5세가 54만 6천 원.) 

이럴 거면 돈이라도 잘 벌면 좋았겠지만 애석하게 그러지 못한 사람이라 소득에 비례해 정해진 양육비는 고작 50만 원이었다. 그 돈도 너무 많다며 항의했을 땐 정말 마음속 어딘가에 심어진 셀러리 같은 게 우지끈, 부러지는 느낌이었다. 미움과 원망, 두려움을 양분 삼아 마음속에서 자라난 셀러리, 마요네즈에 찍어 먹히지도 못하고 그대로 마음속에서 부러진 셀러리는 나란 사람이 지닌 인내의 한도였다.     


그 순간 남은 모든 여지가 휘발되어 사라졌다. 

어쨌든 아이를 두고 있으니 친구처럼은 아니어도 아이의 성장을 공유하거나 일상적인 안부를 물을 사이, 그러니까 영화에서나 있을 법한 판타지 이혼 남녀로, 아이에게 불안을 주지 않고 살 수도 있지 않을까. 마음 한구석에서 꿈꾸고 희망했던 나를 버렸다. 

누가 누구한테 뭘 바라나.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 지경이 된 마당에 머릿속이 이토록 순진하다는 데에 스스로 완전히 질려버렸다.     



그러면서 애가 보고 싶다고 울고, 내 자식 내 아들이라고. 우리 집안 아들이라고. 그렇긴 한데 50만 원은 너무 많다는 앞뒤 안 맞는 소리를 그리도 당당히 할 일인가.


나도 쓰면서 믿기지 않는데, 더 한 억지는 또 있었다. 

사실 본인이 키울 엄두가 안 나서였겠지만 지금은 엄마의 손길이 필요할 때니 엄마와 살다가 아이가 자라 중학생 정도 되면 본인이 데리고 가서 살겠다는 이상한 주장도 했었다. 그렇게 애틋해 쩔쩔맬 자식이라면 지금이라도 데려가 키우시라고 하니 지금은 안 된 댔다. 훤히 보이는 속에 환멸이 났다.

힘든 건 하기 싫은데 아들은 갖고 싶은 그 수상하게 뒤틀린 마음 심보에 과연 아이에 대한 존중과 사랑이 있나. 저 사람들은 과연 아이가 딸이었어도 저딴 주장을 펼쳤을까. 생각하니 끊어내기 너무 잘했다는 생각에 오히려 마음이 편해져 갔다.     


변호사와 협의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이었는지 상대 변호사는 한껏 당황하는 얼굴로 전남편을 말렸고 내내 건조하던 조정위원조차 그건 안 된다고 다소 허무한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가 그 정도 커서 아빠에게 가겠다면 그럴 수 있는 거지만, 이렇게 부모들 마음대로 이리저리 휘두를 게 아니라는 지극히 당연한 소리에 내 아들인데 왜 그렇게 못하냐고 소리 질러댔다. 뭐랄까 그 모습은. 어딘가 애처롭고 모자라 딱하기까지 했다. 

집안에서 어깨 펼 일이 아들을 낳아 기른다는 거 하나였던 사람이었나. 싶을 정도로 집착하는 듯한 모습은 조금 소름 끼치기까지 했다.          


그렇게 귀하고 아끼고 중간에 데려가고 싶을 만한 아이면 한 달에 50만 원이 가당키나 한가. 의아함이 소용돌이치고 머리가 아팠다. 하지만 더 붙들고 이야기해봤자 늘 그랬듯 대화가 아니라 억지 주장을 꾸역꾸역 들어주고 설득해야 하는 과정의 되풀이될 게 빤했다. 하긴 여태 내 돈으로 아이를 입히고 먹여 키웠으면서 남들에게 애 키우는 게 왜 돈 드는지 모르겠다던 사람이라, 갑자기 50만 원이 너무 큰돈이 될 수도 있겠고, 아이한테 50만 원밖에 못 할 아빠라서 딱하다. 그리 생각해주기로 하니 이후의 논쟁이 무슨 의미일까 싶었다.

그렇게 정리하니 이상하게 순간 머리가 맑아지기도 했다.     


생각해보면 같이 사는 동안 달마다 50만 원도 못 받았다. 

아, 그래서 그렇게 공짜로 부려 먹던 아내도 사라지고, 내세울 아이도 곁을 떠나는 마당에 돈까지 줘야 하니 저렇게 억울하고 분해 길길이 날뛰는 거구나.     

그래서 바로 옆에 앉은 변호사에게 이제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재산분할 비율을 조정해서 백만 원 더 받고 말고 자시고 할 거 없이 이쯤 해서 이 내용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고작 50만 원으로 추하게 물고 늘어지기가 피로했다. 50만 원 벌기가 쉬운 세상이 아님을 당연히 안다. 하지만 아빠로서 그 정도 의무도 지기 싫으면서 동시에 아이를 트로피처럼 지니고 싶어 하는 사람과 그만 엮이고 싶었다. 

계속 소모적은 언쟁을 주고받으며 나를 마주하고 있으면 본인의 얼마나 책임감 없는 언사를 내뱉는지 도무지 깨닫지 못한 채 흥분만 할 듯해 입을 다물었다.

앞, 옆, 뒤의 모든 조정실에서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핏대 세우고 울고불고할 거란 상상을 하니 1분 1초라도 벗어나고 싶었다.     


“그거 얼마나 한다고 꼭 그렇게 받아야겠냐?”     


일어서는 내게 했던 말이 저랬다. 그래서 되받아치지 않고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먼저 문을 열고 조정실을 벗어난 건, 내가 했던 행동 중 가장 잘한 베스트 5 안에 들어갈 멋진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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