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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Aug 23. 2022

Money 02






양육비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개 두 가지로 나뉜다.

‘세상에 그거 가지고 애를 어떻게 키워? 장난해?’ 혹은 ‘그래도 매달 주긴 줘? 요즘 안 주는 사람도 많아서 배드 파더인가 파파인가 그런 거도 있던데.’이렇게 두 부류로 말이다.     


각자의 느낀 점을 말하는 건 아무거나 상관이 없는데 후자의 질문을 던진 사람들 거의 대다수가 그 이후의 말로 ‘그래도 주는 게 어디야. 넌 낫다.’라며 속 뒤집히는 소리를 기어코 얹는다.

주는 게 어디냐니. 안 주면 그게 사람인가. 속단하는 그 한 마디에 절로 슬며시 마음이 닫히고 머릿속으로 열심히 다른 주제를 찾는다. 그래도 계속 너는 그래도 낫다, 얘 그래도 그게 어디니, 식으로 말을 늘이며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 간혹 있다. 그러면 뭐라 할 거 없이 다음에 안 보거나 그 주제로 얘기 안 하면될 일이다.

그런 거로 뭐 안 볼 생각까지 하냐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저 내가 속이 좁아서 그럴 수도 있다. 저러는 거 자격지심이다.라고 단정지어도 좋다. 거기에 이런저런 변명을 하며 설득하고 싶지 않다. 경험상 그런 말을 하는 사람과는 더 아이 이야기나 육아, 교육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게 신상에 이롭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주면 됐지, 라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과 한 달 50만 원의 그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대체 무슨 수로 이야기할까.     


‘그래도 전 남편이 달마다 50만 원씩 준다는데 쟨 뭐가 저렇게 엄살이고 유난이고 지랄일까.’

하며 흘겨보는 마음이 그 말을 뱉은 사람의 깊은 곳 어딘가에 동동 떠다닐 것만 같다. 세상에 힘든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저걸로도 만족 못 하고 저러고 사냐고. 어딘가 빗겨나간 속마음을 감추고 나를 마주할까 봐 솔직히 두렵다.

마음이 삐뚤어진 하자 있는 인간으로 보는 시선에 이미 잔뜩 상처받은 뒤다. 그래서 미안하지만 웅크릴 수밖에 없고 방어적인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 살면서 저마다 본인을 지키려 방어기제가 있지 않은가. 그나마 내가 그어둔 선은 그나마 꽤 유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뭐라고. 당연히 나 역시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포용할 이유가 없다. 한강뷰 아파트로 성수동이 좋을지 청담동이 좋을지 같은 건 선택도 못 하는 삶인데 그 정도 선택도 못 할 건 아니지 않은가.     



어쨌든 이쯤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양육비를 안 밀리고 지급하는 데에 감지덕지하며 감사해야 할 게 절대 아니란 거다.

앞서 말했듯 최소의 최소이다. 양심이란 게 있고 일말의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면 최소한은 해야 한다. 성인이 될 때까지 아이 얼굴 그나마 떳떳하게 보기 위해서 그 정도도 안 하면 그게 어디. 낯짝이 아무리 두꺼워도 그건 아니지 않은가. 아이를 키우며 부딪치는 수많은 갈등과 고난에선 멀찍이 떨어져서 자라는 모습만 지켜보겠다는 건 남도 하는 일이다. 슬쩍 밀어둔 부성애나 모성애를 잠시 만족시키면 할 몫을 다 하는 건가? 그 무슨 손 안 대고 코 풀겠단 도둑놈 심보냐 이 말이다.     


법원에서는 양육비의 지급 여부를 떠나 면접 교섭을 침해받으면 안 된다고 한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웃기고들 있다고 한껏 열받았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양육비 안 주는 놈들치고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아이가 보고 싶다고 찾아오는 인간은 많이 없더라.

간혹 양육비도 안 주면서 아이 보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다는데, 일단 나는 사람의 이야기만 하고 싶다.

그러면 양육비를 줘야 사람이고 부모냐고 할 수 있겠지만, 어디 그런 것도 안 하는 게 사람이고 부모라고 되받아칠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경제활동을 전혀 할 수 없는 장애나 질병의 경우를 제외하고.


양육비를 지급 못 해서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다면 뭐든 해서 줄 일이다. 가슴만 아프고 아무 지원도 하지 않는 부모라면 사람이라 쳐주지 않는 게 맞다. 모쪼록 이 글을 읽으며 발끈하거나 제 발이 저리다면 곰곰이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결코 돈의 문제로만 볼 수 없다. 나 몰라라 하고 싶은 비겁함을 경제적 어려움 어쩌고로 포장해서 그럴싸하게 아이와 양육자에게 책임 전가를 하지 말길 진심으로 바란다.

떳떳함과 양심이란 게 존재한다면 그러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떳떳’이라는 단어에서 내내 뭐가 걸린다.

한 달에 50만 원 줘놓고 떳떳하게 나는 그래도 널 위해 최선을 다했다, 고 하는 그 사람의 아주 먼 훗날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더더욱. 그러고도 떳떳할 수 있겠구나. 하니 어딘가 슬며시 약이 오르기까지 한다.

별안간 발 동동 구르며 이번 달은 잘 지나가려나, 이러다 진짜 파산하겠네 하는 내 초라함이 겹쳐지며 조금 비참해지기까지 한다. 냅다 이혼해버렸으니 이 정도의 억울함은 어쩔 수 없는 걸까. 내가 선택한 결과고 내가 받아들이기로 한 삶의 일부이니 꿀꺽 삼키고 아무렇지 않아야 맞는 걸 당연히 안다. 하지만 양육비의 문제는 삼키기 쉬운 한입 크기로 잘게 나눠질 말랑한 주제가 아니다.

이혼과 아무 상관없을 당신이면 그래도 와닿지 않을 거다. 어쨌든 간에 그래도, 나는 전남편에게 한 달에 50만 원이라도 받는 그나마 나은 경우의 이혼녀이니 말이다.     


그 50만 원이 공돈의 느낌이면 오죽 좋으련만, 애석하게 가벼운 그 50만 원은 입금되자마자 순식간이다. 어디로 사르르 녹아 날아간다. 전세 대출이자에 각종 관리비, 통신비로 이미 100만 원이 넘어간다. 거기에 매달 태권도 학원비 18만 원과 반 친구들과 다 함께 하는 축구 수업이 8만 원. 생각보다 한글을 깨치는데 더딘 아이에게 다른 걸 더 시키고 싶어도 시킬 수가 없게 돈은 잘만 쓰인다.

하는 거라고는 학교 방과 후 수업 4개와 운동을 위한 저 2개의 체육 사교육이 다인데 그마저도 벌써 50만 원이 웃돈다. 그러고 드는 식비와 생활비.

정말 내 옷 한 장 안 사고 보내도 한 달에 280만 원에서 300만 원이 우습게 쓰인다. 현실의 생활이 이런데 50만 원으로 생색을 낼 턱이 있나, 싶다.      


여기서 내 개인적으로 기분이 묘하게 뒤틀리는,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굉장히 불쾌하고 어이없어지는 부분이 있다.

앞서 말했듯, 전 남편은 현재 함께 사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자녀들도 있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그 아이들이 ‘아빠!’라고 부르는 걸 듣게 됐다. 그러는 아이들과 내 아이가 한데 섞여 주말 1박 2일을 보내는데, 그 환장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형제가 아닌데 같은 사람을 아빠로 부르는 아이들이 있다는 걸 대체 어찌 설명했을는지 모르겠다.

여하튼 전 남편은 그 집에서 아빠 소리를 듣는 만큼 뭘 어찌하든 아빠 노릇을 할 거였다. 낳아 길렀던 아이에게는 50만 원어치의 아빠 노릇을 하면서 그 아이들에게는 얼마의 아빠 노릇을 할까. 그런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저만 아는 속물이란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런 걸 생각 안 할 수가 없다. 이치와 도리를 따지기도 전에 못마땅해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이리저리 저마다의 이해관계와 계산이 다르기에 이혼 후 오고 가는 돈은 참 더럽고 어렵다. 더 깊이 까놓고 말하자면 양육비 관련한 모든 문제는 언제나 치사하고 구차하다.

제 자식한테는 꼴랑 50만 원 주면서 뭐 하자는 거야? 의 마인드인 걸 인정한다. 시원하고 당차게 그 돈 안 받아도 된다고 큰소리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내 자존심 앞세워 그따위로 굴었다가 결국 피 보는 건 나란 걸 잘 안다.

그러는 전 남편도 아이를 보기 위한 영수증 같은 빌미로 양육비를 보낼 터였다. 솔직히 아까울 거라고 짐작도 해본다. 이 집 저 집에 돈을 보내야 할 그 역시 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이냐며 허탈할 수도 있다.


원해서 이혼은 했다만 대체 이게 다 뭐하는 짓일까. 별안간 바람이 찼다가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고 처진다.

받기 싫다고 안 받으면 어쩔 건가. 주기 싫다고 안 주면 또 어쩔 거고 말이다. 돈 문제로 이혼하는 사람이 나를 포함해 많다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내 일로 닥치니 참 거추장스럽고 복잡하다. 너무 많은 걸 알고 나니 지끈거린다.      


이혼한 사람들끼리 또 돈 때문에 싸우고 엇나가는 걸 지켜보는 자식들은 무슨 죄인가. 양육비 인상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몇 번이나 찾았다가 마음을 접길 몇 번이다. 전 남편과 돈이라면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고 끔찍하다.     


아무래도 누구 하나가 죽거나 아이가 완전히 다 자라 양육비 지급이 끝나야 완결될 문제겠다.

그렇지만 혹시 글을 읽는 누구든 만에 하나 양육비를 못 받고 있거나 연락이 닿지 않는다면 꼭 법의 도움을 받길 진심으로 권한다. 양육자는 ‘그 돈 안 받는다고 뭐 어때.’ ‘빚쟁이처럼 그러기 자존심 상해.’ 등으로 어물쩍거릴 권리가 없다.

얼마가 됐든 양육비는 어디까지나 아이의 권리이다. 어디서 어떻게 찾아 받냐고 마냥 손 놓고 있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 키우고 가르치면서 꼭 챙겨줘야 할 권리고 의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는 일단 내일모레 양육비가 들어오는 날이 되면 다 나가긴 하겠지만 아이에게 어쨌든 맛있는 밥 사줄 생각이다.

둘이서 오붓하게 삼겹살을 굽든 짜장면을 먹든. 아이가 좋아하는 거 먹으면서 행복하게 보낼 예정이다.

아이의 권리니까 맛있는 건 다 아이 먹이라고? 그러라면 그러겠다. 된장찌개만 먹든, 단무지만 먹든 할 테니 아이에게 꼭 맛있는 거 먹이겠다. 내가 찾아서 해줄 일은 그거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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