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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Sep 20. 2022

도망가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 참 다행이다.

너무 아파 다시는 안 하겠다, 한 번 더 하면 사람이 아니라며 이를 바득바득 갈던 그 모든 걸 다시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만일 한 번의 상처로, 그때의 실패로 다시 도전하지 않고 시작하지 않는다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거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사람에게 주어진 망각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모두 저마다 망각의 숲을 지니고 있기라도 한 걸까. 대체 어떤 믿음이 있고 자신이 있길래 끝이 별반 다르지 않을 수렁에 풍덩풍덩 자신을 던질까. 아니면 알면서 속아 빠져주기라도 하는 걸까.

세상에, 자신에게. 별안간 그보다 더 숭고하고 짙은 뜻이 있는 무언가에 기꺼이 넘어가 속아주는 대단한 아량이어야 새로이 시작하고 뛰어드는 용기가 비로소 설명되지 않을까?

아플 걸 알면서 사랑하고 실패할 걸 알면서 도전하고. 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면서 기꺼이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열정이 매 순간 넘친다면 정말 대단하게 존경할 일이다. 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에너지 넘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러면 의문은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온다. 사람들은 대체 왜. 무슨 이유로 다 잊고, 아니 잊지 못했음에도, 해결하지 못했음에도 덮어두고 시작하고 반복하는 걸까. 무엇이 시작하는 힘을 주고 어떠한 부분이 가슴을 두근대게 하는 걸까. 100명이 있다면 100명 다 다르게 생겼듯 시작 지점의 모양이 다 다르다. 등 떠밀리다가 별안간 마음이 잡혀서, 꿈으로 간직하던 사람과 일이어서,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와서 등등. 어쩌면 생김새보다 더 다양하기까지 할 거라 여겨진다.

그러면 사람의 인력으로 차마 어쩌지 못하는 그 순간을 대체 뭐라 부르고 어떤 힘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어떤 이는 아이를 낳고 기르며 전에 없이 힘들고 외로웠으면서 그 고됨을 잊었는지 둘째, 셋째를 낳아 기르기도 하고, 다른 이는 다시 일어나기 힘들었던 실패의 경험을 거듭 반복해내면서도 또 도전하고 실패한다. 돈을 잃고, 건강을 잃고, 자기 자신을 잃는 데도 기꺼이 다음 스텝을 딛는다. 한발 더 나아간 곳이 어디일지도 모르면서 그리도 용감하게 발을 뻗는다.

글쎄 다시 생각하니 스텝을 밟는다는 정도로 가벼이 얘기해서는 안 되겠다.

이 봉우리에서 저 봉우리로 힘겹게 등반을 하는 것과 맞먹을 대단한 에너지 소모 정도로 비유해두면 되려나. 어쨌거나 많은 이들이 기어이 산 하나를 또 오르고 저 산을 넘고 넘는다.     


주변에 내가 다시 누굴 만나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던 사람들이 있는가. 그래 놓고 채 계절 하나를 보내지도 않고서 새로운 사람에게 설레기도 하는 사람들을 말이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 신중할 줄 알았더니 웬걸, 인생 마지막 사랑을 발견한 듯이, 첫사랑을 다시 겪기라도 하는 듯이 몸을 배배 꼬는 걸 누구에게든 한 번이라도 본 경험. 누구에게나 있을 거다.



다음 사랑으로 향하는 용기, 그건 어쩐지 내게 신기루같이 뿌옇고 희미했다. 실체인지 환상인지도 잘 몰랐기에 어디 멀리 남의 집에서 난 불인 듯 관망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그렇게 사랑과 그 비슷한 부류의 감정들은 너무나 멀리 있는 남의 일이었다. 어디서 어떻게 불티 하나가 잘못 날아와 활활 타오른다 해도 어리둥절한 채 손 놓고 멀뚱멀뚱.

기꺼이 반기지도, 설레지도 못한 채 왜 다시 나에게 이런 일이, 하며 갸웃댈 바싹 마른 무미건조함은 어느덧 꽤 친해진 외로움의 자국 같은 거였다.     


일정한 거리를 두고 성큼성큼 내디뎌 건널 징검다리가 있다 치자. 하나씩 디뎌 밟고 건너려고 했는데 어랍쇼, 갑자기 중간에 두세 개쯤의 돌이 어디로 사라졌다. 발아래로는 속도 모르고 휙휙 급류를 따라 감기는 강물이 흐르고 있는데 말이다.

한 걸음씩 딛고 이 강물을 건너갔다가 다시 돌아오고 또다시 어디로 출발해야 하는데 디딜 곳을 찾지 못 그러질 못하는 기분을 자주 느꼈다.

그렇게 오도카니 서서 그대로 흐르고만 있는 발아래 물을 보면 무색무취 내 청춘의 시간이 그 강물 같아 한참을 들여보다가 이내 고개를 젓게 되곤 했다.     


아무래도 건너지 못할 것 같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런다고 미련 없이 멋지게 뒤돌아 돌아오지도 못할 거면서 말이다.

그저 시간을 흘려보내며 다음 돌을 밟을 방법을 몰라 멍청하게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가만히 있어도 나아지리라 무턱대고 믿는 것 말고는 도무지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어쩌면 영영 남들 다 가는 신기루에 닿지 못할 수도 있겠단 생각을 참 많이 했다. 새로 사랑을 하는 빛나는 사람을 볼 때도, 한참 쓴 원목 식탁처럼 비슷한 부분이 닳아 있는 오래된 연인들을 보면서 수도 없이.

겨우 서른 초반의 언저리에 서 있는 주제에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포기가 그렇게 쉬웠는데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하긴. 발밑에 흐르는 강물이 그리 차고 넘치는데 굳이 내 울음까지 보탤 필요는 없었다.      


다음 돌로 향해 나아갈 방법이 없는 징검다리에 서 있는 기분으로 4년 정도를 보내고서 깨달았다. 건널 방법은 충분했지만 발을 떼지 않은 채 고집을 부린 건 지난 상처에 얽매인 나였다는 걸.

멍하니 흘러가는 시간만 내려다보면서 그 물속에서 어여삐 유영하는 예쁜 물고기를 그냥 지나쳐 보내기도 했다. 만신창이가 된 나 까짓 게 어떻게. 누가 누구를. 나 하나 돌보기도 버거워 내팽개친 내가 누굴 뭘 어쩌자고.

스스로 막아섰을지도 모를 요 모양 요 꼴의 자격지심이 얼마나 날 막아서는지 최근에 발견했다.      


잠시 무릎을 접고 오목하게 손을 모아 물에 담그면 기꺼이 담겨줄 물고기가 그동안 아주 없었을까? 가만히 되짚어보니 몇 명의 얼굴이 미끄러지듯 흘러 떠내려간다. 내 안으로 데려와 사랑을 쏟고 애정 어린 시선을 부으며 잘 키울 수도 있지 않았을까. 뒤늦게 가정해본들 다 부질없는 헛짓이었다.     

왜 죄다 그대로 흘려보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그저 내게는 그게 최선이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또다시 내 탓을 하지 않으려 한다. 모든 상황과 온 우주의 기운 덕에 그렇게 엇나갔을 거라 여긴다. 인연이라는 게 그렇지 않은가. 타이밍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이혼 뒤 지금까지 나의 시간은 누가 와도 안 될 타이밍이었다.

벽을 쌓고 선을 긋고 스스로 애써 혼자 내팽개쳐두던 시간은 평화롭고 고독했으며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었다. 그걸로 됐다, 싶다. 그 말인즉 청승은 이제 이쯤 하면 됐다는 소리다.          


나의 유별나고 지루한 외로움 탓에 이렇듯 많은 걸 흘려보냈다. 그래서 감히 그 누구와도 호우시절(好雨時節)이 아니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지금은 비가 오기 좋은 계절일까. 이제는 비가 와서 시냇물이 불어나도 되려나. 이제 그만큼 가정해보는 게 어렵지 않아 졌다.

왠지 이제는 저 건너 뭍으로 가기 위해 옷을 다 버리면서 첨벙 대고 건널 수 있을 것만 같다. 기어코 또 흠뻑 젖어들었지만, 얼렁뚱땅 징검다리를 건넜다고 좋아서 웃으면 웃음에 휩쓸려 잘한 일이라 뿌듯할 수도 있을 거다. 잘하면 함께 건너겠다고 손잡아 준 이도 그때까지 옆에 있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 정도를 상상해낼 수 있음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여전히 새로운 감정과 사람에 고개를 저으며 두려워하는 건 그대로지만, 이만큼이 내겐 어딘가 싶어 많이 좋아지고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대충 애매하게 아플 때 절반의 믿음을 가진 채 털어 넣는 타이레놀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4년이란 시간을 보내고 조금 변한 나를 느끼며 그런 생각도 했다.     



그를 처음 본 건 올해 초였다. 당연히 첫눈에 반한 것도 아니었다. 소름 끼치게 이목을 끌 인상적인 등장도 없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였다. 일단 나보다 어려 보였고 바로 그 점이 핑크빛 경계선 밖의 타인이 될 요인 중 하나였다. 내게는 내 동생보다 어린 사람을 특별한 의미 듬뿍 묻혀 마음에 담을 아량이 없었다. 그건 그간 해온 연애와 각종 스친 모든 인연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편협된 경험에서 비롯된 구분이기도 했다.


작게 웃는 눈웃음이 선했고 입을 꾹 다물고 희미하게 미소를 걸친 인사를 건넬 때마다 기분이 좋아졌을 뿐이었다.

기분이 좋아졌다는 것도 분류해보자면 별안간 구름이 걷히고 햇살이 쏟아지는 거창한 기쁨이 아니라 날 좋은 날 작게 핀 민들레가 유독 환해 몇 초간 시선이 머무르게 됐던 정도의 소소한 기분 좋음. 딱 그 정도의 요란하지 않고 과하지 않은 좋음이었다.     


자주도 아니고 이따금. 정말 잊을만하면 한 번씩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반가웠고 그게 다였다. 우중충함을 잔뜩 숨긴 채 사람 좋은 척하는 내게 적당한 거리를 두고 적당히 친절한 게 고마웠다.

리트머스지처럼 빠르게 깊이 물드는 것보다 젖어가는지도 모르게 스미는 느린 속도가 고마울 때가 있다. 빠르게 가까워지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가 내게 건넨 친절과 상냥함이 딱 그랬다.     


언젠가 타투가 드러난 옷을 입고 만났을 때 내 피부 위를 본 그는 ‘우와.’하는 감탄사 뒤로 눈을 빛냈었다. 내 몸 여기저기로 보내는 시선에는 조금의 무례함과 끈적함 같은 게 없었다. 텁텁함 없는 산뜻한 호기심에 부러 움츠러들 리가 없었다. 외려 조심스럽게 힐긋거렸다면, 그래서 눈빛에 예민한 내가 알아차릴 묘한 무언가가 느껴지기라도 했으면 나도 어깨를 움츠렸을 거였다.

내 어깨쯤의 제비에 그의 시선이 좀 오래 닿길래 취기를 빌려 주책맞게 등을 돌려 등 한가운데 있는 뱀과 꽃을 자랑했다.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고. 주접 아닌 주접을 떨며 보여줄 때마다 놀라움인지 질색인지 모를 빛이 어렸다가 지나가기도 했고 끄덕이기도 했다.     


“안 아팠어요?”     


그는 오, 하며 신기해하다가도 곧 으, 하고 미세하게 얼굴을 구겼다. 여기저기 많기도 하니 그럴 수 있다고 여겼는데 다음 행동이 예상과 달랐다.

하얀 셔츠를 입고 있던 그는 삐죽삐죽 소매를 걷어 자기 팔목을 내놓았고 그 위에 검고 푸른 타투를 보여줬다.

선입견인 건 알지만 사실 그는 타투와 그다지 어울리는 이미지가 아니었다. 부모님 말씀 적당히 잘 들으면서 적당히 딴짓도 해보고, 하지만 크게 사고 치는 거 없이 순하게 자라 순하게 살아왔을 적당한 물렁한 평범함이 느껴지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대충 띄엄띄엄 봤겠지만, 그냥, 우리 주변에 흔하게 보이는 건강하게 선한 서른 언저리의 남자였다.

당연히 상처는 있겠지만 나 정도의 짙고 어두운 진행형의 상처는 없어 보이는 딱 그 정도의 이미지였다.

그런 그의 희고 곧은 팔 언저리에 검고 흰 얼룩과 그림자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누구의 팔을 몇 초나마 그리 빤히 관찰한 적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저도 하나 더 할까 봐요.”     


그 흔한 누나, 지은 씨라는 호칭을 다 빼먹은 그는 잠시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날 가만히 눈동자로 불러냈다. 그러고서 말을 잇고 멋쩍게 자기 어깨 한쪽을 으쓱했다. 하나 해보니 또 하고 싶고 그렇더라고. 잘 안 들리게 중얼대던 그는 내가 별다른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따라서 고개를 끄덕댔다.

늘 웃고 있는 듯한 눈매로 두어 번 깜빡였었는데 맞은편에 앉아 맹하게 가만히 있었다.

아무래도 다음에 이어질 말을 건넸어야 했을까, 뒤늦게 알아채고 머리를 굴릴 때 그는 이미 자리를 벗어나 있었다.           



누구와도 쉽게 친해지는 내가 그를 나만의 경계선 안쪽으로 들이지 않았던 건 어렴풋이나마 내가 어떤 삶을 살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그가 이미 대충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누군가와 특별해진다면 그 어느 것도 숨기지 않을 생각이었지만 이건 조금 달랐다. 이제 그 누구보다 내가, 내 마음이 중요해졌기 때문이었다.

숨길 생각이 없다 해도 애초부터 다 아는 사람은 부담스러웠다.

지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과 관계의 발전, 혹은 전환은 내게 있어 엄연히 다른 이야기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 앞에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굳이 뭐하러 나를. 뭐 때문에 나를.이라는 부담과 밀어냄이 아직 새로운 간질거림보다 큰 상황. 서둘러 마음을 열어 급히 또 다치고 싶지 않았다.

못난 소리 하나 더 하자면 혹시나 나를 보는 시선 뒤편 어딘가에 불쌍하고 딱한 여자, 라는 공평하지 못한 셀로판지가 껴있을까 봐 더 그랬다.


자격지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다고 느껴진다면 아주 맞게 바로 봤다. 조금 나아졌다 한들 나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넘치게 외로워 누구든 다 좋을 이혼녀로 쉽게 보일까 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중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그의 이름 몇 글자, 흔적 몇 자락에 피어나는 웃음을 숨길 수 없다. 하지만 그런다고 뭐 어쩔 일은 없었다. 어쩌지 못할 시작의 불씨를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고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 어느 것도 시그널로 오해해선 안 된다는 제동 장치가 마음에 있기라도 한 걸까. 응당 자유로이 너풀거려도 될 마음이 계속 어느 그물 끄트머리에 붙들리는 기분이 들곤 한다. 가만히 곰곰 따져보니 섣부르게 이거 그린라이트인가? 하고 들뜨기엔 발목을 붙잡을 게 너무나 많았다.

자질구레한 현실을 떠나서 내 마음이. 편치 않고 두려워하는 내 마음의 사지가 여전히 지난 상처에 붙잡혀 있다. 슬그머니 흑심 품을 마음 한구석까지 꽉 붙들려 있으니 그렇다.     


솔직한 지금의 심정을 말하자면 이 마음이 그저 지나는 호감이거나 자연스레 흩어질 짝사랑 같은 마음이길 바라고 중이다.

그러다 어떤 날은 아주 자연스럽게 그가 내게서 관심을 꺼주길 바라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뒤죽박죽 엉망인 마음을 가진 나를 들키기 싫어서. 더 가까워지기 전에 도망가주길 바랄 때도 있다.

어차피 우린 뭘 어쩌지 못할 사이가 될 거니까.

찌질한 패배감에 절어 있는 내가 그의 산뜻한 시선을, 조심스러운 인사와 다정한 걱정을 누리는 게 자연스러워질까 봐 겁이 난다.          


어느 날은 매일 오는 그의 연락 한 줄에 하루 왼 종일 좋다가도 대체 이 사람은 내게 뭘 바라는 걸까, 싶어 다 그만둬줬으면, 하고 바랄 때도 있다.

대체 내게 뭘 바라시나요. 속 시원히 묻다가 내 뾰족함에 별안간 선한 남의 집 아들이 마음 다칠까 그러지도 못하겠다.     


그만 다가와 줬으면.

하지만 그럼에도 다 좋다고 해주기를.     


수십 번씩 마음 바꿔가며 그의 연락을 일부러 확인 안 하고 내버려 뒀다가 끝내 외면하지 못하고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대답하는 내가 너무 버겁다.

그래서 도망가줬으면 좋겠는데, 또 너무 멀리 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도 내게 다정했던 사람이니 가끔 잘 살고 행복하다는 소식을 보고 듣고는 싶으니 말이다.           

내게 쏟아지는 마음을 거두고 가까운 곳으로 도망가주길 바란다. 희망이 깃든 그 어떤 여지도 주지 말고 일말의 설렘도 주지 말고, 믿음 같은 건 더더욱 주지 말고.     


이 문장이 스스로 속이는 거짓일지라도, 그래야 상처를 덜 받을 것 같다.     










* 꾀병이라 해도 무방하겠지만, 손을 다쳐서 한동안 키보드를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오래 기다려주셔서, 걱정해주셔서 감사하고 죄송합니다. 사람의 인대는 생각보다 약하더군요. 모두 인대 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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