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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은 Aug 16. 2023

X일지






“이렇게 다 보네요.”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어색하게 잔을 채우는 손을 멍하니 바라봤다. 방금 저 손이 내 머리를 잘랐었다. 등 뒤가 허전하고 가벼워진 건 이 사람의 손길 덕이었다. 앞에 앉은 이가 누구냐면 방금 내 머리카락을 잘라준 헤어디자이너임과 동시에 일주일 전 이별한 남자의 친구였다. 사실 미용실은 어디든 많았고 원래 다니던 곳도 있었다. 굳이 먼 길을 찾아와 이 사람에게 머리를 자른 이유는, 실로 투명했다.     


“민준이는 아예 안 보죠? 이제?”     


머뭇대던 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젓가락을 들었다가 놨다. 도무지 뭐가 먹힐 이름이 아니었다. 불과 어제까지도 카톡 하나를 더 보내? 말아? 동이 틀 때까지 머리 싸매게 만든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아예 안 보냐는 사람의 이름은 불과 보름 전까지 못내 사랑하던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이 뭐냐면, 이별 직후 답답함에 돌아가시겠는 심정으로 지푸라기를 잡은 현장이란 거다. 굳이 헤어진 남자의 친구를 붙들고 뭐라도 듣고 싶어 자존심 다 내버리고 징징대는 나의 구질구질함이 생생한 자리.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동자에 반 박자 늦게 홧홧한 목구멍이 겸연쩍었다.     


사람 좋고 친구 좋아하던 X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고마운 적이 많은 좋은 친구. 빡빡한 서울살이에서 그나마 쉼이 되어주는 친구인 걸 진즉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노리기도 했다. 혹시 우리의 헤어짐에 대해 뭐 들은 게 없을까, 하고. 물론 그 이별의 여주인공은 내가 맞으나, 다른 남자들처럼 취기를 빌려 실수로 전화 한번 하지 않는 그의 의중이 궁금했다. 진짜 우리가 이렇게 헤어지는 게 맞는지. 고작 이렇게 헤어지려고 그렇게 좋아 죽었는지 등등 때마다 원망스럽고 때마다 미안했다. 연인 사이도 인간관계인데 뭐 그리 대쪽 같이 돌아서서 뒤도 안 돌아보나. 그리고 끄트머리에 남는 의문은 항상 그래서 이제 더 내가 안 보고 싶나, 같은 어리광 섞인 궁금증이었다. 나는 아직 보고 싶은데. 정말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지자고 그런 게 아닌데.     


“지은씨도 답답하네. 그 새끼 성격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 근데 뭐, 너무 하긴 하죠. 여자 마음도 몰라주고.”     


할 말이 없어 이것저것 꺼내다가 한 소리겠지만 어쩜 그렇게 듣고 싶은 말만 쏙쏙 골라해 주는지. 정말 이걸 그 사람이 좀 알아야 하는데.      

정말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라. 그냥 한번 해보는 소리라는 거 뻔히 알면서? 근데 그건 지은씨도 좀 잘못한 게 그거 되게 별로예요. 여자들 뭐만 하면 툭하면 헤어지자고 그러더라. 아니 그럼 평소에 표현이라도 좀 해주던가. 에이 그건 아니지. 몇십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되겠어요? 그럼 그런 것도 안 하는 게 무슨 사랑이고 연애예요?     



몇 잔 더 들어가자 눈동자를 마주하며 끄덕이고 맞장구치는 게 편해지고 있었다. 그가 ‘내 그 새끼 그럴 줄 알았어. 하여튼 무뚝뚝해서.’ 같은 말을 해줄 땐 속이 다 시원했다. 누가 나의 서운함에 귀를 기울여주고 맞장구쳐주니까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랄까. 어느덧 테이블에 가까이 몸을 붙이고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름의 변명을 하자면 그 목석같은 남자한테 징징거리는 것도, 도도한 척 구는 것도 다 안 먹히는 게 고됐다. 내가 더 좋아하는 기분이 속상하고 비참하기도 했다. 홀로 방 안에서 이 사람이 나한테 언제 사랑한다는 소리를 했나, 같은 걸 헤아릴 때면 눈물이 났다. 사랑하겠다고 만나는 사람인데 사랑한다는 소리를 통 못 들으니 당연히 서러울 법하지. 연애 초반이나 갖은 눈빛과 손짓에 설렘과 사랑을 느끼겠지만 그거로 채워지지 않는, 꼭 굳이 말로 들어야 마음이 놓이고 채워지는 갈증 같은 게 있는 거다. 

어려운 요구가 아닌데 남자들은 모르더라.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고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좋아 죽겠다는 귀엽고 사소한 표현에 언제나 목마른 건데. 

대체 그놈의 확인받고 싶은 불안함은 언제 해소되냐 묻는다면 글쎄다. 팔십 넘은 호호 할머니들도 예쁘다, 사랑한단 소리에 활짝 웃기 마련이다. 평생 들어도 듣고 또 듣고 싶은 얘기가 그런 건데. 근데 그걸 안 해주니까! 꼭 굳이 말로 해야 알고 유난을 떨어야만 아냐고, 아니 되려 거기에 대고 지친다고 하니까! 그러니 속이 안 상하냔 말이다.     


물론 내가 잘한 건 없었다. 괜한 서운함에 그냥 해보는 말이어도 헤어지자는 소리를 그따위로 하면 안 됐다. 

과연 내 남자한테 질리는 여자가 되고 싶은 여자가 있을까? 엎드려 절 받기라도 받고 싶은 걸 어쩌냐 말이다. 나도 환멸 난다. ‘내가 뭐 하러 돈 들이고 시간 들여서 보겠니. 좋아하니까 만나지.’ 매번 말해야만 아는 거냐고. 한숨 섞인 그의 지친 말투에 가슴이 시린 기분 겪지 않으면 모른다. 원치 않는 대답 한마디에 힘이 쭉 빠지고 가슴이 꽉 막히는 꼴이, 고작 그런 걸로 기분이 오락가락하는 내 모습이 견딜 수가 없었다. 답정너인 내가 한심해서 더더욱. 경솔한 이별의 말에 대한 핑계가 되지 않을 걸 안다. 내 잘못인 것도. 내가 다 망친 것도 너무 잘 안다. 그래도.     


“가게 가서 한 잔 더 할래요?”     


화근은 여기서 시작이었다. 어느덧 자정이 넘었고 그가 본인 가게에서 한 잔 더 하자고 한 거였다. 따라갔냐고? 그랬으니 화근이 된 거다. 술이 좀 덜 됐으니까. 낯선 사람인 건 맞았으나 못 믿을 사람도 아니고 아주 모르는 사람도 아니니까. 이야기가 더 필요했다. 혹시 모르는 거였다. 여지라고는 쌀 한 톨도 안 남기고 돌아선 그 사람이 주접들을 떨고 있다며 찾아올 법도 했다. 제발 그래 주길 내심 바라고 바랐다. 그렇다면 그냥 모르는 척 비비고 비집고 들어가 뻔뻔하게 없던 일처럼 굴 계획도 있었다. 날 이토록 끙끙 앓게 하는 그가 못 이기는 척 받아주길. 우리의 이별을 해프닝 정도로 지나쳐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눈부실 정도로 환하고 넓던 미용실은 어둑하고 고요했다.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 몇 캔을 사진으로 남기던 그 사람이 잠깐 핸드폰을 붙들고 있었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어라, 민준이 전환데?”     


자연스레 말끝이 짧아진 그는 핸드폰 화면 속 이름을 가리키며 웃었다. 저절로 허리를 세우고 고개를 저었다. 혹시, 하는 기대감과 동시에 뭐 때문일까 하는 불안함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스토리 봤나 보네.”     


짧게 중얼거리고 내 앞에서 전화를 받은 사람은 10초도 안 돼서 표정이 굳었다. 아니 내 말 좀 들어 봐. 이게 그렇게 화낼 일이야? 너 나 못 믿냐? 거쳐서 들려오는 단어가 어느 하나 긍정적인 게 없었다. 하긴, 일주일 전 헤어진 여자가 내 친구를 만나 아무도 없는 곳에서 단둘이 이 시간까지, 그 둘 다 말 한마디 없이 만난 거면 말이 곱게 나갈 리가 없었다.      


스토리에 친구 전 여친을 태그해 이 시간까지 술 마시고 있는 걸 알린 이유가 뭔진 나도 모른다. 다만 내 답답하고 미련한 짓거리가 돌이킬 수 없는 실수가 됐다는 거, 꼭 다시 보고픈 그에게 좋게 닿을 리 없단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가 뭘 상상하고 걱정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원래 그렇지 않은가. 모르는 현장을 상상하는 게 얼마나 위험하고 사람 피 마르게 하는지. 그 늦은 시간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를 자리니 더더욱.

그 역시 내가 그리워 보고 싶은데 꾹 참고 있었을지 모르는 일이었다. 담담하고 감정 없는 마지막처럼 보였지만 어쨌든 이별은 그에게도 상처였을 텐데.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게 나일 수도 있다는 걸 또 반 박자 늦게 깨달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차라리 술 마시고 전화를 하거나 상소문 같은 긴 카톡을 보내 내 심정이 이러니 헤아려달라 징징대는 편이 훨씬 나은 선택이었다. 지저분하게 여기저기 찾아다니면서 그의 흔적을 줍는 일, 한탄하는 일이 실수를 되돌릴 노력으로 보이진 않으니까.     

인사도 없이 미용실을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목적지를 말한 곳이 그의 동네인지, 집 앞인지는 아직도 헷갈린다. 몇 번이고 전화를 걸었지만 무심한 신호만 있었을 뿐 애태우는 사람은 아무 응답이 없었다. 이제 완전히 정이 떨어졌을까. 눈물이 흐르는 내내 그게 제일 무서웠다. 자존심이고 나발이고 다 버리고 처음부터 지금까지 완전히 싹 다 내 잘못이니 용서해 달라고 빌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허나 이미 머리로는 다 알고 있었다. 더는 내게 돌아올 기회가 없는걸.      



사랑에 빠지게 만든 이유 중엔 그의 그 깔끔한 확실함, 명료한 우직함이 있었다. 사랑에 빠지게 만들던 것들이 더는 나를 받아주지 않는 건 색다른 절망이었다.     

다행인 건 그게 끝이 아니었다. 몇 달 뒤 취한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는 나 역시 그렇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고 전했다. 오해를 만든 건 나인데 오해를 풀겠다고 연락 온 그에게 어찌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그 후로 잡고 싶은 것보다는, 그가 그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참으로 드물게 순수한 바람이 생겼다. 건너 건너 들어보니 그 친구와도 단칼에 연을 끊었다니까.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생뚱맞게 웬 느닷없는 반성의 글이냐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얼마 전 그에게 새로운 사랑이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거든. 그래서 이제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이지만 마음이 놓인다는 소릴 하고 싶었다. 그의 그녀가 꼭 인색한 표현 뒤 가려진 진짜배기를 알아보기를, 그래서 오래도록 잔잔하게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에게 나 같은 여자는 나 하나로 족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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