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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긴밤 / 문학동네(2025)

by 앨리의 정원

글/그림 - 루리




1. 코끼리 고아원


무리가 따르던 할머니 코끼리는 이렇게 말했다.

“눈이 멀어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절뚝거리며 이곳에 오는 애도 있고,

귀 한쪽이 잘린 채 이곳으로 오는 애도 있어.

눈이 보이지 않으면 눈이 보이는 코끼리와 살을 맞대로 걸으면 되고,

다리가 불편하면 다리가 튼튼한 코끼리에게 기대서 걸으면 돼.

같이 있으면 그런 건 큰 문제가 아니야.


코끼리는 강했다. 하지만 코끼리는 무모하지 않았다.

그래서 쉽게 화를 내지 않았다.

코끼리는 스스로의 목숨도, 남의 목숨도 함부로 여기지 않았다.

그것이 코끼리들의 지혜였다. 노든은 현명한 코끼리들이 좋았다.


나는 언젠가 노든에게, 그때 고아원을 나오기로 한 선택을 후회한 것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훌륭한 코끼리는 후회를 많이 하지. 덕분에 다음 날은 전날보다 더 나은 코끼리가 될 수 있는 거야.

나도 예전 일들을 수없이 돌이켜 보고는 해. 그러면 후회스러운 일들이 떠오르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절대 후회하지 않는 것들도 있어.

그때 바깥 세상으로 나온 것도 후회하지 않는 몇 안되는 일들 중 하나야.“



2. 뿔 없는 코뿔소


노든은 그 말을 무시하려고 했다.

그 무렵 그는 숨을 쉬는 매 순간 화가 나 있었고, 다 부수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앙가부에게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았다고 한다.

코끼리들에 대해서, 아내에 대해서, 딸에 대해서. 그리고 그날 저녁은 정말로 악몽을 꾸지 않았다.

낮에는 사납게 인간들을 노려보고 밤에는 앙가부와 이야기를 하다가 잠드는 날들이 이어졌다.

앙가부는 노든이 바람보다 빨리 달렸던 얘기를 가장 좋아했다.



3. 버려진 알


둘은 동물원 안에서 익숙하고 안정된 것들에 둘러싸여 함께 지냈다.

살면서 걱정이라는 것도 해 보지 않았다.

심지어 치쿠의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도 둘은 천하태평이었다.

치쿠와 윔보는 버려진 알을 품게 되면서 오만가지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치쿠가 걱정을 시작하면 윔보가 희망적인 얘기를 해 주고,

윔보가 걱정을 시작하면 치쿠가 희망적인 얘기를 해 주었기 때문에 둘은 괜찮을 수 있었다.

알을 품는 하루하루가 치쿠와 윔보에게는 값진 날들이었다.



4. 파라다이스


여기저기 치솟는 불길과 뿌연 연기에 눈이 따가웠다.

노든은 무너진 철조망 쪽으로 걸어갔다.

바로 눈 앞에 한 번도 밟아 보지 못한 철조망 밖의 땅이 있었다.

‘혼자 남으면 탈출하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어.’

앙가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앙가부를 놔두고 가는 것만 같아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횡설수설하던 노든은 더 이상 말을 이어 나갈 수가 없었다.

목구멍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가 않았다.

왜 이런 이야기를 쏟아 놓은 건지 스스로도 몰랐다.

“나는…그러니까 나는…”

목구멍에 걸린 감정을 계속 삼켜 내려는 노든을 가만히 지켜 보다가 치쿠가 대신 말을 이어 나갔다.


그날 밤, 노든과 치쿠는 잠들지 못했다.

노든은 악몽을 꿀까 봐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날은, 밤이 더 길어진다고 말하곤 했다.

이후로도 그들에게는 긴긴밤이 계속되었다.



5. 첫 번째 기억


치쿠는 정말 불만이 많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투덜거렸다.

하지만 노든은 성질 더러운 펭귄 치쿠가 좋았다.

치쿠는 말끝마다 노든을 ‘정어리 눈곱만 한 코뿔소‘라고 불렀다.

노든은 치쿠를 ‘코끼리 코딱지만 한 펭귄’이라고 불렀다.

노든은 치쿠의 화내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치쿠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걷고 있으면, 이 모든 하루하루가 평범한 날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치쿠는 악몽을 꾸지 않게 해 주는 최고의 길동무였다.

앙가부의 말대로 치쿠와 얘기를 하다가 잠드는 밤이면, 악몽을 꾸지 않고 깊이 잘 수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치쿠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썼다.

노든은 알에 대해 딱히 별 관심은 없었지만, ’우리‘라고 불리는 것이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노든과 치쿠와 알은 걷고 또 걸으면서 많은 것을 함께 보았다.



6. 망고 열매 색 하늘


노든은 한 존재가 다른 존재에게 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주었다.

내가 아프거나 무서워서 잠들지 못하는 밤에는 악몽을 꾸지 않는 방법이라며 옛날 얘기를 해 주었다.

나는 노든의 가족과 코끼리들, 앙가부, 치쿠과 웜보의 얘기를 들으면서 밤을 견뎠다.


“생각해 보면 나는,

원래 불행한 코뿔소인데

제멋대로인 펭귄이 한 마리씩 곁에 있어 줘서

내가 불행하다는 걸 겨우 잊고 사나 봐.“


“그치만 나한테는 노든밖에 없단 말이에요.”

“나도 그래.”

눈을 떨구고 있던 노든이 대답했다.

그때 노든의 대답이 얼마나 기적적인 것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든 것이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그때는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불운한 알에서 태어났지만 무척 사랑받는, 행복한 펭귄이었다.


“노든, 복수하지 말아요. 그냥 나랑 같이 살아요.”

내 말에 노든은 소리 없이 울었다. 노든이 울어서 나도 눈물이 났다.

우리는 상처투성이였고, 지쳤고,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남았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하나가 되었지만 복수를 할 수 없는 흰바위코뿔소와

불운한 검은 점이 박힌 알에서 목숨을 빚지고 태어난 어린 펭귄이었지만,

우리는 긴긴밤을 넘어, 그렇게 살아남았다.



7. 코뿔소의 바다


예전의 노든이었다면 인간들을 다 뿔로 받아 버리고 트럭도 부숴 버리고

그곳을 온통 쑥대밭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긴긴밤 덕분에 더 이상 어리석지 않았다.

노든과 나는 인간들이 잠든 틈을 타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노든의 눈은 나에게 도망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나는 눈으로 노든에게 도망가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노든은 내가 뿌려 둔 똥을 한번 보고 다시 나에게 눈을 맞추었다.

내가 똥을 뿌린 것을 칭찬해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없어도 저들이 노든을 함부로 건들지 못할 것이라고,

그러니 어서 도망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아니야, 너는 네 바다를 찾으러 가야지. 치쿠가 얘기한 파란색 지평선을 찾아서.”

“내가 무슨 수로 혼자 바다를 찾아가요? 그리고 치쿠는 나에 대해서 몰라요. 나는 여기가 좋아요. 여기에 있을래요.”

“너는 펭귄이잖아. 펭귄은 바다를 찾아가야 돼.”

“그럼 나 그냥 코뿔소로 살게요. 노든이 세상에 마지막 하나 남은 흰바위코뿔소니까 내가 같이 흰바위코뿔소가 되어 주면 되잖아요.”

“너는 이미 훌륭한 코뿔소야. 그러니 이제 훌륭한 펭귄이 되는 일만 남았네.”


어느 날 밤, 나는 노든의 이야기를 들으며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다가 문득,

오늘이 노든과의 마지막 밤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이제 나의 바다를 찾아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노든의 눈을 쳐다보며, 눈으로 그것을 노든에게 말했다.

노든도 그것을 알았다.

우리는 오래도록 서로의 눈을 마주 보았다.



8. 파란 지평선


어쩌면 언젠가, 다시 노든을 만나게 될 지도 모른다.

내 냄새, 말투, 걸음걸이만으로 노든은 나를 알아보고 내게 다가와 줄 것이다.

코뿔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다른 펭귄들은 무서워서 도망가겠지만,

나는 노든을 알아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코와 부리를 맞대고 다시 인사할 것이다.





내 마음 속

마음 고운 앙가부, 불평투성이 유쾌한 치쿠,

이미 훌륭한 코끼리였으며, 훌륭한 코뿔소로 성장한 노든,

이미 훌륭한 코뿔소이자 훌륭한 펭귄으로 자랄 불운한 알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긴긴밤을 버티길.



루리: 미술 이론을 공부했다. ‘긴긴밤‘으로 문학동네 어린이문학상 대상을, ’그들은 결국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로 제26회 황금도깨비상(그림책 부문)을 받았다. 그 밖에 쓰고 그린 책으로 ’메피스토‘가 있으며, ’도시 악어‘에 그림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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