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글보글 커피 포트가 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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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ISYEON

보글보글 커피 포트가 끓는다. 커피 포트 옆에는 비어 있는 생수 통, 물을 사 마시는 건 생각도 못 했는데 이곳에 살다 보니 익숙해졌다. 아직 차가 없는 이나에게 직접 저렴한 묶음을 사 오는 것은 무리라서 주문해 먹고 있다. 이나의 집은 도심에선 조금 떨어져 있지만 바깥에 차가 꽤 많이 다니는 편이다.

엄마의 이름은 명자다. 목숨 명 자에 아들 자를 쓴다. 목숨을 걸고 아들을 지키라는 의미다. 그것이 자신의 아들인지 엄마의 아들인지 남의 아들인지는 알 수 없다.


- 잘 보여?

- 응, 잘 보여.

어수선스러운 화면 너머에서 엄마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린다. 소음이 꽤나 큰 편이지만 이나는 이런 소음에 익숙했다. 엄마의 다 해진 케이스형 휴대전화가 항상 덜렁덜렁거리면서 마이크를 치기 때문이다. 적당히 고정이 되었나 보다.


- 너 시언니가 정말,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모른다. 오늘 너 선물까지 챙겨 왔지 뭐야. 사돈댁에도 너 못 온 거 둘러대느라 얼마나 동네 창피했는지. 외국에서 열심히 돈 버는 딸내미 자랑도 이참에 하자.


페이스 타임 화면 속의 엄마는 잔뜩 세팅된 머리와 화려한 원피스를 입고 있다. 미용실을 좀 다녀도 된다고 했는데도 스스로 한 솜씨인 것으로 보인다. 삐죽 잔머리가 튀어나와 있다. 아빠는 양복 차림이다. 아빠 품에는 황금색 보자기에 싸인 박스가 있다. 저건, 선물이려나. 사람들은 결혼할 때 어떤 것을 선물할까. 왜 서로의 부모에게 감사를 표현해야 할까. 이나는 사실 전해야 할 소식이 있었다.


- 근데 내가..

- 결혼식 날 와서 직접 받아가.

- 엄마. 나 뉴욕 가는 비행 스케줄도 있고.. 그날 어린이날이라 돌아오는 표도 없더라.

- 니 하나뿐인 오빠 결혼인데 안 올 거야? 날짜는, 그날만 비어있던 걸 어쩌니.

누가 속도위반 하랬나. 당장 애가 태어날지도 모르는 마당에 예쁜 드레스를 입고 처녀성을 상징하는 길을 걸어야만 했나. 최대한 빠른 결혼식을 올리기 위해 어린이날에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예비 어린이가 뱃속에 있긴 하니까 나름의 의미도 있을 거다. 하지만 가뜩이나 인천발 직항은 몇 번이 없는 마당에 한국의 공휴일에 맞춰 시간을 조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는, 이나가 이 문제를 해결하길 간절히 바랐다.


-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랑 어떻게 바꾸고 그런 거는 안돼?

- 다들 계획이 있더라. 일단 물어는 보고 있어.

- 오빠가 너 아끼는 거 알잖아.


주전자에서 작은 방울이 터진다. 방울방울.


- 어쨌든 사람들은 실수를 할 수 있고, 이제 너도 오빠도 노력한 만큼 가벼워질 수도 있지. 네가 오죽 착해? 너네는 내 인생의 전부야. 엄마 소원이야. 이나야. 결혼식 꼭 와. 응?

이나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본다. 그리고 이나는 거울을 보며 씩 미소를 지으려고 한다.


- 노력은 해볼게.

멈춰 있던 이나는 찬장에서 컵라면을 꺼내 뚜껑을 열고, 수프를 뜯어서 컵라면에 붓는다.


- 그리고 이제 너도 결혼 생각 해야지.

발 끝이 차갑다. 차가운 포트 손잡이를 잡고 보글보글 끓는 물을 컵라면 안에 조르르 따라본다.


- 너도 결혼은 한국에서 할 거지? 아빠도 이제 한 풀이 꺾여서 외국인 사위도..

- 한국 사람이랑 해라.

아빠는 이 문제에 항상 예민했다.


- 일단 알았어. 나 밥 좀 먹을게. 다음에 또 연락해요.

- 그래, 컵라면 같은 걸로 때우지 말고 밥 잘 챙겨 먹어. 엄마가 많이 사랑해 우리 딸.

- … 나도요.


전화는 끊겼다. 발 끝은 여전히 차갑고 컵라면은 뜨겁다. 손 끝이 살짝 데인 것 같은 기분이다. 너무 팔팔 끓는 물을 가져왔나. 이럴 때는 소매로 감싸 쥐고 옮기면 된다. 젓가락을 깜빡했구나. 넷플릭스는 볼 것도 없는데 항상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들이 가득 있다. 왜 근데 넷플릭스는 항상 내 언어를 아랍어로 바꿔둘까? 영국에 간다고 영어로 바뀌진 않았으면서.



엄마는 흰머리가 잘 나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나는 물을 슬프게, 벌컥벌컥 마셨다.

영상통화를 할 때 어떤 순간을 잠시 캡처했다. 품에 태아의 사진을 들고 크게 브이를 하고 있는 사진이다. 화질도 좋지 않은데 사진을 찍어달라는 엄마와, 엄마의 뒤에서 조금 언짢아 보이는 아빠까지. 물끄러미 사진을 보다 보니까 눈물이 조금 나려고 한다.

두 사람의 눈 밑이 조금 퀭해진 것 같기도 하고, 머리숱은 원래 없는 편이긴 했다. 나름 제일 좋은 옷을 입고 화장도 진하게 한 것 같지만 세월을 숨길 수가 없었다. 집을 떠난 지 이제 곧 5년이 다 되어 간다. 5년 동안 사람이 저렇게나 나이를 먹을 수가 있나. 이나에게 엄마는 영원히 그 모습일 것 같은데, 엄마가 할머니가 된다니. 이나는 자신의 배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설날에 떡국이 맛있다고 떡국을 두 그릇씩 먹은 거 아닐까. 떡과 빵을 먹으면 속이 얹히는 느낌이 든다면서 밥을 두 그릇씩 먹는 양반이니까 떡국이 원인은 아닐 거다. 그냥, 인정하기 싫지만. 그냥 노인이 된 거다. 평균적인 노인이. 흰머리와 잔주름을 세어가는 것이 무의미해지는 나이가 다다른 거다.

이나는 한국을 떠났던 날을 떠올려 본다.


두바이에 있는 회사에 취직했다고 했을 때는 집안이 조용히 술렁였다. 승무원이 되고 싶다고도, 그것도 외국에 살면서 더 많은 외국을 오가는 승무원이 되겠다고도 언급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상하리만큼 외국에 공부에 공을 들이고, 평생 쓸 일이 있을지 없을지도 물론 중국어 공부에 목을 매는 것을 보면서 다들 의아해했다. 중국으로 가진 않았다. 중국은 너무 가까우니까. 두바이는, 최대한 직항 노선이 적은 외국계 회사를 찾다가 결심했던 곳이다.


공항에서는 최대한 조용히 빨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었지만, 막상 온 가족이 모여 인사를 해주는 것을 보면서는 울컥 감정이 솟구쳤다. 나의 나라, 나의 문화, 나의 가족. 이곳을 떠나게 되는구나. 내가. 두바이를 간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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