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책하거나 외면하는 당신에게, 자신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보냅니다.
“평소에 스트레스를 어떻게 푸세요?”
“음, 일단 자요. 그럼 풀려 있어요, 하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방법을 묻는 질문에 대해 언젠가부터인가 저리 대답하기 시작했다.
나의 스트레스를 받는 알고리즘을 정리하면 이렇다.
상당히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처럼 보이나, 저 로직에는 아주 큰 함정이 있다.
우선,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내부 요인이 결부되어 있음으로 결론을 내린다. (내부 요인의 예시 – 요즘 운동을 안 해서 그래. 요즘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래. 아직 내가 이런 부분이 부족해서 그래. 등등) 그리고 내부 요인을 바꿀 수 없는 경우는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즉, 어떤 문제가 다가오더라도 내부 요인으로 인식하고 나를 바꾸는 것만이 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변하지 않는 나를 볼 때 자괴감에 빠진다.
외부 요인이라고 생각이 들었을 때 대부분 ‘어쩔 수 없지’라며 받아들이고, 잊는다. 아니, 잊으려 노력한다. 잊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대부분 나는 어디론가 도피를 한다. 잠으로, 여행으로, 영화로, 책으로. 충분히 잊었다고 생각하지만 해결이 되지 않은 채 그곳에 계속 존재하는 외부요인은 나도 모르는 사이 나의 팔과 다리를 묶어 나를 무력하게 만든다.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한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다.
나로 인해 좋지 않은 결과가 발생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나를 자꾸만 작아지게 만든다. ‘내가 잘못해서 그래. 그때 이렇게 할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에. 쓰다 보니 모든 사건의 원인이 ‘나’ 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의식이 강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트레스는 보이지 않는 먼지처럼 내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인다.
사람의 마음에 가용 공간이 한정되어 있다고 할 때, 없는 줄 알았던 먼지가 그곳을 나도 모르는 사이 가득 채운다. 하지만 내 마음속에는 티끌 한 점이 없는 척, 못 본 척 삶을 살아간다.
왜 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나에게서 찾을까?
이것은 나의 ‘자기 연민’과의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나는 20살 때부터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자기 연민에 빠져 있었다.
나만 실패한 인생 같았고,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다.
주변의 좋은 것들을 보기 어려웠고, 이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나에게, 그리고 그러지 못하는 환경을 탓하며 시간을 보냈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험에 합격하고, 어느 정도 마음의 평안을 찾은 후에.
나는 그 시절을 회고하며 ‘자의식이 너무나도 강했던 시절’이라 명했다. 특히 ‘자기 연민’ 속에 나를 가둬두었구나,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나는 다짐했다. 두 번 다시 ‘자기 연민’의 감정 따위 가지지 않겠다고.
너만 힘들어? 다른 사람들도 다 힘들어. 그러니까 징징대지 말고 할 일을 해.
어, 이런 문제가 생겼네? 너 최선을 다한 거 맞아? 진짜 너 때문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
이런 스스로의 질문들 속에 나는, 스스로를 자꾸만 몰아세웠다.
그런 내가, 나 스스로를 강하게 키우는 것 같아 좋기도 했고, 실제로 성장한 부분도 있었다.
더 이상 환경 탓, 남 탓을 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한결 성숙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저렇게 끊임없이 자기 검열을 하고, 자기비판을 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때때로 힘에 부쳤다.
그럴 때면 나는, ‘어쩔 수 없지.’라는 생각과 함께 나의 수많은 생각들을 밀어내 버렸다. ‘아휴, 생각해서 뭐 해. 생각 그만! 그만 생각하자.’라며 눈 감아 버렸다. 나의 긍정적인 면 만을 생각하고, 이 상황의 긍정적인 면 만을 생각하게 되어 오히려 좋다는 생각을 하면서. 어쩌면 나는 눈을 감으며 안주하고 싶었나 보다.
내 탓으로 돌리거나, 상황을 수용하거나. 결국 둘 중에 하나.
대부분의 결론은 이렇게 났기 때문에, 나는 더욱 이런 부분들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내 탓이면? 어차피 내가 바뀌어야 할 부분이고. 상황이 그런 거면? 말해봤자 바뀌는 거 없으니까.
정말 처음 겪는 일이라서, 그 해결방법을 모르겠어 조언을 듣고자 할 때나, 상대방이라면 어떻게 했을지 궁금했을 때, 그때만 입을 열었다.
그런데 그게 곪고 있었나 보다.
나에게 향하고 있는 내가 던진 수많은 화약들이 마음속에 쌓인 먼지와 만나 폭발을 만들어 냈나 보다.
“적당한 자기 연민도 필요해요 선생님. 나를 불쌍히 여기는 태도.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지만, 적당히 나를 불쌍히 여기는 것도 필요하답니다.”
나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언제 마지막으로 느꼈는지 생각도 안 났다.
이 직업을 가지고, 또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젖어 들어가며 나는 그게 누구든 최대한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려 애썼고, 이해하려 애썼다.
아, 나는 정작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았구나. 남을 이해해야 한다며, 사랑해야 한다면서 스스로는 갉아먹고 있었구나.
스트레스 관리의 시작은 어쩌면 ‘나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 일지도 모르겠다.
나를 바꾸려 미친 듯이 노력하는 것도, 그 문제로부터 눈을 감아 잊으려 노력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너무 힘들었겠다.” “너무 수고했어.” “힘들었을 텐데 대단하다.”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들어도 채워지지 않았던 이유는, 나 스스로가 나에게 해준 적이 없던 말이기 때문이다.
“00아 수고 했어. 정말 수고 많았어. 그리고 수고하고 있어. 너를 온 마음을 다해 응원하고, 아끼고, 또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