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케빈에 대하여' 리뷰
영화는 토마토 축제를 즐기며 온 마음으로 웃고 있는 에바의 모습을 비추며 시작한다. 가장 처음으로 느껴지는 것은 붉은색, 징그러울만큼 느껴지는 생동감, 생명력.
영화는 현재 에바의 그 어떤 생명력도 없이 (자의적으로 그리고 타의적으로) 그저 살아가는 모습과 과거의 사건들을 교차로 보여주며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시간 순서대로 사건을 나열하는 구조가 아니라서 궁금증을 유발시킨다.
에바는 여행을 즐기는 자유로운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 프랭클린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들은 그다지 원치도, 계획하지도 않았던 아이를 가지게 된다. 그것이 바로 케빈. 케빈을 낳은 에바의 모습은 행복해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아이를 기대하는 다른 임산부들과 무겁게 몸을 이끌고 다니는 것에 대한 회의감이 더욱 커 보이는 에바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대비감이 그를 말해준다. 심지어 에바는 케빈이 태어난 그 순간에도 한 번의 미소를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에바와 프랭클린, 케빈은 가족이 되어 함께 살아간다. 에바는 케빈과 하루 종일 함께 있고 그가 자지러지게 우는 것에 진절머리가 나 공사장 소음으로 울음소리를 덮어보려 멍하니 공사판 옆에 서있기도 한다. 그렇게 케빈은 자라고, 그는 이상하리만큼 에바에 대한 적개심을 보이며 에바가 싫어할만한 행동들만을 골라서 한다. 하지만 프랭클린과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다. 그렇게 프랭클린과 에바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에바는 아이를 하나 더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동생 실리아를 낳는다. 하지만 에바는 케빈을 믿지 못하고, 케빈도 에바에게 보여주듯이 실리아를 은근슬쩍 괴롭히며, 결국 에바는 실리아를 케빈으로부터 보호해야 하는 존재로 인식한다. 종국에는 어쩌면 케빈의 잘못으로 실리아는 한쪽 눈을 잃고, 더 나아가 고등학교의 여러 친구들, 프랭클린, 실리아는 케빈에 의해 생을 마감한다.
이후 에바는 살아간다. 이웃의 빨간 물감 테러에도 불구하고. 피해자의 부모로부터 갑자기 뺨을 맞아도. 회사를 함께 다니는 동료로부터 너같은 여자를 누가 봐주겠냐는 모욕적인 말을 들으면서도. 빨간 물감을 긁어내고, 닦아내고, 깨진 계란 껍질을 골라내며 스크램블 에그를 먹는다. 케빈 면회도 잊지 않는다.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는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고, 예전 에바가 케빈을 던져버렸던 일화 등만을 이야기하며. 그러다 케빈이 교도소에 온 2년째 되는 날, 에바는 말끔히 케빈의 옷가지와 방을 정리하고 다시 깨끗해진 집에서 나와 면회에서 케빈에게 묻는다. 왜 그랬느냐고. 케빈은 대답한다, 나도 아는 줄 알았는데, 모르겠다고. 면회 시간이 끝났음을 간수가 알리자 둘은 일어나고, 에바는 케빈을 끌어안는다. 그리고 에바가 교도소에서 걸어나오며 보이는 환한 시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
‘케빈은 왜 저런 아이가 되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질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태어나서? 혹은 에바가 정서적인 안정감을 주지 못해서? 어느 한 가지라고 극단적으로 말할 순 없을 것 같다. 다만 나는 사람은 누구나 어떠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생각한다. 상대적으로 순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기도 있고,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나는 아기도 있을 것이다. 이 기질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말 그대로 ‘타고난', 나의 유전자 속에 각인되어 있는 성향이니까. 사람들 모두 특이한 점은 하나씩 있지 않은가. 하지만 어떠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든, 그 아이가 사회에 잘 적응하고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은 부모를 포함한 환경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는 기준을 알려주고,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 그 정도가 환경의 역할일 것이다.
에바는 그 어떤 것도 준비되어 있던 것이 없었다. 자유로운 성격의 그녀가 과연 임신과 육아에 대해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도 신비로운 일임과 동시에 말로 다 하지 못하는 고통이 수반되는 일일 것이다. 분명히 나와 다른 사람의 세포가 만나서 만들어낸, 나의 몸 속에 10개월동안 있었던 하나의 ‘생명'이 나와 같은 피를 공유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와 온전히 다른 독립적인 존재임을 인정해야 하는 일. 케빈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녀도, 그도 그저 미숙한 존재였을 것이다.
케빈과 같은 학생을 만난다면 어떨까. (아직 나의 아이가 케빈같다면 어떨까, 에 대한 상상은 쉽지 않다. 사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을 정도로... 잠깐 스치는 생각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움) 나는 그 아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 너무너무 두렵다. 하지만 두려워만 하고 있으면 안되겠지, 강해져야 할 것이다. 다른 아이들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악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발빠르게 해결점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계속해서 강한 척을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나도 처음인데, 나도 무섭고 숨고싶은데 말이다.
에바를 상징하는 색은 붉은 색인 것 같다. 첫 장면에서부터 시작해서 빨간 원피스, 전자시계의 숫자 등이 그러하다. 그리고 케빈을 상징하는 색은 푸른 색인 것 같다. 이불을 비롯한 방의 분위기가 그러하고, 체육관에서 관객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것 처럼 몸을 숙이는 장면에서 붉은 색과 푸른 색이 교차된다. 온 몸에 새빨간 토마토를 뒤범벅한 채 나타났던 첫 장면의 에바는 케빈을 만나고, 사건을 겪고 난 후 자신으로부터 빨간색을 점차 지워간다. 집에 누군가 흩뿌려놓은 빨간색 페인트를 벗겨내고, 방을 다시 푸른 색으로 도배한다. 그렇게 모든 색을 벗겨낸 흰 색 집에서 나온 에바는 왜인지 모르게 가벼워 보이고, 어떠한 번뇌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교도소 밖을 나서며 화이트 아웃. 에바는 케빈을 용서한 것일까? 그 결정이 어떤 것이든, 새로운 시작 혹은 끝을 의미하는 듯 했다.
사람을 어떻게 하면 불쾌하게 만드는지 잘 아는 듯한 영상들이 많았다. 내용도 그렇고, 시각적으로도 전혀 기분 좋은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장면 장면들이 간결하고 중간의 과정들을 생략해 함축적으로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불편한 내용인데도 몰입해서 끝까지 볼 수 있었다. 부모와 자식, 그리고 개인, 관계, 환경 등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영화였다.
- 사진 출처 : 영화 '케빈에 대하여' 다음 포토
- 위 글은 2022년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