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롱이 May 04. 2021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 -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다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194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 등장하여 1950년대 초까지 전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던 신사실주의 영화들을 말한다. 네오리얼리즘은 꾸미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포착하여 주변에서 벌어진 사건의 본질에 주의를 기울였다. 사회의 문제를 표면에 드러내고 변화를 위해 역할하고자 한 것이다.


이탈리아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1945)는 전쟁 후 이탈리아의 현실을 기록하듯이 묘사한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효시로 불린다. 파시즘에 대한 고발, 비직업 배우가 섞어서 기용, 주로 자연광을 사용, 특수효과의 배제, 꾸밈없는 장난스러운 대사 등 해방 영화가 가진 특징들을 집대성한 영화였다. 이후 <전화의 저편>(1946), <독일 영년>(1948)과 함께 이른바 전쟁 3부작이라고 불리는 영화들을 연출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비토리오 데 시카는 <자전거 도둑>(1948)으로, 이탈리아 루키노 비스콘티는 <강박관념>(1943)으로 가장 네오리얼리즘 다운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무방비 도시>(1945)와 비토리오 데 시카의 <자전거 도둑>(1948)


*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의의

이야기의 극적인 감흥보다는 사건을 이해하고 그 본질을 파악하게끔 해야 했기 때문에 느슨한 서사구조로 만들어졌다. 삶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상황으로 이야기를 전개했으며, 에피소드적인 구조를 중심으로 열린 결말의 내러티브를 가진 작품들이 많았다. 캐릭터가 가진 동기는 빈곤, 실업, 착취와 같은 일상적이고 사회 문제적인 현실로부터 시작됐고 대개 근본적인 해결에 이르지 못하며 끝났다.
실제 로케이션 촬영(심지어는 실제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활용하기도 하였음)을 하였으며, 자연광을 선호하고 실내에서 조차 당시 법칙과 같았던 삼점 조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스타일 없는 스타일을 위해 거친 영상미, 무난한 편집, 카메라나 조명의 인위적 조작을 배제하였다. 특히 비직업 배우들을 많이 기용했는데, 그들의 사실적인 외모나 행동거지, 사투리를 포함한 일상적인 언어는 네오리얼리즘이 가진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였다.


이탈리아 무솔리니 파시즘은 정권 강화의 수단으로 선전영화와 백색전화영화를 제작하게 하였다. 이름이 백색전화영화인 이유는 백색 전화기를 사용해 사랑을 속삭이는 내용의 뻔한 상류층 멜로드라마만이 주로 검열에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검열과 통제는 전쟁 이후 네오리얼리즘이라는 해방 영화를 촉발시켰다. 설상가상 할리우드 영화의 대규모 유입으로 이탈리아 영화 시장은 끝도 없이 잠식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신세대 감독들은 "배우 없이, 스타 없이, 오직 실제의 삶만!"이라는 구호로 조작되지 않은 현실을 포착해 보여주고자 했다. 검열 규제를 피해 제작했기에 정부의 지원은 없었고, 전쟁으로 스튜디오들이 파괴되면서 제대로 사용할만한 장비도 없었다. 때문에 자연스레 거친 영상과 음향, 현장 로케이션과 미장센을 중시하는 흐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리얼리즘과 작가주의에 대한 연구로 유명한 프랑스 앙드레 바쟁은 현실의 순수하고 투명한 모방을 추구한 네오리얼리즘의 미학을 극찬하였다. 나아가 프랑스 질 들뢰즈는 네오리얼리즘이 시간 이미지에 기반을 둔 현대 영화의 출발점이라며 극찬했다. 네오리얼리즘은 이후 프랑스 누벨바그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 내용에 오류가 있는 경우 피드백받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프랑스 시적 리얼리즘 영화 - 서정적인 휴머니즘 영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