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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가 데이지 Aug 29. 2024

만약 신이 원한다면

태국 핫야이에서 만난 윈


아르헨티나 40번 국도(Ruta nacional 40))를 지나면서



현재를 즐기는 법이 뭔지 알아?


간단해.

지금 네가 있는 공간의 분위기, 시간과 맞는 음악을 들으며

이동하는 버스 창가를 보며 앉으면 돼.









온실 속 화초처럼 보낸 말레이시아를 떠나 태국으로 향한다.

고모와 고모부 덕분에 안락지대에서 누구보다 편안하게 지내면서도

나와 맞지 않는 이 지대를 벗어나는 열망을 품는다.



다시, 낯섦을 향해 나서기 위해

안락 지대의 경계를 밟는 순간


이전부터 경계를 넘는 상상을 끊임없이 해왔어도

이미 경계를 몇 번 넘은 순간이 있다고 해도


익숙하지 않은 공간으로의 발걸음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다.


여전히 말레이시아 느낌이 은밀히 스며있지만

거리 간판에 보이는 태국어는 태국에 왔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버스 창가 너머로 보이는 일출은

내게 태국에 온 걸 환영한다며 조용히 속삭인다.









말레이시아와 태국 국경에 있는 핫야이.


무어라 유명한 관광지도 없는

조그만 마을인 이곳을 바로 지나칠 수 있었지만,

카우치서핑을 통해 연락 온 호스트 윈의 메시지는

조그만 국경 마을에 

여행자를 하룻밤 보내게 한다.


여행자에게

스칠 인연을 머무르게 한다는 구실은


완벽한 명목이 된다.




태국 핫야이에서 만난 호스트, 윈


호스트 윈은 영어 교사로 지내고 있다.

중국계인 어머니와 말레이계인 아버지 아래에서

태국과 말레이시아 사이를 오가며 지낸다.


언어에 특출 난 관심과 재능을 보이는 그와

태국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중국어는 어떤 특징을 지니는지,

다른 언어는 어떤지,

이야기 나누다 보면 1시간이 훌쩍 지난다.


한국어를 알려달라며 말하는 그의 얼굴은

새로운 언어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하다.


흘러버린 시간에

수업에 늦었다며 호들갑을 부리며 정신없이 나가지만,

언어에 대한 열의가 느껴지는 강렬한 눈빛은

그의 호들갑스러운 모습을 지워버린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윈은

짙은 초록색의 이슬람 복장으로 갈아입은 채

경건하게 기도한다.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여행을 하며

모스크에서 흘러나온 기도 소리를 익히 듣고,

무슬림은 하루 다섯 번 경건히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사실도 알고 있지만,


실제 무슬림의 기도 모습을 가까이서 보는 건 또 다른 느낌이다.


하던 일을 멈추고

한 방향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그의 모습은

새삼 기도를 보는 나에게도 경건함이 가져다준다.



점심 (點心) 

점 점 點 
마음 심心


점심은

계속해서 흐르는 하루 중

잠시 중간에 마음의 점을 남긴다는 의미이다.


적막이 흐르는 공기를 뚫고

차분히 기도하는 윈을 보며

'점심'의 의미를 떠올린다.


무슬림이 하루 5번씩 기도를 하는 건

종교적 의미를 떠나


시간의 흐름을 멈추어

지난 시간을 돌아보라는 삶의 가르침이 아닐까.


마치 하루 중

잠시 점을 찍어 쉼을 갖는 점심과 같이.


하루 중

정해진 시간에

마음을 비우고,

지난 시간을 회상하며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감사함을 느끼는 행위.


종교라는 무늬를 불문하고,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모두 필요한 삶의 지침은 아닐까.



기도를 끝내고 다시 방방 뛰며

요란하게 이야기하는 윈에게 묻는다.


"기도하고 싶지 않은 적은 없어?"


"기도 하지 않는 것은 화장실 가는 것과 비슷해.

화장실에 안 가면 우리 내부에서 몸이 좋지 않듯이,

기도하지 않으면 내 몸 안에서 좋지 않음이 느껴져."


다음날 일출을 함께 보러 가자는 내게 그는 말한다.


"인샬라."


"인샬라가 무슨 말이야?"


"인샬라는 이슬람 용어야.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 일에 대해 

신의 뜻에 따라 기원한다는 의미지.

나는 약속을 어기는 걸 죄라고 생각해. 


그렇기에 약속하지 않지.

신이 내려준 운명에 따라가는 거지.

내일 일찍 일어나면 가겠지만, 

어길 수도 있기에 약속하지 않겠다는 말이야."


자신의 언행에 대한 책임을 지려는

그의 태도가 멋지다.


무턱대고 지키지 않을 약속을 한

과거의 나를 반성하며 조용히 읊조린다.


인샬라.



*인샬라 : 만약 신이 원하신다면


함께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우린 핫야이 일대를 돌아다닌다.

불교와 힌두교가 공존하는 공원을 둘러보고 식당으로 가는 차 안,


그는 운전대에 손을 떼고 주행하며 능청스럽게 말한다.


"나만의 테슬라야.

자율주행이 가능하다고"


마치 자전거를 타던 소년이

자전거에서 두 손을 떼고 운전하며 말하는 꼴이다.


"엄마! 내 자전거는 자율주행이야!"


그의 능청스러움에

한참을 웃음이 차 안을 채운다.



야시장을 다녀온 뒤,

옷을 새로 산 내게 윈은 묻는다.


"그거 얼마에 샀어?"


내가 흥정을 하지 못한 채 비싸게 산 걸 알고 난 뒤

그는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내내 뾰로통해진 얼굴을 비춘다.


"윈, 내가 흥정을 못해서 지금 화가 난 거야?"


불만 가득한 표정에 그에게 웃으며 물으니

그는 마치 자기 일인 양 서운해하며 말한다.


"데이지,

처음부터 영어를 쓰니 관광객인 걸 알고 

너를 속이려고 드는 거야.

태국어를 못 한다면,

거스름돈을 받기 힘든 상황을 이용하거나,

화폐 종류를 파악해서 똘똘하게 흥정하는 방법도 있었다고."



어린아이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해

토라진 모습과 닮은 그를 보며

고마운 감정이 든다.


나를 위해

누군가가 마음과 감정을 쓴다는 사실은

소중하고 또 소중해서

남몰래 입꼬리를 올리며

웃음으로 맞이할 수밖에 없다.



조용히 미소를 짓고 

다른 이야기를 하던 중

여전히 뾰로통한 아이에게 묻는다.


"윈, 네가 삶을 사는 이유는 뭐야?"


뾰로통해진 얼굴은 그새 진지하게 바뀐다.

잠시 머뭇머뭇하면서 그는 말문을 연다.



"나는 그냥 사는 거야.
기억에 남는 경험을 하고, 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려고 노력하지.
최선을 다해 사는 거.
내 모든 것에 감사하고 집중하는 걸 배울 때 말이야.
내 존재에 감사하고, 작은 것들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노력해.
다른 사람들의 조언이나 간섭 없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살면서
내가 내린 행동과 결정에 책임을 지며 살려고 노력해.

내 삶의 이유는, 나만의 삶을 살기 위해서야."


핫야이를 떠나면서


핫야이에서 하루는 빠른 속도로 흐른다.

어느새 밝아온 아침은,

윈과의 이별을 알린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는 버스를 함께 기다려주며

그는 내게 신신당부한다.


"데이지.

앞으로 여행할 때 이걸 명심해.

첫 번째, 지갑이나 소중한 물품은

네 가방 안에 넣어놔.

절대 밖으로 꺼내놓지 마.


두 번째, 버스표나 기차표를 사면

사고 나서 꼭 사진을 찍어놔.

잃어버릴 경우를 대비해서야.


그리고 어떤 가격표를 보더라도 사진을 찍어놔.

다음날이면 가격이 달라져 있을 수 있어.

그때 너는 왜 어제랑 다른지.

어제 봤던 가격표를 보여주면서 말할 줄 알아야 해."


사소한 조언을 아끼지 않는 그를 보며

흥정에 실패한 나 대신

토라진 그의 표정이 떠오른다.


장난기스럽게 유난스러운 그에게서

얼핏 보이는 단단한 모습들이 참 좋다.


짧다면 짧은 핫야이에서의 시간은

윈과의 색채로 가득 차

향긋한 향기의 팔레트가 된다.





데이지 (신예진)

enjoydaisypath@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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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블로그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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