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만난 로저
말레이시아는 여러 인종이 섞여 있는 만큼,
거리 곳곳에 이슬람, 불교, 인도 다신교 등의 문화가 어우러져 있다.
쿠알라룸푸르에 도착한 나를 데리러 로저는 나를 집 앞으로 찾아온다.
인도네시아 호스트 나빌라를 통해 알게 된 로저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마른 체형에 야자수 모양의 반팔을 입고 내 앞에 나타난다.
능숙하게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수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우린 잊지 못할 추억을 함께 쌓는다.
로저에게서 이따금 드러나는 유머는 나와 로저의 간격을 좁힌다.
침을 흘리며 사과를 먹는 그의 모습,
농담을 던지며 쾌활히 웃는 그의 모습,
가벼운 말투와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은
그가 변호사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결코 그의 직업을 알 수 없게 한다.
변호사는 부업이고 그랩 운전사가 본업이라며 로저는 웃음 짓는다.
실제 그랩 운전사로 일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게 좋다고 말한다.
그는 대만에서 돈세탁하며 갱스터로 지낸 이와 만난 이야기를 생생히 전달한다.
변호사의 삶에 대해서도 묻자 장난기 있는 표정은 그새 진지하게 바뀐다.
"변호사로 사건을 처리하면서 종종 양심의 문제와 마주치기도 해.
대게 사건이 빨리 해결되면 돈을 받지 못하기에 일부로 사건을 늘리는 일과 같이."
변호사 초창기 시절, 그의 선배가 로저에게 물었다.
'그냥 변호사가 있고, 좋은 변호사가 있어. 너는 어떤 변호사가 되고 싶니?"
그는 단연 후자를 답했다.
나는 그에게 묻는다.
"좋은 변호사는 뭐라고 생각하는데?"
"좋은 변호사란,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이지.
준법정신을 갖고 사건에 임하는 변호사 말이야."
여전히 자신은 전문적이지 못하기에
더 노력할 거라 덧붙인다.
변호사라고 말하기 전에는 알 수 없을 만큼 투박하고 장난기 있는 그는
어렸을 적에도 언제나 선생님에게 불리는 문제아였다.
"수필 선생님께 왜 수필을 써야 하냐고 찾아가 되묻기도 했지(웃음)"
활기차고 행복했던 어린아이 로저는 사춘기가 들이닥쳤는지,
내성적이며 남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니체는 삶에서 단계적 변화를 말해.
첫 번째, 낙타 단계는 지방 덩어리를 지고 사막을 수동적으로 건너는 단계이지.
두 번째, 사자 단계에서는 기존 가치를 부정하며 자유에 기대어살아가.
마지막 단계, 아이는 작은 것에도 기뻐하는 어린아이와 같이 삶을 살아가는 단계야."
"나의 어린 시절이 아이 단계라면, 내 고등학교 때는 낙타단계였지."
아이단계에서 한 순간에 세상을 차단한 고등학생의 그는 낙타단계로 돌아간 것이다.
소극적이며 회색 잿빛의 시기를 보내온 그는 대학생이 되어 명상과 철학 공부를 시작했다.
철학은 영적 공부로 이어지고, 쌓이는 책과 함께 그는 스스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공부를 하면서 나는 나 자신이 되었어.
내가 알고 있던 초등학교 때의 나 자신이 된 거야.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은 알려지지 않은 나 자신이었어."
그 순간은 니체가 말한 아이의 단계를 다시 마주한 순간이다.
그는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기에 대통령은 될 수 없다며 씁쓸한 농담을 지으면서도
그의 눈동자에는 법에 관한 관심이 가득했던 어린 시절의 아이 모습이 보였다.
"네가 중국계 말레이시아 사람이라면, 말레이계 친구를 사귄다는 건 힘든 일이야.
가능은 하지만, 쉽지 않지.
나는 일과 관련해 말레이어를 할 수 있지만,
보통의 중국계 말레이인은 말레이어를 잘 못해.
그래서 말레이인은 보통 중국계 말레이시아 사람을 좋아하지 않아."
말레이시아는 '부미푸트라' 정책을 펼쳐 중국계와 인도계보다 말레이계에 특권을 준다.
다양한 인종의 국가라지만, 뚜렷이 인종 간 차별이 보인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일부분 차별을 껴안고 살아가는 것과 같다.
교육적 제도에서부터 차이가 있기에 어려서부터 다른 집단이 생긴다.
무슬림에게 유리한 공립학교를 피해 로저는 사립학교를 나왔고,
자연스럽게 중국계 말레이시아 사람 친구들이 많다.
물과 기름 같은 말레이시아,
자연스럽게 섞이는 듯하지만,
구분선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 속에서 로저는 모두에게 존경받는 정치인을 꿈꾸며 로스쿨의 교정을 밟았다.
2017년, 졸업장을 받고 그는 변호사 시험에 도전했다.
온전한 힘을 쏟지 않았던 첫해는 낙제했지만, 이후 그는 매일 도서관에 가서 미친 듯이 공부했다.
쉬는 시간을 빌려 담배를 피울 때에도 그는 변호사가 된 자기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합격할 수 있던 이유로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원하면 그걸 얻을 수 있다는 믿음 덕분이라 말한다.
그러나, 2년도 채 안 되어 다니던 법무법인을 그만두었다.
더 많은 기회를 찾아서 그만둔 것이다. 실제 말레이시아에서는
변호사보다 그랩 운전사로 일하는 것이 수익이 더 높다며 농담도 던진다.
농담에 가볍게 웃는 그는 곧바로 말을 덧붙인다.
“여전히 나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찾고 있어.
나는 이기적이어야 해. 아직도 나는 공부하고 배워야 할 게 많아.”
트윈빌딩을 등 뒤로 우린 새벽 2시가 되도록 이야기 나눈다.
"애니메이션 원피스에는 엄청난 철학이 들어있어.
원피스에 있는 조이보이 이론을 알고 있어?
*조이보이 이론: 인간은 춤추고 노래하며 즐겨야 할 메시지 의인화한 서인도 제도의 캐릭터. 조이보이는 사소한 잘못이나 인류의 문제 앞에서도 언제나 웃음을 지음. 거부할 수 없는 리듬으로 북을 두드리며 인간의 걱정을 치유함. Reddit 글쓴이는 만화 원피스 조이보이가 서인도제도의 신화로 영감을 받은 거로 주장함. (조이보이 이론 출처: https://das-narrenschiff.tistory.com/10)
우린, 조이보이 이론처럼 삶을 살아야 해.
삶이란 게 결국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저 조이보이처럼 즐기는 거야."
로저는 이야기하기를 즐기며 누구보다 이야기를 잘한다.
똑똑하다고 느껴지는 그의 말솜씨는 유쾌한 농담으로 마무리된다.
나는 그의 농담에 웃으며 반문한다.
내 반문에 로저는 자신의 철학을 녹여 대답한다.
우리의 대화는 연마되며 점차 또렷한 질감이 드러난다.
그 질감 속에서 나는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내 삶의 이유는 서로에게 상기되는 거야.
서로의 삶을 상기해 주기 위해 나는 여기에 있어.
우리는 하나의 선이야. 연결되어 있지.
그러니 너의 희망은 나의 희망인 거고, 네 삶의 이유는 내 삶의 이유야.”
로저는 나와 생각하는 것이 비슷했다.
그와 이야기는 명상한 것처럼 마음이 편안하게 한다.
"네가 가진 순수함(purity)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지만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는 마.
그냥 자연적으로 흐르도록 둬."
새벽이 넘어 반쯤 감긴 눈은,
증기기관처럼 멈추지 않는 대화를 스며들게 한다.
차창 밖 거리는 여전히 새벽을 밝히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조용해진 공기 속 로저는 말한다.
"이 침묵을 즐기고 있어.'
졸림과, 편안함의 공존 속에서 생각한다.
로저의 지식과 생각, 철학이 좋다.
지금 이 순간,
쿠알라룸푸르에서 느끼는 환상적인 피곤함을 사랑해.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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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