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다합에서 만난 하갈
바다가 좋다.
바다에 사는 사람들이 좋다.
바다의 시원한 바람 때문일까.
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여유가 넘친다.
그저 바다를 바라보며 그 순간을 느낀다.
그들의 여유를,
그들의 웃음이,
그들의 손짓을 사랑한다.
배낭여행자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다합은
여행하며 만난 이들이 빠지지 않고 언급하던 곳이다.
어떤 바다보다 수없이 빛나는 바다를 품은 다합.
홍해의 수많은 윤슬 사이로 파도 내음새를 맡는다.
은은하게 풍겨오는 바다 냄새와 잔잔한 햇살.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골목을 통과한 햇살.
골목을 통과해 본격 바닷가 거리를 바라본 순간,
나는 확신한다.
다합과 사랑에 빠질 거 같아.
다합과 첫인사를 나누자마자
그가 풍긴 여유에 매료된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바다 내음새에
나는 이내 그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현란한 옷을 입은 여성이
방긋 미소 지으며 다가온다.
균형 잡힌 몸에 그을진 피부는
그의 미소를 돋보이게 한다.
다합 호스트 하갈을 향한
낯선 경계심은 녹아내린다.
"하갈! 네가 서른 살이란 게 믿기지 않아.
스무 살 같아 보이는걸!"
"일본인처럼 웃어서 젊어 보이는 거야."
하갈은 일본인 같은 눈웃음 덕분이라며 재치 있게 미소 짓는다.
'미소를 가진 사람, 하갈.'
수도 카이로에 가족이 있는 하갈은
다합에서 독립을 시작하자마자
다합과 사랑에 빠진다.
"나는 다합에서 죽을 때까지 살 거야."
하늘색, 짙은 파란색, 남색, 파란색, 옅은 파란색,
하얀색, 초록색, 옅은 초록색···.
다양한 색깔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홍해.
그 홍해를 품은 다합은
하갈뿐만 아니라
나조차도 사랑에 빠뜨린다.
여행은 내게 기본적인 감정을 알려준다.
그 속에서 나는 하갈과 감정을 공유하고
다합에서 잊지 못할 일주일을 쌓아간다.
"경제적 형편이 안 되어 학생 때 밤늦게까지 알바를 했어.
알바를 마치고 오면 부모님은 늦게 온다며 나를 혼내셨지."
하갈은 대학에서 농업과를 전공했지만,
다합과 사랑에 빠진 뒤로는
스킨스쿠버 강사 과정을 준비하며
프리랜서 마사지사로 근근이 일한다.
다합에서의 삶 역시 순탄치는 않지만,
그는 처음 본 이방인에게 아낌없이 나누어준다.
"함께 동거했던 전 애인이 바람을 피웠어.
그는 내 목을 조르기도 했지."
남들이 보면 힘들 수 있는 삶조차도
웃으며 전하는 그의 모습을 본다.
가진 것이 없어도 나눌 줄 아는 하갈.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하갈.
그를 친절하게 만든 행운이 무엇일까.
그의 미소를 바라보며 다짐한다.
'언제나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지.'
삶을 꿋꿋이 살아내면서도 잃지 않은 미소이기에
다합 밤바다 너머 그의 미소가 더욱 빛난다.
"지나가는 남자가 너를 뚫어지게 쳐다보길래
내가 '메~~~~ 롱'했어."
그는 혓바닥을 내밀며 방긋 웃는다.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시선을
재치 있게 대응하는 하갈.
"(웃음) 정말 좋은 방법이다!
메 ~~~~~롱!!!"
그처럼 메롱을 따라 하고는 질문한다.
"사람들이 왜 자꾸 우리를 보는 거야?"
"지금 이런 밤거리에 아름다운 여성 두 명이 걷고 있는데,
안 쳐다보는 남자가 있겠어?"
"세상의 온 남자들이 우리를 쳐다볼 거야!
당당하게 걷자!"
능청스레 답하는 그의 말에
우린 마치 런웨이를 걷는 모델처럼
우리를 향한 시선을 박수 삼아 당당하게 다합 거리를 걷는다.
"나는 아이를 갖고 싶은 생각은 종종 들어.
그렇지만, 결혼하면 자유가 제약되잖아.
결혼 생각은 아직 없어."
결혼에 관한 생각을 비롯해
각자 겪은 사랑 이야기,
삶에서 만난 사람 이야기를 나누며
집으로 돌아가는 다합 밤거리를 웃음으로 가득 채운다.
자물쇠는 내부에서 잠글 수 있는 일을 하나뿐이기에
집에 함께 돌아가지 않는 밤이면 하갈은 나를 기다리곤 한다.
내가 늦게 돌아오는 날이면
하갈은 꾸벅꾸벅 졸며 늦게까지 나를 기다린다.
졸음을 참아가며 낯선 이를 기다리는 그의 마음은
다합의 따사로운 햇살처럼
훗날 그가 좋은 엄마가 될 거라는 것을 알려준다.
이집트의 낮고 높은 돌산 너머로 해가 진다.
회색의 벽돌 그대로 담장과 집을 쌓아 놓은 조그만 마을도 보인다.
물고기가 몸을 보호하기 위해 모래와 같은 색으로 의태를 하듯
다합도 사막의 황빛으로 의태한다.
벽돌집은 황갈색과 회색으로 마을을 이룬다.
표면처리 없이 지어진 미가공 벽돌을 보며 생각한다.
회색 벽돌을 보면서 자라온 아이들은
집을 생각할 때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미가공 벽돌의 집들이 신기했던 첫날이 무색하게
일주일을 보내며 다합의 벽 담장은 내게 익숙해진다.
다합 바다와 하루 종일 수영을 한 뒤
하갈과 함께 집으로 돌아와 마무리하는 일상이 반복된다.
물속에 오래 있어 피로로 누적된 밤이어도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드는 밤이어도
매일 밤,
나직이 속으로 읊으며 잠든다.
이 피곤함마저도 사랑해.
그러나, 다합은
삶이 언제나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다고 말한다.
하루는 스킨스쿠버를 마치고 돌아오니 카메라를 분실한다.
하루는 결제와 관련 이중 결제 사기를 당한다.
하루는 수업 관계자에게 성추행을 당하며
물욕과 성욕을 비롯해 인간이 가진 추악한 본성을 알게 된다.
어느 하루는 스킨스쿠버 강습을 마치고,
갑작스레 강습비를 바꾼 센터장에게 화가 난 나는
센터 사장과 크게 언쟁이 생긴다.
나를 도와주려는 하갈은
센터 담당자에게 나의 의견을 함께 전달한다.
"너도 지금 데이지랑 같이 사기 치려는 거야?"
센터장은 하갈을 사기꾼으로 몰기 시작하고
하갈은 불쾌한 취급을 받고 분을 삭히지 못한다.
오랜 논쟁 끝에 사건이 일단락된 후
여느 때처럼 하갈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센터 사장을 향해 분한 감정을 표현하며
나는 다합 거리 위에서 소리를 지른다.
하갈은 그런 나를 위로한다.
"데이지,
그래도 네가 이 센터를 선택한 것은 그 이유가 있을 거야.
신이 너를 이곳에 선택하게 해 준 거야.”
친구 사이로 지내온 센터장에게 불쾌한 취급을 당하고
본인도 분명히 속상할 텐데도
하갈은 나의 얼룩진 마음을 위로한다.
'모든 건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는
그가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는 비밀을 보여준다.
나를 위로하며 방긋 웃는 그를 바라본다.
하갈의 사랑스러운 미소처럼,
나도 미소 지으며 조용히 울리는 밤바다 파도 소리에 기도한다.
'제가 바꿀 수 없는 것을 평온히 받아들이는 용기를 주세요.'
집으로 돌아와 하갈은
친구와 통화하고 노래를 듣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진다.
꿀꿀한 하루를 마무리하고자
그는 이집트 전통 요리를 내게 선보인다.
"하갈! 정말 맛있다!
요리사 하는 거 어때?"
미역국 맛이 나는 이집트 요리, 몰로키야는 내게 위로가 되어준다.
우린 하갈의 따뜻한 집밥을 먹으며 오늘 일의 회포를 푼다.
"센터장이 있는 센터에는 앞으로 가고 싶지 않아.
그는 좋은 사람이지만, 그는 비즈니스 맨인걸."
다합의 일상이 마무리 돼가는 즈음,
하갈은 기쁜 소식을 들려준다.
"데이지!
스킨스쿠버 강사로 취업했어!!
너 덕분이야. 네가 긍정적 에너지를 가져왔어!"
다합에 머무는 동안 취업을 하게 된 하갈은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이뤄낸 성과임에도
나의 덕분이라며 자신을 낮추며 나를 존중한다.
그의 취업을 축하하면서도
그의 미소가 그리워질 것을 깨닫는다.
여느 때와 같이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다합의 밤.
그중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우리가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밤이라는 사실이다.
"하갈, 네가 살아가는 힘은 뭐야?"
"나는 살아가지 않아.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지.
매 순간이 투쟁이야."
언제나 사랑스럽고 친절한 웃음을 띠는 그에게서
매 순간 '생존'한다는 단어는 낯설게 들린다.
낯섦에서 오는 생소함은 이내
응원으로 바뀐다.
따뜻한 웃음과 통통 튀는 매력 속에서
본인만의 투쟁으로 생존해 나가는 하갈.
그의 삶을 응원하며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내 삶의 이유는
스킨스쿠버 모든 교육을 수료하고, 영어 실력을 향상하고,
나의 가족이 행복하고, 너와 같은 친구들과 함께 평화롭게 살고 싶어.
마지막으로 데이지 네가 여행을 무사히 즐기기를 바라.
평온함으로 가득 찬 공기 속에서
하갈과의 마지막이란 사실은 믿기지 않으면서도
그 사실은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만든다.
다합에서의 일주일간
카메라를 도난당하고
이중 결제 사기를 당하고
센터 사장과 수많은 논쟁을 겪으며
수많은 감정의 파동이 격동하지만,
그가 내게 보내온 위로와 따뜻한 미소를 통해,
내 앞에서 풋풋한 소녀처럼 저녁을 먹는 하갈을 통해,
아름다운 미소를 잃지 않으며 삶을 투쟁해 나가는 그를 통해,
여전히 선선한 산들바람이 불어오듯이
여전히 다합 바다는 눈물 날 정도로 따뜻하게 내게 철썩인다.
그리고 깨닫는다.
신중한 고민에 의해서가 아니라 비효율적으로 선택의 시간이 길어질 때,
그 이유는 내가 욕심이 많아서였구나.
단순하고 간단하게 생각하면,
욕심을 버리면,
내 선택에 대한 미련이 남지 않는다.
선택하고,
그 선택 이후 바꿀 수 없다면
그 순간을 즐기자.
내게 펼쳐진 이 순간을.
다합의 시간이 스쳐 간다.
피곤함과 함께 다합에 도착한 첫 순간,
반짝이는 윤슬로 가득한 다합의 바다를 보며
난 다합과 사랑에 빠졌다
다합 낮 거리의 활력 있는 분위기를 물씬 느끼며
다합 밤거리의 감상적인 분위기에 사르르 녹으며
다합에 온 첫날부터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까지
다합이 편안한 일상처럼 느껴진 것은,
하갈 덕분이다.
다합의 아침 바다와 밤바다,
바다의 파도 소리,
지나가는 아무개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
바닷속의 다른 세상,
밤 바닷속 세계까지.
환상적인 안온함으로 가득했던 다합의 마지막 밤,
하갈의 웃음을 보며 다짐한다.
나도 나의 웃음을 나눠주고,
내가 가진 한 손을 다른 이에게 나눠주는 사람이 되어야지.
데이지 (신예진)
enjoydaisypath@gmail.com
@the_daisy_path : 인스타그램
https://omn.kr/1p5kj : 오마이뉴스
https://blog.naver.com/daisy_path : 블로그
[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와 오마이뉴스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