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경찰서에 있던 날

칠레 깔라마에서 만난 제네시스

by 여행가 데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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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어느덧 새벽 4시 혹은 5시 즈음,

여전히 밖은 어두웠지만, 조금씩 날이 밝아온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칼라마 경찰서에 가기로 결정한다.



'경찰서에는 빈번하게 발생하기에 범인을 잡는 체계가 구축되어 있을 거야,

적어도 범인 카르텔 조직망을 알고 있거나,

이전에 나와 같은 피해를 받은 관광객을 대상으로 도와주는 무언가가 있지 않을 거야.'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나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은

조그만 실오라기 같은 희망뿐이었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나를 도와줄 이가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내 모든 것과도 같은, 지난 모든 추억이,

공유한 지난 모든 시간이 순식간에 사라진 이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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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깔라마 경찰차 안에서


갑자기 모든 게 낯설고, 무섭고, 두려웠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적으로 보였다.

하물며, 나를 도와준 승객조차도 내 하드디스크를 가져가고

모른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나조차도 무서웠다.


이곳에서 남겨질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경찰서까지만 같이 다녀와줄 수 없을까요? 제가 너무 무서워서요."


"죄송해요. 버스가 곧 출발해서요."


나를 도와주던 통역 여행객에게 무리해 물어보지만,

끝내 매몰차게 닫히는 버스 틈으로 사라졌다.


가여운 나 자신에게 남겨진 위로는

경찰서에서 혹시나 찾을 수도 있다는 가냘픈 희망뿐이었다.


조그만 희망을 불빛으로 의지해

경찰서로 가는 두렵고도 허망한 길을 걸어갔다.

모든 전자제품이 사라진 가방은 이전보다 가벼워졌지만,

내 마음은 몇 배로 더 무거워졌다.


멀어지는 버스의 뒷모습을 처량하게 바라보다,

홀로 남겨진 거리 위의 내가 너무나도 가엽게 느껴졌다.

가여운 나 자신. 지난날의 모든 순간이 내 기억에서조차 사라져

아예 완전히 없었던 일이 되어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내 소중한 순간을 공유하고 기록하고 추억할 수 없다는 사실은

비수가 되어 내 가슴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있었다.


20240207_080529.jpg?type=w773 찾아간 경찰서


"미안, 우리가 도와줄 게 없어."


자고 일어났더니 모든 게 사라진 상황에서,

용의자의 인상착의도 모르며,

버스 안에 감시 카메라가 있던 것도 아니기에

이미 떠나버린 버스를 두고 경찰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찾으려는 시늉은 할 수 있지 않나요?

노트북이나, 카메라는 없어도 좋아요.

그렇지만, 제 추억들, 제 모든 영상만큼은

제게 없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것들이에요.

제발, 저를 도와주세요.”


경찰을 붙잡고 말을 하면서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이 해줄 수 있는 건,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이 있는 건,

나의 지난 모든 추억을 다시 되찾을 건, 없다.


20240207_122412.jpg?type=w773 그 영상들은 나와 다른 이를 연결하는 끈과도 같은 거였다. 그러나, 난 되찾을 수 없었다.


'이게 지금 사실인가?'


그저 일어난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며,

내 일이 아닌듯한 느낌만을 가질 뿐이었다.


경찰이 안타까워하는 표정을 지을 때도,

나는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서 일어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보다 차분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척하며 경찰서를 나왔다.




스텔라를 만나 다음 버스를 예매한 뒤,

하루를 무사히 넘긴다.


버스정류장에서 기다리지만,

영문도 없이 버스는 취소됐다.


"이유라도 알려주세요."


"환불도 없어. 그냥 돌아가."


Screenshot_2025-03-02_at_10.50.01%E2%80%AFAM.png?type=w773 버스 매표소에서 나온 뒤


나는 깔라마에 1초라도 더 있고 싶지 않았다.

급하게 다른 버스를 알아보지만,

이미 모든 버스는 출발했다.


나에게 이 마을은 무슨 이유로 나를 계속 붙잡아 두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정말 속상해."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칼라마 거리 위에서 나는 나의 속상함과, 분함과, 억울함을 누군가 한 명이라도 들어달라는 듯이 소리치며 울었다.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분함이 누구를 향하지도 않은 채, 그저 지금 내게 벌어진 이 상황 앞에서 누구를 탓할 수도 없이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그날 저녁, 하루 종일 허공에 멍을 때리며 경찰서에 앉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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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서를 지키는 강아지


이 강아지는 어떻게 사람에게 의해서 다리를 잃었을 텐데

그렇게 상처받고도 이렇게 사랑을 원하고 쓰다듬는 걸 원할까?


그는 처음 보는 내게 다가와서 쓰다듬어 달라고 몸으로 말한다.

쓰다듬으려고 손으로 얹을 때 그는 무엇보다 행복해 보인다.

그의 행복한 표정을 보며 나는 울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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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차를 탄 채로 깔라마를 돌아다니며


경찰서에 누가 지나가기만 해도 나는 움찔한다. 내 가방을 뺏는 상상을 나도 모르게 한다. 그 사실이 너무 슬프다.

미치도록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마음이 너무 아파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 같다.


지나가는 오토바이를 봐도 소매치기가 생각난다. 괴롭다.

이 시간을 보내기가 너무 괴롭다. 속상하고 괴롭다.


속수무책으로 지나가는 시간들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괴로워하고 후회하고 자책하는 거 밖에 없다.

괴로움에 눈물짓고, 분함에 괴로워하고,괴로워함에 속상해함을 반복한다. 너무 분해서 숨도 쉬기 힘들다. 숨을 쉬고 싶지도 않다. 그냥, 사무치게 우리 가족이 그립다.


하루 종일 경찰서에 있으며

스텔라 집안에 홀로 있는 것도 버거웠다.

그렇다고 칼라마 거리를 걸을 힘이 없었다.


나는 갈 곳을 완전히 잃은 채로

스텔라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하루 종일 경찰서에 앉아 멍 때렸다.


'신이 있다면 제가 고통받는 이유를 알게 해주세요.

신이 있다면, 이 고통으로부터 배울 수 있게 해주세요.'



부글부글 끓는 고통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간절히 기도하는 거뿐이었다



"데이지, 괜찮아?"



20240207_083800.jpg?type=w773 칠레 경찰관 제네시스


홀로 사투를 벌일 때,경찰관 제네시스는 내게 묻는다.

내가 도난을 당한 직후부터 그는 나를 걱정하고 안부를 물었다.


그는 초점 없는 시선으로 멍 때리는 나를 보며 종종 내 안부를 물었다.



"지금 순찰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는 본인 순찰 시, 나를 데리고 함께 동네를 돌았다. 이후, 나를 위해 버스 표를 구해주었다.


20240207_165231.jpg?type=w773 버스 티켓을 대신 내주는 제네시스

그는 버스에 오르는 아침에까지 나를 데리러 와준다.

누구도 챙길 겨를이 없던 나는

마지막 날이 되어서야 그에게 감사를 표한다.


"제네시스, 정말 고마워."


"너의 사정을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며칠 안 가 사라질 인연에게도 최선을 다해 도움을 준 그.


마지막까지도 나를 챙기고, 나의 안부를 물은 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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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이유는
서로 돕는 사회에서 내 몫을 하기 위해서야


이방인 신세로 아무 힘없을 때,

제네시스는 존재만으로 내게 든든한 힘이 되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더라도 그가 건넨 안부는

문제를 받아들이는 내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었다.


"조심히 도착해. 도착해서 꼭 연락 줘."


그의 안부는 내게 닥친 사실을 받아들일 위로가 되었다.

다시 툭툭 털어 나아가라는 용기가 되었다.


분통함을 못 이겨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시간을 흘려보내는 1초, 1초가 버거울 때,

내게 시간이 흐를 거라고 말해준 위로였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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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대학교 휴학 뒤,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만난 이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여행기입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유튜브를 통해 더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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