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아시아 여행을 마치며

21살 45개국 세계여행가 데이지 여행 일기장 : 남아시아

by 여행가 데이지

세계일주 67일 차, 동남아시아 여행을 마치고, 네팔 카트만두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창문 너머로 히말라야 산맥이 눈 아래 웅장하게 펼쳐졌다. 아찔하게 솟은 설산을 보니 가슴이 쿵쾅거렸다. 울컥한 마음으로 네팔 카트만두 거리에 도착하니 곳곳에 경적이 울렸다. 미디어가 포장한 네팔이 아닌, 본연의 네팔을 본 순간이었다. 나는 하늘로 피어오르는 매연을 보며 웃음이 나왔다. 네팔 그대로 모습을 두 눈으로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나는 네팔을 온전히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데이지 세계일주 남아시아 일정>

남아시아 여행(52일) : 네팔 (15일), 인도(37일)


남아시아 이동 경로 (travellerspoint)





5월 4일 - 5월 18일 네팔: 카트만두, 포카라, 안나푸르나

5월 18일 - 6월 24일 인도: 델리, 하리드와르, 리시케시맥그로드 간지, 암리차르, 아그라, 바라나시, 벵갈루루, 훈수르, 발레나할리 (훈수르), 마이소르








가슴 설레는 히말라야를 보며 네팔을 시작으로 나는 52일간 남아시아 2개국을 여행했다. 같은 아시아였지만, 이전 동/동남아시아의 여정과는 전혀 달랐다. 순수한 눈망울로 선물을 주는 아이부터, 관광객을 대상으로 사기를 노리는 상인의 눈빛을 경험했다. 더럽고 냄새나는 길거리를 수없이 걸었지만,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사원도 보았다. 남아시아 여행에서 마주한 모순 속에서 인생을 배웠고,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깨달았다. 나는 57일간 남아시아 여행을 정리하고, 새로운 공간인 서아시아로 향했다. 인도 벵갈루루 공항의 유리창 너머 활주로에 대기 중인 비행기가 보였다. 여행 내내 지연이 일상인 인도답게, 마지막 순간에도 비행기는 지연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단련된 상황에 미소 지으며 대기석에 앉았다. 이내 남아시아 여행에서 느낀 점을 기록하고자 메모장을 꺼냈다.



1. 순수함과 무례함


남아시아 여정의 첫 국가는 네팔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네팔인의 첫인상은 '순수함'이었다. 네팔 친구를 따라 집에 들어서니, 가족들은 호기심 어린 눈망울로 나를 맞이했다. 내 물건과 옷은 물론 표정 하나까지 주의 깊게 살피며 내게 질문했다. 나의 조그만 손짓에 이들의 시선이 옮겨졌고, 그 모습은 마치 장난감을 따라 고개를 움직이는 고양이 같았다. 반면, 인도에 도착하자마자 느낀 인도인의 첫인상은 '무례함'이었다. 이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은 뚫어져라 쳐다보는 무례함처럼 느껴졌다. 시치미 떼며 토라진 입은 물론, 흥정 자리에서 계산적인 표정이 먼저 드러났다. 뾰로통 나온 입은 억지 부리며 떼쓰는 어린아이와 같았다. 네팔에서의 순수함과 인도에서의 무례함, 어린아이의 두 모습은 남아시아에서 느낀 첫인상이었다.


2. 어떤 식으로든 결국 다 살아진다.


영적이고 달관적인 세계로 가득했던 인도 이미지는 첫날 찾아간 델리 시장에서 와장창 소리 내며 깨졌다. 시장은 인파와 소음으로 가득했고, 경적은 끊임없이 울려댔다. 붉은 점을 찍은 힌두교 상인들은 쓰레기 냄새에 아랑곳없이 음식을 만들었고, 향신료 가루가 공기 사이로 휘날려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여러 크기의 터번을 쓴 시크교인, 기다란 막대기를 싣고 아이스크림을 파는 상인, 망가진 출입 검사기에 멍 때리며 앉아있는 경비원, "짜이 짜이"를 외치며 관광객을 붙잡는 상인 전부가 한 장소에 섞여 난장판을 이루고 있었다. 단지 시장 풍경만이 아니었다. 첫날 충격을 준 풍경은 인도 여행 내내 이어졌다. 구걸하는 아이들, 도로 위에 누워 있는 노숙자, 끊이지 않는 경적 소리, 거리에 퍼져있는 오물 냄새,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들까지. 인도 여행은 내가 알지 못한 형태의 수많은 삶들을 알려주었다.

그 속에서 인도인들은 언제나 외쳤다. "노 프라블럼!" 인도 사람들에게는 '주가드'라는 독특한 삶의 방식이 있다. 주가드는 힌디어로 '재치 있는 해결책'이란 뜻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최소한 자원으로 최대 효과를 내는 창의적 방식을 의미하는데, 쉽게 말해 열악한 환경에서 발산하는 생계형 창의력이다. 이들은 설탕이 필요한데 다 떨어졌다면, 식료품점에 가지 않는다. 대신 서랍의 알사탕을 잘게 부숴 설탕으로 사용하는 식이다.

이 주가드식 문제 해결은 "노 프라블럼!"으로 이어졌다. 가령 전날 약속한 갠지스강 투어 가이드가 다음날 잠적해도 여행사 직원은 태연하게 말했다. "노 프라블럼!" 그는 곧이어 아무개 뱃사공을 불러 나를 넘겼다. 사공은 영어를 할 줄 모른 채로 투어가 진행됐다.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여행하며 다분히 마주한 이런 상황 속에서 점차 깨달았다. 어떻게든 삶은 굴러가고, 이어진다는 것을. 세상엔 수없이 많은 삶이 존재하고, 믿음과 종교가 존재하며 사랑과 증오가 존재했다. 또한 돈과 베풂이, 짜증과 무시, 이해와 논쟁이 함께했다. 그럼에도 오늘도 해는 뜨고 인도의 경적은 울렸다. 기가차는 상황에서도 인도인의 "노 프라블럼!"을 들으며 나는 다짐했다. 앞으로도 이 세계가 품은 삶을 껴안아야지. 어떻게든 굴러가는 이 삶을 사랑해야지. 세계를 느껴야지. 세상의 자유를 ···.


3. 다름은 이해하기보다 인정하는 것


앞서 언급한 인도인의 주가드식 사고방식을 비롯해 나는 인도를 여행하며 종종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을 마주했다. 가령 소똥을 건물 벽에 붙이는가 하면, 붉은 침을 잔뜩 묻힌 채 질겅질겅 간식을 씹는 모습이었다. 이들은 길 위에서 구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돕는 건, 네가 좋은 일을 하도록 만들어주는 거야. 나한테 감사해야 해." 북부 도시 바라나시에서 만난 친구는 갠지스강에 과자를 던지며 말했다. "갠지스강에 있는 물고기들에게 밥을 주는 거야.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주면서 봉사하는 거지." 쓰레기로 가득한 갠지스 강에는 물고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염된 강에서 사람들은 기도하고, 수영하고, 사진을 찍었다.

이해하지 못한 불씨는 여행만으로는 스쳐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인도에서 봉사를 하며 불씨가 크게 번져감을 느꼈다. 나는 인도 남부의 작은 마을에서 2주간 봉사를 했다. 봉사 첫날부터 총괄 담당자와 갈등이 있었다. 나는 교육 봉사가 진행된다고 안내받았지만, 관계자는 봉사가 시작된 뒤에야 학교에 허가를 구하려 했다. 설상가상, 교장은 제안을 거부했고, 갑작스레 취소된 교육봉사 소식에 나는 당황했다. 봉사자가 오기 전에 미리 허가받지 않은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2주간 단체 정식 버스는 매번 늦게 왔고, 식사도 불규칙적으로 제공되었다.

지연과 취소가 반복되는 봉사 일정 속에서 나는 인도인의 방식이 짜증 나고 답답했다. 'A가 훨씬 효율적인데 왜 굳이 B를 하는 거지?' '장소가 바뀌었으면 미리 공지를 해야지.' 품고 있던 의문은 점점 공격적인 분노로 변했다. 결국 언성을 높이며 대화를 나누던 중, 관계자는 나에게 말했다. "이게 우리 방식인걸."

봉사가 진행될수록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방식이 상대방에게 상식이 아닐 수 있었다. 모든 인도인을 일반화하는 건 아니지만, 나는 인도인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나의 옳음이 상대방의 틀림을 단정할 수 없었다. 살아온 배경 차이를 이해하면 미워할 것이 없었다.

인도 여행은 내게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알려주었다. 완전히 다른 삶과 세계를 살아온 이들이 하나로 묶기보다,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다르다는 생각은 계몽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다름을 포용할 줄 아는 생각은 누군가와 함께 성장하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때로는 또 다름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인정하는 것이 중요했다. 서로 다른 우주의 공존은 그 자체의 인정으로 균형을 이룬다. 무질서와 질서의 공존 속에서 나는 옳고 그름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4. 같은 나라여도 다른 나라로 인식될 수 있다


인도는 남한보다 약 33배 이상 큰 면적으로 세계에서 7번째로 큰 나라이다. 인도라는 이름 아래에 있지만, 넓은 대지 위에는 다민족, 다언어, 다문화가 존재한다. 예를 들어, 인도는 헌법에 등록된 공용어만 22개이며, 실제 사용되는 언어는 수백 개가 넘는다. 같은 나라에서도 지역, 언어, 종교에 따라 법과 제도도 다르게 적용된다. 힌두교도는 힌두 개인법을, 무슬림은 샤리아를, 기독교는 기독교 개인법이 적용되는 것이다. 시크교, 불교, 자이나교는 힌두 개인법 범주에 속하지만 결혼, 이혼 절차와 상속권과 관련해서 다르게 결정된다. 종교 간 결혼이 이루어지면 머리가 아프기 시작하는 것이다. 실제 인도에 머물며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마다 나는 완전히 다른 세계에 온듯한 느낌이 들었다. 경적과 오염 가득한 인도 델리 시장을 걷다 맑은 공기 속 참새 소리가 들리는 인도 리시케리를 걷는 상상을 하면 된다. 나는 리시케시에서 바라나시도 이동하면도 다시 인도에 온 듯했다. 이전에도 인도에 있었지만, 더 인도에 온 느낌이었다.

이런 이유들로 일부 인도인은 다른 지역, 문화, 종교를 가진 사람을 다른 국가 사람으로 대했다. 델리에서 만난 한 친구는 말했다. "남부 인도는 북부 인도인 델리와 완전히 달라. 다른 국가라고 생각해. 언어도 달라서 나는 남부인과 의사소통도 못 하는 걸!" 나는 한국에서 지내오며 한 국가 내에서 지역이 나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전라도, 강원도, 제주도 등 지역마다 다른 문화와 사투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나라 사람을 '다른 국가 사람'이라 말하는 게 놀라웠다.

하루는 인도의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다람살라에서의 일이었다. '작은 티베트'라고 불리는 이유는 중국 공산당이 티베트 봉기를 강압적으로 진압한 뒤, 달라이라마가 인도 다람살라로 망명해 티베트 망명정부를 세웠기 때문이다. 다람살라에서 만난 한 승려는 말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내 국가는 없었어. 나는 시민권도, 국가도 없었지." 하루는 네팔 포카라에서 만난 친구가 말했다. "나는 카슈미르에서 태어나 자랐어. 나는 인도도, 파키스탄도 아닌, 카슈미르 사람이야."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종교분쟁으로 끊임없이 영유권 싸움이 일어나는 지역이었다. 나는 언제나 '대한민국' 국가로 명시된 곳에서 살아왔기에, 남아시아 여행에서 만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국가라는 개념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국가로 규정된 절대적 개념은 없으며 문화, 민족이 얽혀 있는 줄다리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인도 여행을 통해 나는 같은 국가 내에서도 언어도, 문화도, 법도 다르게 살아간다는 개념을 포함해, 국가와 국경 개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를 가졌지.


5. 폐지된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남아있다.


카스트 제도는 인도에 존재했던 사회적 신분 제도이다. 힌두교 교리와 사회 구조에서 비롯된 제도는 수드라, 바이샤, 크샤트리아, 브라만 4가지로 계급을 나누었다. 계급에도 속하지 못하는 집단은 불가촉천민이라 불렸다. 인도는 1950년 헌법을 제정하며 카스트를 불법으로 규정했지만, 나는 남아시아를 여행하며 여전히 남아있는 카스트 제도의 흔적을 보았다. 법이 지우지 못한 역사의 과도기였다.

인도 기차에서 만난 여성은 카스트 제도에 따라 가문이 연결한 계약 결혼으로 결혼식에서 남편을 처음 만났다고 말했다. 네팔 카트만두에서 만난 친구는 카스트 제도로 인해 받은 차별을 말했다. 그는 네팔에 만연한 카스트 제도를 비판하며 말했다. "우리는 잘못된 걸 바로잡아야 해. 우리는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불가촉천민에 대한 어떠한 관행도 있어서는 안 돼."

실제 인도 거리를 걸으면 노숙자와 가난한 이들을 끊임없이 보게 된다. 카스트 제도가 모든 원인은 아니지만, 영향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바라나시에서 만난 친구는 본인이 카스트 최상위인 브라만 계급이라며 자랑스레 말했다. "바라나시에서 우리 가문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개인 사원까지 소유한 그에게 물었다. "길거리 노숙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불평등하다고 느낀 적 있어?" 그는 이전 생에 따른 운명이라 답했다. 힌두교는 모든 생명에 대한 존중과 배려, 공동 연대의식을 가진 아힘사 교리가 있다. 나는 이를 언급하며 카스트 제도에 대한 의견을 물었지만, 그의 답변은 의아스러웠다. "카스트 제도는 인도가 가진 문화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거지."

모든 사람은 같지만, 동시에 계급이 있다고 말하는 카스트 제도. 그 제도를 존중해야 한다는 말은 모순적이었다. '그들은 이전 생의 운명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평등을 무마했다. 나는 좋은 카르마를 받은 이들이 불평등에 대한 불편함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 카르마를 둘러싼 불평등 앞에서 갠지스강에 비친 삶의 철학들이 나에게 회오리치며 모순을 일으켰다.

한편으로 한국인으로서 내 위치를 객관적으로 보는 기회였다. 카스트 제도의 철폐를 위해 노력하는 네팔 친구들을 보며, 나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민주주의를 일궈낸 인물들이 떠올렸다. 한국 1900년 후반 모습이 어쩌면 지금 네팔모습이라 생각했다. 카트만두 작은 호스텔에서 친구들이 나눈 대화는, 과거 한국 작은 여관에서 변화를 말하는 이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그 속에서 국가와 시대가 개인에게 부여한 상황이 다른 것을 체감했다. 선대가 바꾼 역사의 흐름에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계기였다.


6. 극단적 빈부격차를 체감한다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곳은 어디서도 부와 빈이 있는 법이다. 한국 역시 서울역, 쪽방촌을 가면 수많은 노숙자가 술병과 함께 자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남아시아를 여행하며 특히 길거리에서 수많은 노숙자를 봤다. 특히 인도는 차원이 다르게 많았다. 델리 거리를 걷고, 툭툭를 타고 이동하는 모든 거리에 노숙자가 누워 있었다. 장애인, 노숙자, 빈민이 무방비로 내 시야에 쏟아졌다. 인도는 IT와 서비스 산업의 빠른 성장으로 오늘날 국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지만, 농촌과 저소득층 지역은 여전히 가난에 노출되어 살아오고 있었다. 인도인구 약 14억 명의 숫자가 다른 국가보다 상대적인 빈곤율이 많은 원인일 수 있지만, 빈부격차로 인한 소외계층은 주요 원인이었다. 그로 인해 나는 어딜 가나 보이는 가시화된 경제적 불평등을 보며 회의감이 들었다. 리시케시에서 명상 선생님에게 물었다. "인도 사람들은 대게 카르마를 믿는데, 길거리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전생에 죄를 지은 걸까요. 왜 우리는 배부른 사람과 굶주린 사람이 있는 걸까요?" 선생님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카르마(업보)이지요. 그들은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어요." 나는 의아함을 숨길 수 없었다. 그들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인도 여행 내내 느낀 회의감과 모순 속에서 내가 당연하게 살아온 삶의 기본 요소가 결코 당연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내 감사함을 가졌다.


7. 예측불가능한 상황에 대처법을 터득한다


여행을 하면 예측 불가능한 상황이 매번 생기곤 하지만, 인도에서는 매일이 그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여기는 인도니까'를 되뇌었다. 하루는 카페에서 작업을 하는데, 근처 나무공사로 와이파이가 끊겼다. 데이터도 없이 작업을 잇던 중, 갑자기 정전이 발생했다. 모든 게 멈춘 순간, 나는 말했다. "괜찮아. 여기는 인도니까." 하루는 인도 북부 하리드와르를 걷고 있었다. 50m 앞서 걷던 무리는 갑자기 멈춰 주저앉았다. 무슨 일인지 고개를 갸웃하며 지나가는데, 그들은 도로 위에서 용변을 보고 있었다. 하루는 갠지스 강 근처 시장을 구경했다. 수많은 길거리 상인들이 음식을 만드는데, 한 상인은 도마 없이 길바닥 위에서 밀가루를 반죽하고 있었다. 자칫 모래가 들어갈 수 있는 음식의 식감을 상상하니 충격적이었다. 길거리 음식을 진정 '길거리'로 만들고 있었다. 이들에게 길거리는 화장실이자, 침대였고, 부엌이었다. 하루는 벵갈루루의 로컬 시장에 갔다. 살갗이 닿을 정도의 인파를 뚫고 쓰레기를 지나며 걷고 있는데, 누군가 나의 머리를 세게 때렸다. 당황해 친구에게 물었다. "방금 내 머리 때리고 간 거 봤어? 왜 때린 거지?" "봤어.. 글쎄…." "그렇지…. 여긴 인도니까.."

이런 순간이 쌓이면서 나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계획형이고, 시간에 맞추는 삶을 지향하는 사람인지 새삼 느낀 것이다. 동시에 몰랐던 내 모습도 발견했다. 벌레라면 사족을 모쓰던 나는 어느새 빵을 먹다가 벌레가 나오면 그 부위만 떼고 다시 먹는 게 익숙해졌다. 노트북으로 타자를 치고 있는데 그 위를 개미가 기어가는 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였다. "괜찮아. 여기는 인도니까."

나는 인도를 여행하며 가장 많이 "괜찮아. 여기는 인도니까"를 말했다. 이 말을 하며 나는 예측 불가한 상황을 받아들였고, 좀체 이해하기 어려운 인도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는 밑거름을 만들었다. 그 속에서 나 자신을 깨달았다.


8. 영적 개념을 비롯해 삶에 대해 떠오르는 근본적 질문들


인도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 수천 년 역사의 종교가 녹아있는 땅이다. 인도인은 오래전부터 고정된 실체가 없다는 '공'의 개념을 사유하고, 만물이 생겨나는 근원을 떠올렸다. 이들은 '없는 것'을 수로 만들어 숫자 0을 만들기도 했다. 삶과 죽음에 대한 오래된 고민은 오늘날 명상, 요가의 문화를 만들었다. 그런 인도를 여행하며 나는 삶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떠올릴 수 있었다. 하루는 요가의 고장 리시케시에서 명상을 배우는 날이었다. 명상은 가만히 앉아 가부좌 자세를 하는 자세뿐만 아니라 종류가 다양했다. 하루는 손가락으로 눈을 감싸며 움소리를 내는 브라마리 명상을 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이 스치며, 두꺼운 나무줄기 이미지도 떠올랐다. 곧이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방언처럼 흘러나왔다. 그저 일어나는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나는 내면이 정화됨을 느꼈다.

나는 신을 허구적 존재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허구적 신을 통해 의지하고, 사회적 질서를 만든다고 믿어왔다. 그러나 인도에서 알 수 없는 에너지를 느끼면서 신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어야 한다는 감각을 받았다. 영적으로 깨어난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며, 내가 갇혀있던 틀을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명상하며 흘린 눈물은 그 깨달음의 상징이었을 수도 있다.

힌두교인들이 윤회의 굴레를 벗고 해탈을 얻는다고 믿는 바라나시에 도착하니, 영적 에너지가 나를 감싸는 듯했다. 바라나시에는 세계 최대 야외 장례식장이 있다. 사람들은 갠지스강 강둑 위의 장례식에서 아이, 임산부, 바이러스로 인해 죽은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시체를 태웠다. 화장하지 못한 시체는 바로 갠지스강에 던져지고, 일부 신자는 사체의 남은 살을 먹기도 했다.

신성스러운 갠지스강에 몸을 담는 사람들 뒤로 죽은 시체를 던지는 장면을 보고 있으니, 죽음이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시체를 태운 검은색 연기가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활활 타오르는 열기는 멀찍이 있는 내게도 느껴졌다. '삶은 무엇이고, 죽음은 무엇일까..' 한참 죽음에 대해 생각하자니, 한 남자가 다가왔다. "이 불은 시바신의 불이야. 3500년 경전에 켜진 이후로 한 번도 꺼진 적이 없어." 그는 나를 의식 현장에 데려갔다. 북소리가 둥둥 울리며 사제는 무어라 중얼거렸다. 의식의 열기에 나도 무언가 홀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장례식장 위에는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을 위한 쉼터가 있었다. 가족과 집 없는 이들이 전 세계에서 찾아와 이곳에서 죽음을 기다렸다.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죽은 이의 연기를 보며 죽음이 무엇일지 남자에게 물으니 그는 대답했다. "죽음은, 진실이야."

꺼지지 않는 불의 열기,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의 눈빛, 시체를 태우는 냄새와 장례식에서 울리는 종소리, 아름다운 갠지스강 풍경에 나는 경건함과 초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타오르는 불꽃 속에서 죽음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나도 무언가 죽음 너머의 세계를 이해할 것만 같았다.

삶과 죽음에 대한 질문은 일상의 사소한 순간에서도 이어졌다. 변동 가격을 고수하는 일부 국가를 여행할 때는 흥정 논쟁이 자주 벌어지곤 했다. 변동 가격의 끝판왕인 인도에서의 흥정은 종종 말다툼으로 번지기도 했다. 나는 1루피(약 15원)를 더 아끼고자 상인과 한참 실랑이를 했다. 붉은 점을 이마에 새긴 상인은 물었다. "너 행복해? 이렇게 하면 네가 행복하니?" 그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멈칫했다. '내가 나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 했던 게 고작 순간의 이런 행복을 위해서였던가?' 삶과 죽음 앞에서 단기적 이익만 바라보는데 얼마나 덧없는지를 깨달았다.


9. 인생은 모순의 연속이다


살아가다 보면 양극단을 동시에 마주하는 경우가 있다. 삶은 상반된 것들이 끊임없이 공존하며 모순의 굴레를 만들어간다. 나는 인생이 모순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인도 여행을 하면서 모순이 무엇인지 깊숙이 깨달았다.

대표적으로 힌두교와 상충하는 카스트 제도의 모순이다. 인도 인구 절반 이상이 믿는 힌두교의 교리는 인간은 궁극적으로 동일한 자아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이와 달리 인도 사회에 뿌리 깊게 내린 카스트 제도는 출생에 따라 인간을 계급으로 구분 짓는다. 철학적으로 평등을 말하면서도 제도적으로 불평등을 정화하는 것이다. 간디조차 힌두교 교리를 근거로 카스트를 비판했었다. 인도인들은 평등하다고 말하는 힌두교를 믿으면서 인간을 나누는 카스트제도를 지켜갔다. 나는 그들을 보며 모순을 느꼈다. 바라나시에서 만난 친구는 본인이 브라만교(카스트의 최상위 계급)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은 같아. 우린 모두 동등하지.""그렇지만, 인도가 가진 카스트 제도는 뭐야? 너도 스스로를 '브라만 계급'이라고 소개했잖아." "그건 인도 문화이기에, 존중받아야 하는 거지." 이뿐만 아니었다. 인도에서 마주한 진실한 잠언이나 깨달음도 곧장 상충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아슬아슬한 모순의 외줄을 타며 깨달았다. 결국 본인의 해석과 받아들이는 방식에 달린 문제였다.

축복의 삶과 해탈의 죽음이 공존하는 갠지스 강에서도 모순은 뚜렷했다. 나는 해돋이 보트투어를 신청했지만, 예정된 가이드가 늦잠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결국 옆에 있는 아무 사공의 배에 올랐다. 성스러운 강 위에서도 상인들은 다가와 푸자를 올리며 돈을 요구했다. 물 위에는 쓰레기가 둥둥 떠있었다. 더럽운 갠지스강 지평선을 따라 주황빛의 일출이 퍼져갔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도 결국 돈만 있는 걸까, 오염된 강을 성스럽다 여기며 그 위에 호객행위와 약속 불이행이 만연해 있는 상황에서 나는 두 가지 상반된 감정이 교차했다.

반짝이는 바라나시의 야경을 바라보며 지난 인도 여행 속 모순을 떠올렸다. 더럽고 냄새나는 길거리를 수없이 보았지만, 살면서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사원을 보았다. 성추행하는 미치광이를 봤지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웹툰의 작가도 보았다. 기차표를 사는 과정에서 모든 게 미워서 울컥했지만, 명상을 배우면서 알 수 없는 울컥함을 느꼈다. 길바닥 위에서 제조되는 길거리 음식도 보았지만,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길거리 음식도 보았다. 인도는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다짐한 나라였지만, 가장 오래 머물고 있는 나라였다. 모순과 상충, 대비와 의문. 그 위에 삶이 있었다. 그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옳고 그름은 없었다. 결국 인생은 모순의 연속이며 인간은 모순덩어리였다. 인도는 인생과 같았다. 기상천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이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현재를 충실히 살아가고, 미소를 머금으며 모순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10. 내 삶의 틀 밖에서 바라보는 시각


이전 동/동남아시아 여행을 통해서도 한국과 다른 문화와 시각을 얻을 수 있었지만, 네팔과 인도는 특히 틀 밖에서 삶을 바라보는 기회가 많았다. 동남아시아는 K-POP이나 서양 팝송이 곳곳에서 들려왔지만, 네팔과 인도에서는 서구 노래를 거의 들을 수 없었다. 서구식 환경이 드물었고, 수천 년의 역사와 종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어 각 지역적 문화가 뚜렷했다. 인도에서 만난 대부분은 팝송을 듣지 않았고, 거리 절반 이상은 인도 전통 복장인 사리를 입고 있었다. 식사 방식과 종교의식 등의 일상적 요소도 인고 고유 방식이 유지되고 있었다. 서구의 영향이 있어도 인도화된 경우가 많았다. 영어를 쓰더라도 힌디어 억양이 있는 '인도 영어'를 사용하는 격이다. 아그라로 향하는 로컬버스에서 한 친구는 말했다. "우리는 서양 문물에 너무 노출되려 하고 있어. 인도의 전통을 지켜야 해." 이와 반대로 한국은 서양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였다. 일부 식당에서는 포크와 나이프로 밥을 먹고, 양변기를 쓰며, 서양식 복장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게 당연했다. 교통, 교육, 건축 등의 일상적 인프라 대부분도 서구식으로 도입되었다. 그 속에서 자라온 나는 내가 보내온 생활을 '당연한'것으로 여겼다. 거리에서 신발을 신는 게 당연했고, 화변기보다 양변기를 쓰는 게 편했다. 그러나, 일부 인도인은 맨발로 걷는 게 편했고, 화변기가 당연한 것이었다. 나는 운동화 없이 축구를 잘 차고 있는 아이에게 운동화를 주는 격이었다. 그 속에서 내가 서구 문물에 노출되어 살아오며 정체성을 형성했고, 이게 절대적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의문이 들었다. '신발 없이도 건강하게 축구하는 아이들에게 운동화를 추천하는 게 맞을까?' 나는 남아시아를 여행하며 내가 속한 세상의 틀을 깰 수 있었고, 삶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인도에서 한 달이 되는 날, 맨발로 걸어 다닌 내 발바닥은 어느새 먼지로 까매졌다.


11. 강해지는 나날들


인도에 머무는 37일은 여행이 아니라 생존과 같았다. 매일 50도가 넘는 날씨와 우중충한 하늘의 델리, 온몸에 달려드는 더위의 바라나시, 쓰레기로 가득한 시장, 음식물 쓰레기 냄새 옆에서 요리하는 길거리 상인, 거리 위에 노상방뇨하는 사람들과 그 위를 지나는 툭툭, 오토바이, 자동차까지. 하나의 도로에 뒤섞인 이들은 매시간 경적을 울려댔다. 나는 순수함과 무례함 사이에서 하루하루 생존하듯 여행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이 연속으로 일어나고, 나와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이들과 언쟁하고, 어떤 상황에도 '노 프라블럼!'을 외치며 돌진하는 그들 속에서 하루하루 강해졌다. 바라나시로 향하는 버스 안, 옆자리 인도 소녀는 말했다. "인도는 사기 치는 사람이 많아요. 음식을 사더라도 꼭 로컬사람들의 가격을 확인해야 해요." 델리에서 만난 이웃은 말했다. "툭툭를 타면 상인이 가격을 높여 불러요. 꼭 낮춰야 해요!" 이들 말처럼 인도에서 만난 이들은 인도에 나쁜 사람이 많다고 말하곤 했다. 한국에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나는 같은 나라 사람을 안 좋게 평하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변해있었다. 나는 무례하게 대하는 인도인에게 아무렇지 않게 무표정을 지었고, 아침부터 시작된 툭툭 기사들의 호객행위에 소리를 빽빽 질렀다. 인도 여행은 곧 생존이었다. 나는 인도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강해져야 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했다. '뒤통수 당하지 않기 위해 강자에게 강해져야 해. 눈속임에 넘어가지 않고, 내가 얻을 수 있는 권리는 얻고, 나의 의견을 피력하고,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여 수정하고, 이익에 눈먼 자에게 속아 넘어가지 않도록 강해져야 해.' 인도의 매운맛을 통해 나는 거친 세상을 겪었고, 그 속에서 사람을 의심하는 법, 무표정으로 대하는 법, 무시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인도 여행을 통해 하루하루 단단해졌다.


12. 막강한 종교의 힘


인도는 무신론자 인구 비율이 0.1% 채 되지 않는다. 인도는 일상 모든 곳에 종교가 스며있었다. 결혼과 장례, 출산 등의 인생 의례는 종교와 직결되었으며, 정치적 정당조차 종교적 정체성이 강하게 베여있었다. 종교는 단순히 종교와 신앙 차원을 넘어 사회 전반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구 절반 이상이 믿는 힌두교는 모든 것을 신으로 여긴다. 절대적 단일신이 아닌, 자연, 인간, 사물 모두 에너지가 깃든 신성한 존재가 된다. 힌두사원에는 팔이 여러 개 달린 신상이나 동물 형상의 신들이 있다. 이들은 ‘에너지’라는 신의 존재를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무언가로 표현한 것이다. 하늘색으로 세 개의 눈이 달린 이들의 모습은 신에 대한 새로운 이미지를 주었다. 바라나시에서 힌두 의식은 더욱 신선했다. 화염 주위를 모여든 사람들은 장례식으로 시체를 태우고 있었다. 한 친구는 말했다. "불에 타고 남은 부위는 어머니 강가 강에 버려지는데, 일부 신자는 남은 살을 먹기도 해." 죽음을 신성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방식에서 나는 놀라움과 충격을 동시에 느꼈다. 믿음과 상상으로 인간이 피워낸 종교 문화 중, 인도 여행은 힌두교, 시크교 등 한국에서 접하기 힘든 종교 문화를 직접 경험할 기회였다. 나는 그 속에서 상상으로 의식하고, 신성으로 승화하는 인간 고유의 능력을 되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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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를 여행하며


메모장을 덮고 안내판을 바라봤다. 지연된 비행기는 여전히 대기 중이었다. 메모를 쭉 읽어 내려가니 지난 52일간의 남아시아 여행이 스쳐갔다. 보랏빛의 자카란다 꽃이 네팔 카트만두 거리 곳곳에 흩날리는 장면이 떠오르고, 인도 길거리에 울리던 경적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지난 여행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똘망똘망 쳐다보는 네팔사람들, 영적이고 낙천적인 인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인도를 여행하면서는 하루라도 빨리 탈출하고 싶기도 했다. 2주간 인도 마을에서 봉사하며 주가드 정신의 인도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모순 앞에서 허무감에 사로잡히기도, 짜증에 소리를 지르기도, 처음으로 배탈에 걸려 골골대기도 했다. 극과 극의 상황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만났고, 인생의 가치를 돌아봤다. 대기 공간은 어느새 승객들로 가득 찼다. 나는 공간을 둘러본 뒤 다시 메모를 시작했다. 지난 118일간의 세계일주를 하며 한층 성장한 나를 기록하기 위해서였다.


1. 사람 보는 눈이 달라졌다.


나의 여행은 무엇보다 만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만남과 배움은 내 여행에서 핵심 단어였다. 새로운 삶을 알아가며 나의 세계를 넓혔고, 타인을 포용하고 인정하는 법을 깨달았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을 알아가며 나는 더 넓은 사람이 되어 나의 것을 나눌 수 있었다. 그 속에서 조금씩 사람을 판단하는 나의 기준이 생겼다. 마냥 타인을 좋게만 봤던 과거와 달리, 나에게 이익을 기대하며 다가오는 사람을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보이지 않게 배려하는 사람의 마음을 읽고, 작은 행동에서 정성이 전달되는 의미를 깨달았다. 또한 사람을 적절히 무시하고, 지나치는 법도 익혔다. 그 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 상대방에게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고민했다. 지난 여행을 통해 나는 타인을 보는 시선과 나를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다.


2. 여행이 주는 여유를 배워가고 있다


바쁘게 시작한 여행이 장기간이 되면서 나는 여유와 온기를 내 안으로 넣고 있었다. 인도의 경적 소리를 들으면서 여유로운 감정을 느끼기 쉽지 않았지만, 봉사하며 2주간 머문 남부 마을에서 머무름의 온기를 몸속으로 흡수할 수 있었다. 마을 야자수를 보면서 문득 중세인이 현대인보다 행복감을 더 많이 느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몇 분 안에 메시지를 전달하는 우리보다, 며칠이 걸려 편지가 전달되는 이들이 더 행복했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술 발달로 우리는 과거보다 효율적으로 일을 처리하며 시간을 얻었지만, 언제나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분 단위로 살면서도 나는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다. 그런 나에게 여행은 여유가 무엇인지 알려주었다. 인터넷이 불안정하고, 모든 것이 느린 인도 작은 마을에서 나는 더 많은 시간을 얻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고, 오히려 보이는 것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여행을 통해 여유가 주는 행복과 머무름이 주는 교훈을 배우고 있다.


3. '새로움'이 익숙해졌다.


여행을 시작한 뒤로, 나는 매 순간 변화 속에 있었다. 아침마다 눈뜨며 바라보는 천장이 달랐고, 매일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그 속에서 변화에 대한 열린 마음을 배웠다. 그러나, 여행 100일이 넘어가면서, 매 순간이 새롭다는 사실조차 어느새 익숙해졌다. 하루는 인도에 머물며 한국 친구와 연락을 했다. 친구는 "인도에 있는 네가 한 편의 영화 같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을 들으니, 나는 내 삶을 특별하다 여기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이는 한국이란 일상에서의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보는 느낌이었다. 어릴 적 나라면, 지금 순간을 특별하다고 여겼을 텐데, 나는 어느새 당연한 삶처럼 받아들이고 있었다. 변화에 익숙해져 사소한 감사함을 잊고 살았던 건 아닐지 생각했다. 여행을 하며 매일 새로운 도전을 해가면서도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4. K-pop과 북한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다


지금까지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를 여행하고, 남아시아까지 마쳤지만, 길 위에서 만난 이들은 공통적으로 한류에 대한 관심과 북한에 대한 호기심을 보였다. 나는 여행 내내 한류의 흐름을 만든 이들로부터 큰 혜택을 맛보았고, 북한 지도자에 대해 장난스레 말하는 이들을 보며 한국이 세계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언제나 I'm from Korea (나는 한국에서 왔어)라고 말했던 나는 어느 순간 I'm from South Korea(나는 남한에서 왔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한국을 '남한'으로 인식하면서 한국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과 감각을 배워가고 있었다. 세계 속에서 나의 나라를 다시 보는 경험은 나와 한국을 이해하는 기회였다.



메모를 마치니, 보딩 표시가 안내판에 보였다. 탑승교로 이동하며 지난 한 달간 인도를 다시 떠올렸다. 한 달 넘게 인도에 머무르면서도 인도를 떠나는 지금조차 나는 여전히 인도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또한, 난 여전히 인도를 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분명하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인도를 통해 나를 알게 되었다. 기약 없이 인도와 작별하며 비행기에 올랐다. 나는 메모장을 가방에 넣었다. 나는 새로운 대륙인 서아시아를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데이지 (신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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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신예진(데이지)은 스스로 돈 벌어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어릴 적 꿈인 세계여행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이루었습니다.


브런치 외에 인스타그램, 블로그유튜브를 통해서도 관련 자세한 이야기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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