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지 버킷리스트 ⑤ 인도네시아 카와이젠 화산 블루파이어 보기
카와이젠 화산 속 활활 타오르는 블루파이어는 사진만으로도 내게 뜨거운 열기를 전달한다.
세계에서 단 두 곳에서만 볼 수 있는 블루파이어.
자연이 만들어낸 경이로운 순간을 품은 한 곳은 인도네시아다.
인도네시아 카와이젠 화산 블루파이어 보기
블루파이어만큼이나 세계를 향해 뜨겁게 타오르던 나의 열정은 카와이젠으로 나를 이끌었다.
다음 버킷리스트인 카와이젠 화산 등반을 준비하며
동행을 구하고자 여행자 커뮤니티에 글을 올리니, 한 친구에게서 연락이 왔다.
"데이지, 카와이젠 화산 가기 전에 대게 브로모 화산투어를 하기도 해.
나는 차가 있으니, 브로모 화산도 투어하고 같이 카와이젠으로 가는 거 어때?"
본인을 나팔이라 소개하는 그의 제안에 브로모 화산을 찾아보니, 아름다운 일출을 품고 있었다.
브로모 화산과 카와이젠 화산을 즐길 생각에 들뜬 마음은 이미 그에게 답장을 하고 있었다.
"좋아!"
"나팔 지금 무슨 일이야?"
매우 경직되어 보이는 나팔은 지도를 확인하며 걱정 어린 표정으로 운전자와 이야기한다.
새벽 12시부터 시작한 브로모 화산 투어에 나팔 얼굴에는 피로가 가득하다.
잠결에 눈을 뜨니 심상치 않은 분위기이다.
"길을 잃었어."
일출을 보는 포인트까지는 2시간가량 걸린다는 말에 바로 꿈나라로 빠진 나는
잠결에 눈뜨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이었다.
덜컹덜컹 껌껌한 어딘가로 달리는 지프차에 함께 몸을 실을 뿐이다.
'지금, 나만 앞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건가?'
안개 속에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도로 위.
달리는 차에서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이 맞는지 여러 번 눈을 비빈채 다시 바라본다.
껌껌한 어딘가를 향해 자동차는 계속 액셀을 밟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정적을 깨지 않는다.
정적을 감싼 건 오로지 사람들에게서 느껴지는 걱정뿐이다.
그런데, 길을 잃었다니, 지금 움직이는 우리는 어디로 이동하는 것인가.
"나팔, 우리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나도 모르고, 아무도 몰라. 운전자도 일단 앞으로 그냥 가는 거야."
잔뜩 긴장한 나팔을 바라보면서도
곧 해결될 거라는 안이한 생각은 아름다운 일출을 볼 기대로 변하며
나를 덮쳐온 피곤이란 파도에 다시 휩싸여 잠든다.
중간중간 깨고 일어나기를 반복하다 보니 장정 4시간이 넘었고,
산속을 헤집고 다닌 지프차는 한 곳에 정박해 어둠이 밝아지길 기다리기로 결정한다.
삼엄하게 깔린 안개는 황무지를 덮으며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지만,
산속을 헤매느라 예정되었던 일출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데이지, 이렇게 아름다운 일출을 우리가 못 본 거야."
브로모 홍보영상이 담은 일출을 보여주며 나팔은 말한다.
"그래도, 길을 잃었다는 신기한 경험을 했잖아!
안개 가득한 브로모도 기묘한 분위기가 좋은걸?"
시간이 지나며 날이 밝아오자 시야가 확보된 우리는 다시 여정을 향해 출발한다.
나팔을 위로하면서도 안개가 곧 걷힐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사진으로 봤던 거대한 브로모 화산의 위용을 예상하며 일출의 아쉬움을 달래지만, 두 번째 포인트에 도달할수록 펼쳐진 건, 가득한 안개뿐이다.
설상가상으로 비가 올락 말락 하는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우와! 안개가 가득해서 더 신비로워 보인다! 색다른 매력이 있네!"
아쉬움과 속상함이 내면에서 조금씩 피어나면서도
동시에 괜찮다고, 이것도 특별한 경험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하며 나팔에게 말한다.
"그래도, 왔으니 둘러봐보자!"
높은 고도에 올라와 쌀쌀한 기온과 함께 나팔과 나를 맞이한 건 안개뿐이지만,
우린 브로모 일대를 함께 걷는다.
새벽에 출발하여 차 안에서 잔뜩 긴장했던 나팔은 피곤함이 역력한 데다,
예상하지 못한 날씨에 브로모를 즐기지 못해 얼굴이 수척해 보인다.
"나팔! 이런 상황도 재밌지 않아?"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힘껏 나팔을 위로하고,
우리가 맞이한 상황에서 즐길 거리를 찾으며 나 스스로를 위로했다.
둘러보다가 지친 나팔은 말한다.
"데이지, 어딜 가나 똑같을 거 같아. 나는 피곤하니까 그냥 차 안에서 쉬고 있을게. 너는 더 둘러봐."
나팔과 헤어진 후,
홀로 산을 오르니 나팔을 위해 감추어둔 아쉬움이 튀어나왔다.
사진 너머로 본 브로모 화산의 일출을 못 본 것은 둘째 치고,
브로모 산의 장엄한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는 건 아쉬움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좌절하며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안개 낀 브로모가 더 특별하고 색다른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언제 또 인도네시아 산에서 길을 잃어봐!'
'안개 낀 산은 이런 모습이 있구나!'
바꾸지 못하는 환경에서 바꿀 수 있는 건 오로지 내 생각뿐이다.
나름 의미를 찾으며 산을 오르는데,
조금씩 걷히는 안개 사이로 굵고 탄력적인 브로모 능선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우와! 브로모야! 안녕!"
뜨겁게 솟구치는 브로모 분화구 소리는 내게 인사한다.
분화구 속 연기는 안개로 가득 찼던 내 속상함을 말끔히 씻어낸다.
굵직한 브로모의 장엄함은 내게 위로를 보내는 듯하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구나.'
안개로 가득한 순간에도 그 순간에서 찾을 수 있는 즐거움을 보고,
포기하지 않고 브로모를 즐기려 했다는 사실을 위로받는 느낌이 든다.
실망감은 살아있는 산의 호흡에 행복감으로 승화된다.
활화산의 생생함으로 튀어 오른 행복은 두 배가 되어 내 살갗을 스친다.
짙게 깔린 안개는 구름과 같이 브로모 운해가 되어 한층 짙게 매력을 더한다.
다시 오지 않을 이 순간을 더욱 음미한다.
브로모의 위엄찬 모습을 바라보며 돌아오고 나니,
지프차에 앉아 어땠는지 묻는 나팔에게 말한다.
"한국에는 '포기는 배추셀 때만 쓰는 말이다.'라는 표현이 있어"
"나팔! 안전상의 문제로 입장시간이 늦쳐졌대!"
브로모 화산을 마친 뒤, 카와이젠 투어를 위해 바뉴왕이로 넘어가며 나팔에게 말했다.
나의 버킷리스트인 블루파이어를 보려면 새벽 2시에 카와이젠 화산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발하는 블루파이어는 일출이 떠오르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입장시간이 4시부터로 변경되어 새벽 일찍 출발하지 못하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돼!"
카와이젠을 보는 것 자체로도 좋지만, 오랫동안 꿈꿔온 것은 카와이호 속 피어오르는 블루파이어였다.
입장시간에 시작해 재빠르게 오르는 방법,
몰래 입장시간 이전에 들어가는 방법 등
블루파이어를 보기 위한 다른 수단을 골똘히 떠올리지만,
아쉬움을 품고 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잔뜩 절망감에 휩싸인 나를 위해 나팔은 위로한다.
"데이지, 블루파이어는 보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름다운 카와이젠을 볼 수 있잖아!
어떤 상황이든 그 상황에 만족하면 돼."
"그렇지만 이건 내 오랜 버킷리스트였다고. 내가 여기 온 이유는 오로지 블루파이어 때문이었어."
풀이 죽어 실망한 기색이 역력한 나를 보며 나팔은 난감한 표정으로 운전을 계속한다.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며 문득 생각이 든다.
'어차피 보지 못하게 된 블루파이어인데,
지금 함께하는 나팔과의 이 소중한 시간까지 망칠 이유가 있나?'
생각은 이내 나팔에 대한 미안함으로 바뀐다.
"나팔 너의 말이 맞아. 지금 카와이젠 화산을 보러 간다는 사실이 얼마나 행복한 건데!
이번에 보지 못한 아쉬움을 갖고 다음에 또 보러 오라는 의미 같아!"
다음날, 이른 아침.
입장 시간에 맞추어 여유롭게 카와이젠 등반을 시작한다.
친절하게 펼쳐진 길 안내를 따라 산이 주는 상쾌함은 몸속 깊이 들이마신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 짓는 등산객,
내게 인사하며 말 거는 상인,
조금씩 황 냄새와 연기가 나는 순간,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산을 오르고 나니 카와이젠의 풍경이 펼쳐진다.
쉬지 않고 유황 가스를 뿜어내는 카와이젠 화산의 분화구는 인도네시아의 위엄을 드러낸다.
유독성 가스 위험을 무릎 쓴 인부들은 분화구로 내려가 노란빛의 황을 짊어지고 나온다.
유황을 지고 가는 노동자는 수십 킬로가 되는 유황을 어깨에 진 채 방긋 웃는다.
유황 가스를 뚫고 나온 샛노란 색의 유황처럼, 그들의 미소는 삶을 뚫고 샛노랗게 빛난다.
카와이젠의 호수는 매우 아름답게 고요하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찡찡거린 지난 나의 모습들이 하찮게 느껴질 정도이다.
놀랍도록 잔잔한 호수의 에메랄드 빛은 마치 물감을 풀어놓은 듯 청명하게 빛난다.
은은하게 지나가는 얇은 구름, 그 구름 사이로 살며시 반사되는 햇빛은 빗물로 이루어진 칼데라호의 극적 효과를 더해준다.
얇은 층의 구름 사이로 반사되는 햇빛은 부메랑 같은 모양으로 호수를 비춘다.
"나팔! 저기 블루파이어야!"
새벽에만 보이는 파란색의 반짝이는 블루파이어는 아니지만,
아름다운 칼데라호에서 반사되는 햇빛은 내게 블루파이어와 다름없다.
"그러네! 우리만의 블루파이어네!"
나팔은 그런 내 소망을 읽었는지 맞장구치며 아름다움을 맞이한다.
"너의 버킷리스트인 블루파이어야! 우리가 블루파이어를 봤어!"
나를 위해 말해주는 나팔에게 괜스레 고마움을 느끼며 나는 말한다.
"카와이젠 입장시간제한에 절망하는 나에게 네가 말했지.
주어진 상황에 만족하라고.
맞아. 내가 원하는 대로, 뜻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게 우리 삶인 거 같아.
브로모 화산에서 일출을 보지 못할 때
안개로 가득한 브로모의 첫인상을 남길 때
오래도록 원했던 블루파이어를 보지 못할 때처럼
실망도, 좌절도 하지.
그렇기에 인생이 더 재미있는 거 같아.
가고자 하는 길이 아닌 새로운 길을 가면서
이제껏 보지 못한 새로운 경험을 보기도 하잖아.
뜻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모여져 지금 이 순간이 되듯이 말이야.
언제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계획된 것의 기대보다 더 만족스러운 방향으로 갈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그 속에서 이 인생을,
나만의 길을 해나가고 싶어."
카와이젠 화산에서 블루파이어를 볼 상상으로 작성했던 시절,
예상하지 못한 일들의 연속이지만,
상상한 순간보다도 더 큰 배움을 얻으면서 카와이호수를 보며 나직이 말한다.
"지금까지의 것들에 감사합니다. 앞으로 올 모든 것을 긍정합니다."
브로모 화산 투어 / 카와이젠 화산 투어 영상으로 만나기
1. https://www.youtube.com/watch?v=zvnhGMC09B0&t=12s
2. https://www.youtube.com/watch?v=yXDP6RQ--3Y&t=331s
3. https://www.youtube.com/watch?v=3BYrvCbKENE
데이지 (신예진)
enjoydaisypath@gmail.com
@the_daisy_path : 인스타그램
https://blog.naver.com/daisy_path : 블로그
[나의 데이지]는 21살 신예진(데이지)이
1년 간 전 세계 45개국을 여행하며
어릴 적 꿈인 세계여행 버킷리스트 100가지를
이루는 여행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