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팅과 독서의 공통점
책읽는것을 좋아하여 틈이 생기면 가까이 두고 읽을려고 노력합니다만, 항상 해결하지 못했던 고민 중 하나가 읽었던 책을 어떻게 기억속에 오래 간직하냐 하는것이었습니다.
책의 내용을 기억하려고 마음을 쓸수록 자존감이 약해집니다. 왜냐하면 대부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면 '내가 혹시 바보 아닐까?' 하고 스스로를 의심하게 됩니다. 잊어버리는 것은 당연한데, 그걸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노답 상황' 아닐까요? 저 같으면 책이 읽기 싫어질 것 같아요. 읽으면 읽을수록 이런 마음이 커질 테니까요. 저는 이런 마음이 책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얻기 전에는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걱정하고, 이미 얻고 나서는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근심한다 - 논어
저는 책을 '사람'에 비유하는 걸 좋아합니다. 책은 사람만이 만들 수 있는 거니까 '책=사람'의 등치는 독서에 많은 영감을 줍니다. 만약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났다고 생각해 보세요. 소개팅 상황이 좋겠네요. 그 사람이 당신의 여기저기를 눈으로 훑어요. 마치 스캔하듯이. 상대의 시선이 몹시 불편합니다. 나도 그 사람이 나쁜 것이 아니라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는 않고 용기를 내서 물어봤죠. 왜 그렇게 나를 여기저기 훑어보냐고? 상대방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이 참 맘에 들었어요. 당신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제 기억에 새기는 중입니다.
여러분이라면 이런 사람과 에프터를 이어 나가시겠어요? 제 친구가 이런 경험을 했다면 당장 그만 만나라고 조언할 것 같아요. 하지만 당신이 혹시 책에게 이렇게 하고 있지 않나요?
아까 소개팅 상황으로 다시 가보겠습니다. 그 사람이 깎듯이 이렇게 질문하네요.
첫인상이 참 좋으세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메모지를 꺼내서 좀 적어도 될까요?
뭐라고 대답하시겠어요? '안돼요! 실례에요'하고 답하실 건가요?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심지어 양해를 구하기까지 하는데. 그렇다고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집중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가끔 종이에 끄적이는 것을 제외하고는 나에게 집중하면서 대화를 놓치지 않으니까요. '저 사람은 종이에 뭘 적을까?' 궁금도 합니다. 대화가 무르익고 좀 친근해졌을 때 용기를 내서 물었습니다. '무엇을 적으신 거에요?' 그는 쑥스러운 표정으로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당신이 참 맘에 들었어요. 그게 어떤 느낌이었는지 잊기 싫어서 생각나는 대로 적어봤어요.
종이에는 '웃을 때 갈매기 두 마리와 연못 두 개', '영화 보기 전에 원작은 잘 보지 않아요', '컵을 두 손으로 꼭 쥐고 마시는 모습이 기도하는 것 같다' 같은 시적인 표현이나 자신이 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이 사람과 만날 건지 아닌지는 당신의 선택이지만, 저는 책을 읽는다는 것이 이와 같다고 생각해요.
메모가 독서를 방해하지는 않았습니다. 책을 좀 느리게 읽을 뿐이죠. 느리게 읽기는 단점이라기보다는 장점이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알게 되겠죠. 어떤 문장, 그 문장의 느낌을 만약 종이에 간단히 표시해둔다면 더 이상 나의 기억력을 탓할 필요는 없죠. 이 사실만으로도 저는 독서가 매우 편안해졌어요.
책을 읽고 나서 남는 게 없다고요? 저는 메모가 남아 있어요. 메모에 제 마음을 담아서 최선을 다해 읽었기 때문에 틈나는 대로 메모를 다시 읽으면서 '그땐 그랬지?' 하고 웃을 수 있습니다. 어떤 책은 '메모를 안했으면 어쩔 뻔 했어?' 하며 안도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1. 내 기억력의 한계를 처음부터 인정하고 읽어야 한다.
2. 독서를 하면서 메모를 하는 일은 전혀 이상하지 않고 독서에 방해되지도 않는다.
3. 책을 빨리 읽어야겠다는 마음을 누르고 천천히 읽으려고 노력할 때 책은 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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