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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Apr 14. 2020

바이러스적인 혁명, 혁명적인 바이러스

<국가와 사회혁명>으로 혁명 바이러스에 맞선 인간 역사를 배우다

혁명적 상황과 혁명은 다르다


"코로나가 몰고 온 혁명적 변화"라고 했을 때 별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우리가 혁명이라는 말을 너무 남용하기 때문이다. 툭하면 혁명을 갖다 붙이니 혁명 인플레이션이라고 할 정도다. 혁명은 삶의 구조가 바뀐다는 것이다. 하지만 동물이 인간을 지배하는 건 아니니 변화의 한계가 있다. 혁이라는 글자는 가죽으로서 혁명은 가죽을 바꾼다는 말이니 전체 틀은 어느 정도 유지된 상태다.


코로나는 아직 위기 상황일 뿐이다. 위기 상황이 해결되지 않으면 혁명적 상황으로 번진다. 감기가 폐렴이 되는 것과 같다. 혁명적 상황으로 확대되면 호미로는 막을 수 없고 가래를 써야 한다. 코로나가 혁명이 된다는 것은 코로나의 메시지를 정확히 읽고 행동에 나서는 세력이 대중운동을 통해서 광범위한 지지를 확보하고 이제까지의 습관을 바꾸게 만든다는 것이다. 손씻기가 좋은 예다. 코로나 때문에 온국민이 손을 자주 씻자 다른 병도 예방돼 병원 경영이 몹시 어렵게 되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혁명은 이렇게 연렬고리가 매우 중요하다. 혁명은 가공품일 뿐 자연산은 될 수 없다.



인간세상의 혁명도 큰 테두리에서는 같다. 혁명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화학결합이 이루어져야 한다. 민(대중)과 혁명 세력이다. 인민과 혁명 세력은 '케미'를 이룰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적대적으로 결합하는 경우가 많다. 테다 스카치폴이 보기에 진정한 혁명 케미가 성사된 경우는 '중국'이 유일했다.


비교와 차이의 방법을 이용해 프랑스, 중국, 러시아의 혁명을 비교사학적 방법으로 고찰한 테다 스코치폴의 <국가와 사회혁명>


혁명의 바이러스적인 성격을 고찰한 테다 스카치폴


이번 주에 읽고 강의 들은 책은 테다 스카치폴의 <국가와 사회혁명>이다. 테다 스카치폴은 비교와 차이의 방법을 이용해 프랑스, 중국, 러시아의 혁명을 비교사적 방법으로 고찰했다. 비교사적 방법은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잘 알 수 있고 사회혁명의 일반화와 혁명의 발전과정에 대한 깊이 알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마르크스, 에밀 뒤르켐, 막스 베버 모두 비교역사적 방법을 사용했다.


스카치폴은 혁명의 국제적 성격을 밝힌다. 부제가 '혁명의 비교 연구'인데 혁명 당시 외부의 충격, 그리고 혁명 이후 주변국의 견제와 강요 등의 관계에 눈을 뜨게 되었다. 17세기부터 영국이 자본주의적 농업과 산업을 발전시킨 일련의 산업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을 이끌었다. 유럽 국가들에게는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전세계가 자본주의 산업화와 근대화로 체질변화를 하기 위해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뒤쳐지면 먹힌다. 스카치폴이 지적하듯 혁명과정을 거친 국가는 한결같이 부강해졌다.


'혁명은 바이러스처럼 찾아온다'고 말했을 때 '바이러스'라는 용어는 지배계급의 관점이 진하게 담겨 있다. 혁명은 인간의 사회구조 자체가 뒤집히는 일이므로 기존 구조를 누려 온 사람들에게는 사형 선고와 같다. 혁명은 누군가에게는 삶을 파탄낸 재난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구원일 수도 있다. 인간은 혁명 상태에서는 살 수 없으므로 반드시 사후 처리(뒷감당)가 되어야 할 것이고, 최종 승인이 필요하다. 최종 승인을 누가 어떻게 했느냐에 따라 혁명이 찻장 속의 태풍처럼 얌전하게 몰아치다 끝날 수도 있다. (예) 일본)


프랑스에서 왕정이 무너졌을 때 주변 왕국들이 받았을 충격은 어떠했을까? 왕과 귀족들은 물론 백성들에게도 큰 충격을 미쳤고 그것은 마치 바이러스처럼 강력하게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 혁명의 바이러스가 '창궐'할 것을 가장 두려워한 사람들은 이웃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지배계급들이었다. 그들은 국내의 혁명 지지파를 박해하는 한편 1792년 2월 프랑스에 맞서 싸우기 위한 동맹을 체결하였고 혁명 전쟁이 벌어졌다. 혁명이 전쟁을 불러올 수 없는 까닭은 혁명 자체가 지닌 강력한 바이러스의 속성 때문이었다. 중국의 춘추전국시대 당시 멸망한 나라가 주변국의 입김으로 다시 서기도 했는데(진(陳)나라, 송(宋)나라 등) 그것은 약소국을 병탄한 나라의 세력이 커질 것을 두려워한 주변국가에서 이 상황을 가만 놔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가 침범하면 인간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첫 번째 반응은 견딜 수 없는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서 박멸에 집착하고 전염이 커지지 않기 위해서 국경을 봉쇄하고 충격을 최소화하는 것이다. 코로나19에 대응하는 세계 대부분의 나라들이 이 방법을 채택하고 있다. 두 번째 반응은 다소 이상적일 수 있는데, 바이러스가 퍼진 근본적인 원인을 고찰하고 사회 전체가 바이러스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바이러스는 재발한다는 점에서 시간이 걸리지만 가장 근원적이고 확실한 대응 방법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방법을 쓰고 있는 나라는 아무 곳도 없다.



러시아와 중국을 똑같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학자들은 영국, 프랑스로 대표되는 서방 국가의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이라고 일컫고, 러시아와 중국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스카치폴의 비교사적 분석을 보면 두 혁명에 같은 이름을 붙이는 게 가능할까 싶다. 지난 번 베링턴 무어의 혁명 영화(아베 일본 총리가 쫓겨나지 않는 진짜 이유)에서는 영국이 주인공이었다면 스카치폴의 혁명 영화 주인공은 중국이다.


바이러스의 두 가지 대응으로 돌아가 퇴치와 박멸이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혁명을 처리한 첫 번째 방법은 러시아의 혁명과정이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중국의 혁명 방법이 이상적이라고는 볼 수 없지만 이상에 가깝게 다가가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진정성이 보인다고 할 수 있을까?


크림전쟁 이전까지 러시아는 세계 최강국처럼 보였다. 유럽 최신의 육해군 전술과 합리적 행정기술을 도입하였을 뿐만 아니라 귀족과 농민들은 황제에 종속돼 있었다. 하지만 1890년도부터 중공업분야에 대한 외국 자본의 투자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영국, 독일, 벨기에 등 유럽과 경제관계가 밀접해졌고 러일전쟁(1904) 패배 등 대외적인 상황이 악화되면서 권력 붕괴가 찾아왔다. 볼셰비끼는 농민의 지지를 얻어 왕정복고를 꿈꾸는 백군 세력을 물리치고 권력을 잡지만 스탈린은 농민을 무수히 희생하면서 중공업 발전에 올인한다. 농민들에게는 강력한 명령과 철통 같은 감시에 못이겨 식량배급소 직원으로 몰락했으니 농업생산량이 감소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차르 황제 체제에 비해서 사회이동이 자유로워진 것은 사실이지만 KGB 비밀경찰로 대표되는 감시와 명령, 그리고 1930년의 대숙청은 혁명의 최종 승인자가 최고 권력자였고 혁명의 과정이란 민족국가의 형성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줬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농민을 대규모로 희생하며 중공업에 집착한 결과 러시아는 독일의 맹공격을 막아내고 점령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의 결과에 대해서 쉽게 비판할 수 없는 까닭이다.



중국의 경우 '아편전쟁'으로 상징되는 구체제의 무능력이 서구 열강에 대한 무기력한 개항으로 이어졌다. 중국은 인구는 증가하는 데 농지개간은 한계가 있었고, 세수는 부족했으며, 18~19세기의 반란을 통제할 힘도 없었다. 재밌는 건 북경정부(왕조)가 현대식 교육으로 개혁을 시도하자 출세한 장교와 학생들이 입헌정부를 요구하며 압박을 해온 것이다. 청 제국은 입헌제를 받아들여 자살하는 대신 적들에게 타살당하는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청제국 멸망 과정에서 주전으로 뛰었던 신사계층과 군벌은 공산당과 국민당으로 교체당했다.


중국공산당은 농촌을 기반으로 하고 국민당은 도시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이다. 도시와 농촌의 전쟁에서 어떻게 농촌이 이길 수 있었을까? 좌파 지식인들이 바탕이 된 공산당은 농촌으로 들어가 신사계층을 제거하고 세력을 넓혀가지만 1927~8년 벌어진 숙청으로 공산당은 9/10가 제거되고 수천 명의 간부들이 학살당한다. 나는 혁명과정의 반혁명인 '1927~8년 숙청'이 중국 혁명의 성격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동료 90%를 잃고 힘겨운 재건작업을 시작한 공산당의 리더들은 뼈아픈 교훈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그들의 수행한 혁명의 성격을 잘 말해준다.


1. 군사력이 없으면 농민도 노동자도 엘리트의 열정도 무의미하다. 그래서 '홍군'을 조직했다.

2. 농민은 공산당이 진심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싸운다는 걸 신뢰할 때 목숨을 바칠 것이다. 그래서 농민과 한몸이 되었다. 


중국인은 뼛속까지 농민인 농경국가이기 때문에 농민을 핵심으로 한 중국 공산당의 선택은 적절했을지도 모른다. 중국이 무서운 까닭은 적들에게 잘 배운다는 것이다. 군사력 열세인 게릴라전은 진한제국을 괴롭혔던 흉노적의 전략이었고(물론 한신도 게릴라전을 썼지만) 군사력에 대한 자각 역시 국민당과 군벌에게 배운 것이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대륙에 어떤 강적이 쳐들어와도 홍군은 곳곳에 잠입해 있다가 역습을 해서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리고 그 실력은 한국전쟁 당시 유감없이 발휘되지 않았던가?


중국의 인민복을 입고 있는 지도자의 모습은 '평등주의'의 의지를 나타낸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평등주의는 한낱 사치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평등주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스카치폴은 1930년대 기준으로 중국의 최하수입과 최고수입 비율이 10:1이라고 분석했고 아무리 많아도 20:1 이상이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러시아는 29:1, 인도는 30:1, 미국은 50:1이다. 그리고 "지식인, 화이트칼라, 당관료들에게 정기적으로 육체노동에 참가할 것"이 요구되었다. 물론 당시도 '신의 아들'은 있었다. 대학원에서 함께 공부하는 중국 유학생 동료들에게 중국 혁명에서 비롯된 '평등주의'가 어느 정도 남아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중국에서는 남자들이 집안일을 많이 한다는 이야기는 여러 번 들었던 것 같다.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은 똑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지만 러시아는 '프롤레타리아 없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면 중국은 '프롤레타리아에게 성의표시를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진정한 혁명은 사랑의 바이러스와 같다


처음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면 코로나19는 혁명일까? 그렇지 않다. 혁명적 상황이라고도 할 수 없으며 '심각한 위기 상황'에 가깝다. 위기 상황이 혁명적으로 전개되어 내 삶의 고통을 날려 버리기를 기대한다면 중국 공산당의 사례를 기억하라. 열망만으로 혁명이 찾아온 적은 역사상 단 한 번도 없다.


만약 세상을 살아가면서 불합리한 점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증오할 것만이 아니라 이해하고 사랑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것을 증오하기만 한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증오의 대상이 되고 만다. 상처도 내 몸의 일부이며, 바이러스도 지구의 일부이다. 바이러스를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왜 이 시점에 이곳으로 찾아온 것인지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바이러스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판독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는 데이지를 사랑한 개츠비의 삶이 완전히 혁명적으로 바뀌는 이야기를 다뤘고, <집 잃은 개>는 공자와 논어에 대한 이야기로 스승과 제자의 세상에 대한 사랑 이야기다.


나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기에 사랑의 혁명적 속성을 이해한다. <위대한 개츠비>처럼 사랑에 빠진 남자에게선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다. 그 넘치는 사랑을 세상과 인민, 그리고 제자들에게 적립한 사람은 공자였다. 나는 공자를 연구한 사람으로서 공자가 인민을 사랑한 것은 알았다. 물론 그것은 귀족적인 사랑이었다. <국가와 사회혁명>으로 처음으로 알게 된 건 중국공산당과 마우쩌뚱의 인민에 대한 사랑이었다. 물론 그것 역시 오래된 이야기다. 그때의 중국 공산당과 지금의 중국 공산당이 같을 수는 없겠지.


나는 우연적인 혁명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우리의 삶을 자유롭게 하고 덜 고통스럽게 만드는 혁명에 관심이 깊다. 그것은 국민당의 대숙청처럼 아주 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일일 수도 있다. 시간의 그릇에 사랑과 이해를 차곡 차곡 쌓으면 한 세대가 지날 즈음 뿌렸던 씨앗이 자라나 힘을 합칠 수 있다.


내가 생각하는 혁명의 이상향을 공자와 중국 공산당이 아주 조금, 아주 짧게 보여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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