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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Apr 21. 2020

선출된 게 무슨 의미? 무의미한 명령이나 하는 주제에

23년째 저주에 빠진 대한민국 선거법을 꼬집은 <파리대왕>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 제안안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를 적용한 21대 총선 결과 ⓒ중앙일보 김진국의 퍼스펙티브


제주 JIBS 라디오 <김민경의 나우제주NOW JEJU>(제주시 101.5MHz, 서귀포시 98.5MHz)에서 매주 수요일 오전 10시30분에 <오승주의 탐貪나는 문학>에 고정 출연하기로 했다. 4월22일에 첫 방송을 한다. 사실 지난 번 제주mbc 라디오에서 독서 코너 진행할 때만 해도 야심차게 프리뷰(제주MBC 정오의 희망곡과 함께 읽는 위대한 개츠비)를 연재하기로 마음먹었다가 곧바로 하차를 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 뜻밖에 JIBS에서 러브콜이 와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쨌든 방송사를 달리해 프리뷰를 이어갈 수 있게 돼 감사한 마음이다.



23년째 파리대왕의 저주를 헤매는 한국 선거제도


1998년 김대중 대통령은 새로운 선거제도를 제안한다. 지역구 위주의 선거 제도(소선거구제)로는 유권자의 죽은 표를 양산하고 다당제의 권력 분산 효과를 보지 못하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반론은 '선거에 불리하기 때문'이었다. 자기 당의 득표율이 떨어지거나 상대 당의 득표율이 올라가는 상황이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선거제도 개정에 대한 논의가 여러 번 있었고 선거제도를 다듬어야 한다는 취지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바뀐 선거제도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공포를 극복하지 못했다. 나는 이 공포를 '잭의 유혹' 또는 '파리대왕의 저주'에 비유한다.


<파리대왕>은 윌리엄 골딩이 1954년에 발표하고 노벨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파리대왕>은 100년쯤 전에 인기를 얻었던 <산호섬>(1858)이라는 소설을 저격한 작품이다. <산호섬>은 열대의 한 섬에 도착한 소녀들이 해적과 식인종을 만나면서도 용기와 불굴의 정신으로 이를 극복하고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다. 서구 중심적이며 유치할 정도로 어설픈 윤리의식을 담고 있는 작품이었지만 꽤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특히 작품 속에 나온 대사가 압권이다.


우리는 영국 국민이며 영국 국민들은 무슨 일이든 잘 해결해


섬에 갇힌 영국 소년들이 힘을 합쳐 해적과 식인종들을 물리친다는 정치 팜플렛 같은 로버트 밸런타인의 <산호섬>


윌리엄 골딩은 <산호섬>과 비슷한 설정과 등장인물의 이름을 차용해 이를 저격하는 작품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극한 상황에서 인간 내면의 탐욕과 잔인성을 6~12세 소년들을 통해 낱낱이 풍자했다. 군사반란과 약탈, 학살, 파시즘 등 어린이들이 했다고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들이 섬에서 일어난다.


잭은 처음부터 왕이 되고 싶었지만 잘 생긴데다 등치도 좋고 아우라도 있는 데다 '소라'까지 가지고 있는 랠프에게 밀려서 2인자(사냥부대 대장)로 밀려나고 만다. 처음에는 계획대로 잘 되었다. 섬은 민주주의가 완전히 실현된 낙원으로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구조선은 오지 않고 고립과 공포가 밀려오면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잭은 멧돼지고기와 언론조작, 종교를 무기로 모든 어린이들을 자신의 부하로 만들어버린다. 최후의 시민이었던 두 사람 중 새끼돼지는 바위에 맞아 죽고 랠프는 토끼몰이를 당하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던 찰나에 어른이 나타나면서 기사회생한다.



미래 세대도 낡은 선거제도로 투표를 해야 할까?


나는 21대 총선 결과를 보면서 어른으로서 부끄러웠다. 어른들은 ‘잭의 유혹’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선거제도를 다듬어야 한다는 취지는 누구나 공감하지만 바뀐 선거제도 때문에 불이익을 받을 것이라는 공포는 끝내 극복되지 않았다. 힘들게 바뀐 준연동형 비례대표 제도도 위성 비례정당이라는 꼼수 때문에 퇴색되고 말았다. 23년째 선거제도를 바꾸지 못했다면 앞으로 바꾸리라는 보장이 있을까? 최악의 경우 30년이 지나 아이들이 유권자가 되었을 때도 지금의 선거 제도로 투표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가장 높은 확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리대왕>의 이야기처럼 인간의 이성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약하고 위태로우며, 내면의 본능은 태풍처럼 강하다. 미래통합당이 반면교사 역할을 훌륭히 하고 있지 않은가? 선거 결과가 불리할까봐 선거법 개정을 '노루발못뽑이'(일명 '빠루')까지 사용하며 막아섰고, 선거법 통과 후에는 미래한국당이라는 위성비례정당까지 만들어서 발버둥쳤지만 역사상 최소득표 신기록을 세웠다. 잭의 유혹에 빠졌다기보다는 시종일관 잭에게 끌려다닌 결과이다.


사실 잭의 유혹은 인간이 이겨내기는 무척 어렵다. 서로 협력하고 양보해서 하나의 강력한 힘을 만들어내야만 이길까말까한 강적이다. 23년 동안 이겨내지 못한 것은 이유가 다 있었다. 개인적으로 랠프와 잭의 대화 중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이 있었다. "난 대장이야. 선출된 대장이라구." 하는 랠프의 항변에 잭은 이렇게 응수한다.


선출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니? 아무 의미도 없는 명령이나 하는 주제에...



★ JIBS 라디오 김민경의 나우 제주 '탐나는 문학' 청취 안내


매주 수요일 오전10시30분 JIBS FM<김민경의 NOW JEJU> (제주시 101.5MHz, 서귀포시 98.5MHz)  많은 청취 부탁드립니다. 문자 참여(#1015. 짧은 문자 50원, 긴문자 100원)도 많이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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