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3.25 방송 <위대한 개츠비> 프리뷰 : 희망, 사랑, 여성
제주MBC라디오 정오의 희망곡(FM90.1(제주시), 102.9(서귀포시)에서 한 달에 문학 읽기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매월 2,4째주 수요일 오후 1시부터 30분 정도 생방송으로 진행하고 가끔 녹화방송도 한다. 지난 회차인 3월 11일 방송에서는 코로나19 특집으로 주제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다음 번에는 <페스트>를 읽으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작가님과 아나운서님이 이구동성으로 '아니오' 하고 말했다. 코로나19에 대해서는 청취자들이 더 전문적으로 아니까 '사랑 이야기'가 어떠냐고 역제안을 받았다. 그때 머릿속에서 떠오른 책이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였다. 방송 문화는 문자 문화와 확실히 달랐다. 많은 청취자들과 소통하는 방송 작가와 아나운서들은 감각이 살아 있는데 비해, 독서에 많은 시간을 쓰는 나의 감각은 무딜 수밖에 없었다. 이것을 배울 수 있는 나는 행운아다.
기왕 사랑 이야기를 하는 거라면 통속적이고 뻔한 사랑 이야기보다는 재미와 의미를 모두 담은 <위대한 개츠비>가 좋겠다. 작가님도 괜찮다고 하셨다.
<위대한 개츠비>는 삼각 관계라는 흔한 소재를 다뤘지만 풀어나가는 방식이 범상치 않다. 예컨대 데이지라는 갈팡질팡하는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오래된 권력(또는 올드머니)을 상징하는 톰 뷰캐넌과 새로운 권력(또는 뉴 머니)를 상징하는 개츠비가 격돌한다는 것은 정치와 역사를 사랑 이야기로 풀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19금이기는 하지만 웹툰과 영화로 소개된 <발광하는 현대사>도 비슷한 시도를 했었다.
희망, 평화, 아름다운, 명랑함, 천진난만함..
데이지꽃의 꽃말들을 보니 <위대한 개츠비>의 여주인공 데이지와 비슷한 면이 많았다. "빛나는 눈동자와 정열적으로 빛나는 입, 그 눈부신 광채로 그녀의 얼굴은 처연하면서도 사랑스러웠다"(21) 목소리는 또 어떤가? "흘러나오는 말 하나하나가 다시는 연주되지 않을 음정들의 배열 같았다"며 그녀의 목소리에는 잊기 힘든 흥분 같은 것이 실려 있다는 찬사는 마치 여신을 그려놓은 듯하다.
나는 '희망'이라는 꽃말이 <위대한 개츠비>의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희망'이라는 말은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철학자에게는 오히려 부정적인 의미다.
희망이란 미래나 과거 속에서 끄집어낸, 의심스러운 결말에 대한 감정에 불과하다 (스피노자)
<위대한 개츠비>의 인물들은 자신의 처지를 뛰어넘는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데이지는 속물적인 동부 귀족 톰 뷰캐넌이 역겨워 매혹적인 재력가 개츠비와의 사랑을 희망하고, 개츠비는 옛 애인 데이지와의 재회를 희망하며, 톰 뷰캐넌은 아내 말고 다른 여자를 지속적으로 희망하고, 윌슨 부인은 자동차정비공 남편이 지겨워 언젠가는 데이지를 밀어내고 톰 뷰캐넌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란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이 희망은 하나같이 휴지조각처럼 찢겨나간다. <위대한 개츠비>는 찢겨나간 희망들이 부풀어오르고 부서지는 이야기다.
우리가 희망을 가지고 사는 건 좋다. 하지만 희망에 인생을 걸거나 희망에 의존하는 건 무척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걸 <위대한 개츠비>는 경고한다.
데이지와 톰 뷰캐넌 부부는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다. 데이지와 개츠비는 서로를 사랑하는 것 같지만 스스로를 사랑할 뿐이다. 윌슨 부인은 톰 뷰캐넌의 지위를 사랑한다. 그의 정부라는 사실은 주변 사람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위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개츠비>의 인물들은 무엇을 사랑하는가? 데이지는 돈과 고급 의류, 사치를 사랑한다. 그리고 숨을 수 있는 배경과 편안한 삶을 사랑한다. 톰 뷰캐넌은 명문 가문의 영향력을 사랑하고, 데이지는 자신의 돈과 스스로를 사랑한다. 윌슨 부인은 자신의 허영을 사랑한다. 이들은 사랑해서는 안 될 것을 사랑하고, 사랑해야 할 것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뷰캐넌의 정부 윌슨 부인은 차에 치어 죽고, 데이지의 애인 개츠비는 윌슨 씨의 총에 맞아 죽고 난 후 데이지-뷰캐넌 부부는 식탁 위에 마주 앉아 에일을 곁들인 식사를 즐겼다. 둘 사이에는 아기도 한 명 있다.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부부관계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만 '사랑'에 관한 주제의식을 던져 준다. '짚신도 짝이 있다'는 속담처럼 사랑은 같은 수준 같은 처지에서 가장 안정적이다. 만약 개츠비처럼 자신의 계급을 뛰어넘어서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중요한 조건이 피요하다. 데이지도 모험과 희생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그럴 생각도 용기도 없다. 마치 한 손으로 박수를 치는 것처럼 허공을 때린 개츠비는 '위대하다'는 수식어만 얻고 사라져 버렸다.
<위대한 개츠비>에 등장하는 여성들은 놀고 마시고 즐긴다. 윌슨 부인은 남편의 자동차 정비소에서 보조 노릇을 하며 손님에게 의자를 가져다 준다. 데이지가 화자인 닉에게 중매를 서려고 했던 베이커는 골프 선수다. 데이지는 직업이 없다. 이 중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데이지다. 데이지가 하는 일이라곤 파티에 참석하며 노는 것이다.
황혼 무렵이면 데이지는 다시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그녀는 다시 하루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과 대여섯 번의 데이트를 계속하는 생활로 돌아왔으며, 새벽이 되면 침대 옆 바닥에서 구슬과 시폰이 달린 구겨진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채 시들어가는 난초 사이에서 졸고 있었다.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오랜 세월 동안 여성은 전리품처럼 다뤄져 왔다고 말했다. 남성이 번 돈으로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스러운 보석을 두르면서 아무런 생산적인 활동을 하지 않는 여성이야말로 남성의 진정한 명예를 상징한다. 데이지의 삶은 바로 이런 여성이다.
한계를 넘어서는 사랑이 이루어지려면 두 사람의 헌신이 필요하듯 남성이 만들어놓은 '타자화된 여성'의 저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헌신이 필요하다. 개츠비는 뷰캐넌에게 “당신 부인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데이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날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며 도전했지만 데이지는 타자화된 여성이라는 속박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낳는 순간에도 바람 피러 간 남편, 식사자리에서 정부의 전화를 받으러 나가는 남편을 보면 누구나 집안을 뛰쳐나와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데이지는 상식적인 판단과 건강한 감정보다 상류층의 안락한 일상생활에서 벗어난다는 사실이 더 두려웠던 것이다.
물론 개츠비와 데이지의 진정한 사랑이 완성되고, 건강한 여성의 삶을 일궈내는 건 이번 생에서는 어려울 것이다.하지만 우리가 바로 개츠비이며 데이지라면 이들의 어긋난 희망과 파멸에 이른 사랑 이야기는 분명 새겨들을 만하다. 심지어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 중국에도 개츠비는 있었으니까.
옛날 중국 제나라에 첫째 부인과 둘째 부인을 거느리고 사는 자가 있었다. 그는 외출했다 하면 반드시 술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돌아왔는데 아내가 누구와 식사를 했느냐고 물었더니 하나 같이 고귀한 사람들이었다. 두 부인은 아무래도 남편의 말이 의심스러워 미행을 해보기로 했다. 남편이 배불리 먹는 방법은 동쪽 성곽의 묘지에서 제사하는 곳에 가서 얻어먹는 것이었다. 둘째 부인은 집으로 와서 본 대로 말한 후 '남편이란 평생 우러러 바라보아야 할 사람인데 지금 저 모양이다'라며 서로 마당 한가운데에서 부둥겨 안고 울었다. 남편은 이런 사정도 모르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돌아와 두 부인에게 교만을 떨었다. - <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