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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Feb 19. 2023

오랜만에 미괄식 소설을 읽었다 : <아버지의 해방일지>







용두사미 작품이 대세가 된 요즘



나는 수많은 선생님들로부터 두괄식으로 쓰라고 배웠고 나 또한 두괄식으로 쓰도록 가르쳤다. 수많은 정보와 생산 속도에 익숙한 요즘에는 첫 페이지, 아니 처음 몇 문장에서 승부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첫눈에 독자를 사로잡는 작품을 권장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용두사미 식의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다. 처음 몇 장면에 모든 힘을 쓴 것 같은 작품은 당연히 오버 페이스에 걸려들어 부실한 결말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나는 두괄식 작품 대신 미괄식 작품을 신뢰하게 되었다. 세대에 걸쳐서 살아남은 문학 고전은 미괄식이 많다. 빌드업 과정은 다소 지루할 수 있지만 뿌려진 떡밥들은 가지런하게 결론을 향해 있다.(이 경우는 '떡밥 회수'가 아니라 '떡밥 수렴'이라고 보아야 한다. 떡밥들이 나름대로의 비중과 의미를 가지고 결론에 수렴되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첫 50쪽(또는 첫 100쪽)에 대한 의미가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 두괄식(또는 용두사미 식) 작품은 첫 50쪽이 흥미롭지만, 미괄식 작품은 첫 50쪽은 지루하고 힘들지만 인사하는 공간 또는 빌드업하는 공간이라고 감안한다. 요즘 대세인 드라마 <카지노>가 바로 빌드업에 충실한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시나리오 공부하는 사람들은 <카지노>를 보면서 많이 배운다고 한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첫 50쪽이 힘든 작품이다. 사회주의자, 빨치산이라는 현실과 불화하는(또는 현실에 부적응하는) 낯선 존재와 독자가 공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전체적인 플롯은 단순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상가집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 그리고 그들과 아버지가 어우러진 이야기가 끌고 가는 구조이다. 어떻게 보면 『돈키호테』와도 비슷한 면이 있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돈키호테이고 어머니는 산초 판사와 비슷하다.


자네, 지리산서 멋을 뮈해 목심을 걸었능가? 민중을 위해서 아니었능가? 저이가 바로 자네가 목숨 걸고 지킬라 했던 민중이여, 민중!
『아버지의 해방일지』

벼룩을 잔뜩 몰고 온 방물장수 여자에게 방 하나를 통 크게 내주고 푸념하는 아내에게 아버지가 사회주의자, 혁명 운운하는 모습이 작가가 보기에는 어이가 없었지만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그게 통한다는 사실이었다. 어머니는 '꼬리를 내리다 못해 죄의식에 얼굴을 붉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사상을 가지고 살고 있을까?


우리나라처럼 극우 반공주의가 오랫 동안 주류였던 사회에서는 사회주의자의 '사회' 자만 나와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기 십상이다. '사회적 기업', '사회적 협동조합'조차도 빨갱이 바라보듯 했했기에 이명박 정부가 되어서야 사회적 협동조합에 관한 조례가 통과되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한 사람의 평생에 걸친 사회주의 실천과 책 한 권이라는 시간 동안 사회주의와 사회주의자에 대해서 경험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은 고정관념과 사회주의 알레르기를 씻어내는 시간이면서 사회주의에 대해서, 나아가 '사상'에 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이념과 사상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학살을 경험했고, 연좌제가 엄존했던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사상'은 마치 고어(古語) 또는 사어(死語) 같은 취급을 당해 왔다. 하지만 사상 없는 사람은 없으며, 사상 없이는 행동이 나올 수 없다. 누구 것을 베끼든 영향을 받든 행동은 사상을 근거로 한다.


내가 볼 때 사상은 '좋은 삶'을 상상하는 것이다. 생존하는 것과 좋은 삶을 사는 것이 충돌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생존에 대한 욕구를 이길 수가 없다. 전략차가 너무나 압도적이다. 생존에 대한 압박이 커질수록 좋은 삶에 대한 욕구는 박멸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아버지의 해방일지』의 아버지는 좋은 삶을 사수하기 위해서 생존의 압박을 힘겹게 이겨냈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좋은 삶 실천 과정에서 아버지의 온기를 받았던 사람들이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아름답게 수놓았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장례식'이라는 장치다. 장례는 가족이 주최하는 행사다. 가족 전통에서 필수적인 체계이지만 '사회주의자의 장례식'은 가족 제도와 장례 제도, 온갖 전통적인 관계의 모순이 폭발하는 뇌관처럼 작동한다.


느그 아배는 살아서도 혈육 등지고 동무들 찾아가등만 죽어서도 동무들이 먼첨이라냐!
『아버지의 해방일지』


아버지가 빨치산이 됨으로써 집안은 몰락하고 모든 가족들의 앞길은 올스톱이 될 수밖에 없었던 비통한 사연의 최대 피해자였던 작은 아버지의 외침은 그 시간의 무게감이 있기에 울림이 더 크다. 전도유망했던 작은 아버지의 팔자가 아버지로 인해서 나락으로 떨어졌고 평생을 술에 의존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야기는 애처롭다. 하지만 애처로운 만큼 아버지의 평생 실천이 더욱 돋보인다. 물론 가족을 사회주의 제단에 제물로 바친 아버지의 행동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매일 고민하는 것은 생존 기계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것이고, 나아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한 방법을 구하는 일이다. 작가의 아버지는 좋은 삶을 완성한 사람으로서 조그만 영광과 자랑스러움, 그리고 거대한 원망을 남겼다. 좋은 삶을 추구하는 사례의 극단으로서 손색이 없다. 양극단에 점을 찍으면 나의 위치가 보이기 때문에 좋다. 좋지 않은 사회에서 좋은 삶은 언제나 손해를 보지만, 바위에 계란을 던지듯 좋은 삶의 도전을 이어가지 않으면 사회는 더욱 나빠지기만 할 뿐이다. 좋은 사회는 좋은 삶의 실천이 쌓일 때 가능하다면 선택권은 나에게 있는 셈이다. 좋지 않은 사회에 편승한 삶을 살 것인지, 가시밭길을 가더라도 좋은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인지. 참 어려운 선택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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