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오언저자G. D. H. 콜출판칼폴라니사회경제연구소발매2017.02.10.
경제학에서 어린이 교육까지 이어지는 다리
내가 어떻게 해서 『로버트 오언』을 읽게 되었는지 설명을 먼저 해야 할 것 같다. 학교 시절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에 빠져 지내다가 군 입대와 함께 서울 생활이 시작되었다. 2007년에 우연히 발을 들여놓게 된 언론시민운동을 2010년까지 하면서 '경제학'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밀려왔다. 나의 경제학 공부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마르크스 자본론을 읽는 세미나 그룹도 기웃거려 보았고, 장하준의 책도 열심히 읽었고, 폴 크루그먼 같은 외국 경제학자들의 책도 읽었다. 그러다가 읽게 된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과 홍기빈 선생의 여러 책들. 내 마음 깊은 곳에서 경제학을 읽어야겠다는 이유가 밝혀진 것 같아서 속이 시원했다. 경제학이란 사회학의 일부이며, 지금은 전체가 되려고 한다. 인간은 사회적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회가 어떻게 구성되었는지 이해해야 하고, 특히 사람들의 생존이 달려 있는 경제활동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맥락을 알아야 정치와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신문도 경제신문을 또는 경제면을 챙겨봐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삶이 먹고사는 문제 또는 경제로 함축돼 있으며 한 번 함축된 형식(경제)는 좀처럼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면에서는 태풍이 일어나도 경제면에서는 안정된 흐름이 존재하므로 두 흐름을 번갈아 보아야 관찰할 수 있는 현상이 있다. 그런데 왜 로버트 오언이라는 거지?
칼 폴라니가 "인간은 왜 이런 고통(세계대전, 혁명, 반혁명 등 세계의 혼란)을 당해야 하는가?"라는 당대의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쓴 책이 『거대한 전환』이다. 『로버트 오언』은 칼 폴라니에게 조망점을 제공해준 선구자였다. 로버트 오언을 근거로 삼은 다음에야 폴라니는 자신의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거대한 전환』의 번역자인 홍기빈 선생이 팟캐스트에서 한 말이다. 그런데 왜 어린이일까? 로버트 오언이 어린이를 말하게 된 과정은 깊은 뜻이 있다. 나도 처음에는 어린이와 가족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내가 배운 철학자들의 생각을 종잣돈으로 세상을 바꾸고 썩은 정치를 치우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뿌리로 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게 바로 어린이와 가족이었다.
공장 노동자들 중에는 성인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구빈법 행정 당국은 구호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불행한 빈민 아동들을 떼로 엮어서 고맙게도 그들을 받아들이겠다는 공장 소유주가 있다면 누구에게든 파견하는 관습이 있었다.. (중략)..보통의 고용주들로서 볼 때에는 갈 곳 없는 영세민 자녀들이야말로 산업의 원료로 쓰기에 최상의 자재였다.
『로버트 오언』
로버트 오언은 사회 혁신가였다. 산업혁명은1760년~1830년대 영국에서의 공장제도에 기반한 일련의 경제적 격변 가리키지만 '산업혁명'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19세기가 거의 끝날 즈음이다. 그러니까 100년간 산업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던 사람들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 하지만 로버트 오언은 본능적으로 그것을 알았다. 산업혁명과 공장이라는 맷돌 안으로 사람들과 모든 사회가 빨려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안전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협동조합과 협동촌을 만들었고,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동교육과 보육제도를 창안했다. 로버트 오언에게는 아동교육과 보육이야말로 사회 혁신의 첫단추였던 셈이다.
오언 덕분에 어른들은 어린이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알았다
우리는 어린이를 꿈나무, 미래의 기둥 같은 말로 찬양하지만 실질적으로 어린이의 권익을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을까? 18세기 영국 어른들은 영세민의 자녀들을 '최고의 산업 원료이자 자재'로 이해했다. 쓰다 버리면 그뿐인 것이다. 200년이 지난 지금 대한민국에서 비정규직이나 아르바이트생, 청년, 실습 청소년, 이주노동자 등을 쓰다 버리는 자재로 생각하는 것과 같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해 수준이 200년 전 영국이라고 생각하니 까마득하다. 그렇다면 어린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진짜 실질적이 미래를 위해서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라는 말인가? 오언의 다음 구절을 보면서 나는 눈이 확 트였다. 그리고 내가 어린이와 청소년들과 함께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졌다.
다 자라지도 못한 아이들을 일터로 보내 한 푼이라도 더 우려내려는 부모들은 그 아이들이 미래에 벌어들일 수 있는 소득을 날려버리는 셈이며, 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미래에 향유해야 할 건강, 안락, 좋은 품행 등도 모두 희생시키고 있는 것이다.
『로버트 오언』
『로버트 오언』에는 어린이에 대한 성찰을 도와주는 대목이 매우 많다. 어린이에 대한 오언의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내가 얼마나 어린이에 대해서 무지했는지 얼굴이 붉어진다. 바로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이에 대한 무지를 자각하고, 부모이자 교사인 내가 무지에 근거한 어리석은 행동들을 아이들에게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이야말로 로버트 오언이 '어린이들의 하느님'이라고 불릴 만한 위대함이 있다. 그의 생각을 읽은 200년 뒤의 어떤 사람이 아이들에게 하는 행동을 변화시켰기 때문이다.
로버트 오언은 1771년에 태어나 1858년에 죽었다.그러니까 산업혁명(1760년~1830년대) 기간과 완전히 겹친다. 산업혁명이 언제부터 언제까지라고 정확히 말할 수 없고, 시작점으로 잡은 시기의 이전에 이미 징후들이 있었다는 점을 본다면 오언의 생애 전체가 산업혁명의 태풍의 눈과 겹친다. 어렸을 적에 보았던 비참한 추억과 마구 늘어나는 빈민과 그늘의 자녀, 그리고 이 문제에 무지한 당시의 지식인들. 오언은 안팎의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온갖 조롱에 시달렸다.
나는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라는 책에서 소파 방정환 선생과 로버트 오언을 비교했다. 소파 방정환 선생은 당시 조선의 어른들이 자녀들을 너무 쉽게 때리고 함부로 하니까 어린이에게 '하느님'의 신성성을 부여해서 함부로 하지 못하게 했다.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어린이에 대한 인식을 높여 주었던 것만으로도 위대하다고 할 수 있지만, 로버트 오언은 어린이들을 공장에서 구해서 적절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해주었으니 비교할 바는 못 된다.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로버트 오언이 "어린이의, 어린이에 의한, 어린이를 위한" 사상을 주장한 건 아니라는 점이다. 어린이가 사회혁신의 첫단추이기 때문에 중시한 것이다. 사회 전체의 관점에서 어린이를 보았을 때 비로소 어린이에 대한 이해가 완성된다. 좀 슬픈 이야기이지만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에서 기존의 주류 과학자들이 죽은 이후에야 새로운 과학이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와 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과 불합리함을 일거에 버릴 수는 없다. 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합리적인 사고방식에 의거한 교육, 민주적인 교우 관계, 자기와 다른 생각에 대한 열린 마음과 자유로운 토론 습관 등을 가르친다면 우리 세대의 슬픈 조건들이 다음 세대에는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나는 이 희망을 가지고 어린이와 어머니, 가족들,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다. 그리고 생각을 이 정도까지 정리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로버트 오언에게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