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은 나쓰메 소세키를 탐독했던 해여서 잊을 수가 없다. 3월부터 <마음>을 읽은 이래 11월의 마지막 날에 <명암>을 읽었으니까. 그 전까지는 나쓰메 소세키 작품을 한 편도 읽지 않았다. 처음에 <마음>을 읽었을 때는 별로 와닿지 않았다. 그냥 그저 그런 심리극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 대상의 문학고전 강의를 준비하면서 <마음>을 다시 하 번 깊이 읽으면서 나는 완전히 매료되고 말았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중에서 <명암>이 가장 읽기 힘들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일주일 안에 다 읽었지만 <명암>만은 두 달을 꽉 채웠다. 중간에 다른 책은 거의 안 읽었다. 분주한 일이 많았기도 했지만, 내 몸이 천천히 읽기를 원했다고 할까? 나는 동양철학을 즐겨 접한 까닭에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 숨어 있는 동양사상을 꺼내 읽는 맛이 있었다.
동양사상에 기대어 <명암>을 말하자면, 명은 곧 암이고 암은 곧 명이다. 그리고 명이 가득 차면 암이 되고 암이 가득 차면 명이 된다. 낮밤이 바뀌는 것과 같다. <명암>은 처음에는 낮인 줄 알았던 인물이 밤이 되어 있고, 밤처럼 어두운 인물이 환한 낮처럼 드러난다. 낮밤이 바뀌도록 찬찬히 산책할 때 몸이 느끼는 반응처럼 소설을 읽게 된다. 이 글에서는 명과 암, 그리고 암과 명의 관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나쓰메 소세키의 유작 《명암》을 다 읽고 나서 처음 떠오른 책은 <암흑의 핵심>이었다. 이 작품의 겉은 암흑의 핵심인 미지의 영토, 콩고 밀림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지만 정작 암흑은 바로 백인들의 하얀 얼굴에서 흘러나왔다. <암흑의 핵심>과 <명암>은 묘하게 닮아 있다.
나쓰메 소세키에서는 좀처럼 다루지 않는 비열한 주인공 쓰다는 겉으로 봐서는 비열함이 보이지 않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위선과 바닥이 금방 드러나는 인물이다. 이걸 들켰기 때문에 기요코에게 버림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쓰다의 비열한 친구인 고바야시는 겉으로 보이는 노골적인 비열함을 조금만 겉어내면 순수하고 인간미 넘치는 특성이 풍요로운 농촌처럼 펼쳐진 인물이다. 쓰다가 무의식적으로 돈을 주고 자주 만난 이유도 아마 샘물을 찾는 사슴의 습관 같은 성질이라고 읽었다. 고바야시가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던 까닭은 밑바닥에서 온갖 사람들을 겪어보았고, 일본 사회의 구조와 모순을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쓰다로 대표되는 상류사회의 밝음은 고바야시라는 렌즈로 비추는 순간 어둠으로 바뀌고, 고바야시로 대표되는 하류사회의 어둠은 쓰다와 말을 섞으면서 빛을 뽐낸다. 그래서 명과 암은 동시에 암과 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미완의 유작에 감히 연장선을 그어 본다면 어두운 장면에서 끝날 것 같다. 쓰다와 주변인물 등 상류층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완전히 암이 다시 시작되는 곳에서 끝나야 함이 옳다. 쓰다의 어둠이 낮처럼 드러나고 아내 오노부도 계절의 영향을 피하진 못했을 것이다. 아버지에게도 아내에게도 귀부인에게도 형제들에게도 버림받은 쓰다가 고바야시가 있는 조선으로 가는 밤열차 어디쯤에서 끝나리라고 상상해보니 소설의 잔향과 잔재미가 점멸등처럼 깜빡거린다. 신호를 놓친 나는 황단보도에 혼자 선 채 다음 보행자신호와 같이 건널 사람들을 기다린다.
<명암>이 미완성 유작으로 끝났기 때문에 그 뒤의 이야기에 대한 아쉬움이 일본인에게 엄청 많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폐에 새겨질 정도로 국민 작가의 마지막 작품의 마지막 이야기가 빈칸으로 있다는 것이니까. 그래서 뒷부분을 채우는 이야기가 유행하기도 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상의 경험을 스릴러로 만들 줄 아는 작가여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