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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Mar 17. 2023

카프카가 주인공을 죽이지 않은 유일한 장편소설





실종자저자프란츠 카프카출판솔발매2017.05.25.


나는 '실종'이라는 의미를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거의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왜 실종인지 나온다. 그래서 '아메리카가 낫지 않나?'고 생각했다. 나쓰메 소세키 <마음>의 주인공처럼 나도 소설책 읽기 전에 마지막 페이지를 스윽 보는 습관이 있는데 거기서 본 문장 때문에 읽는 내내 제목 가지고 불평을 했다.


그들은 밤낮 기차를 탔다. 카알은 이제야 비로소 미국의 크기를 알게 되었다
『실종자』


카알은 독일에서 어떤 여자를 임신시켰다. 화가 난 아버지는 카알을 아메리카로 보내 버린다. 아메리카로 쫓겨난 김에 아메리칸 드림을 한 번 좇아보려고 희망찬 발걸음으로 삼촌을 찾아간다. 삼촌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이다. 삼촌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이유가 압권인데, 말을 잘 들었기 때문이다. 삼촌은 카알에게도 말만 잘 듣는다면 삼촌보다 더 성공할 수 있다고 격려한다. 삼촌은 처음에는 열의를 다 해서 카알을 교육시켰다. 피아노 교육까지 시켰으니 디테일도 있었다. 삼촌은 자신의 사업을 조카에게 물려줄 생각도 했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계획까지 세워두고 있었다. 하지만 카알이 삼촌의 지시를 어기고 여자를 만나고 외박을 한다. 카프카의 소설 세계에서 개인행동은 사형감이다. 삼촌은 카알에 대한 모든 호의를 철회했을 뿐만 아니라 카알을 아예 내쫓아버린다. 여기서부터 실종자의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카프카의 소설답게 카알은 아래로 아래로 추락한다. 바닥을 찍었다고 생각하면 거기가 지하1층이고, 여기가 바닥이라고 생각하면 또 지하2층이 있는 식으로 추락한다. 추락의 끝은 죽음이 당연한데 카알은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카알이 죽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아직'이라는 말이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그리고 '아직'은 영원히 '아직'인 채로다. 카알이 죽지 않은 이유 또한 카프카스럽다.


카프카의 일기에서 '실종자'라는 제목이 나오기 전까지는 아메리카가 대세였다고 한다. 나에게는 서울이 그랬다. 평생 제주도에만 살다가 군 군 입대와 함께 서울(정확히 말하면 수도권) 생활을 할 때는 몰랐다. 전역과 함께 서울, 인천, 수원 등에서 살면서 서울의 크기를 비로소 알았다. 나의 어떤 부분도 분명히 실종되었을 것이다. 나는 다만 제주도 쫓겨나기 전에 제주로 질주했다는 점에서 <실종자>의 주인공 카알과 달랐다. 누군가 나를 절벽 아래로 밀기 직전에 스스로 점프한다고나 할까? 나에게서 허세를 빼면 『실종자』의 주인공이 된다.


변신의 그레고르 잠자도 죽었고, 소송의 K도 죽었고, <성>의 주인공도 죽는다는데 카알은 죽지 않았다니. 이것도 일기에 적혀 있다고 하는데, 카프카는 카알이 죽을 것이라고 썼다. <실종자>가 미완으로 끝났기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 있는 건데, 그렇다면 그건 더욱 곤란한 일이다. 독일 동화 <유령선>의 선장처럼 "영원히 죽지도 그렇다고 살지도 못하는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닌가. 카알의 머리에 흙을 뿌려줄 이는 누구인가? (동화 유령선에서는 주인공이 선장의 시체를 널빤지채로 뜯어 육지에 뉘고 이마에 모래를 부으면서 저주가 풀린다) 독재자 아버지와 방관자 어머니의 원체험이 가장 강하게 녹아 있어서 카프카의 자전소설에 가장 가까워 보이는 <실종자>의 주인공 카알이야말로 가장 저주받은 인물이 아닐까. 그래서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이다. 솔 출판사의 2017년 개정판은 2000년판에서 커버만 교체한 것 같다. 만약 구판이 있다면 굳이 신판을 살 필요는 없다.


카프카의 『아메리카』 여러 나라 표지를 보는 것도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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