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돈중학교에서 그림책으로 토론 게임 수업을 3년째 하고 있다. 언제나 믿고 불러주셔서 고맙다. 모든 시험이 끝난 중3 학생들이라 자는 학생도 많고 느슨한 분위기였지만 귀멸의 칼날과 진격의 거인 덕후 기질을 발휘해 수업을 이끌었다.
수업 주제인 공동체의식과 세계 시민에 걸맞는 딜레마 상황이었다. 토끼는 숲의 주인임을 당당하게 주장하고자 하나 사냥꾼들과 맹수 무리들이 약한 동물을 사냥해도 된다는 안건을 다수결로 통과시키면서 약한 동물들이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토끼는 숲의 주인임을 주장하다가 귀에 총을 맞았고, 다람쥐는 이제는 숲의 주인이 아니므로 몸을 보존하기 위해서 어두운 곳이나 후미지고 구석진 곳을 몰래 다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학생들은 치열하게 토론했다. 평화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투쟁은 불가피하고 투쟁 과정에서 부상 당한 토끼처럼 희생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반대 모둠에서는 대가를 치르거나 노력하더라도 평화를 누리기 어렵고 오히려 자유가 더욱 위축될 수 있다고 맞섰다. 현대사를 보더라도 이런 경우는 많았다. 제주 4.3의 경우도 부당한 권력의 억압과 고문 치사 등에 항의하다가 조직을 결성하고 맞서다가 무고한 사람들이 무수히 학살당하면서 저항 자체가 저주의 대상이 되고 침묵을 강요받았던 역사를 생각한다면 평화를 위해서 투쟁한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대가를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실존적 고민'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평화와 자유를 위해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은 이상론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용감하지 못하고 영웅도 아니기 때문에 토끼처럼 들고일어설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나의 양심이 주는 형벌이 고통스럽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노력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제강점기 당시 친일파 중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댄 분들도 있었는데, 그 분들은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겉으로는 친일파 입장을 취했지만 양심에 따라 나름대로의 실천을 한 것이었다. 이야기의 방향이 '실존적 고민'이라고 생각해서 튀어나온 말인데, 그 말이 어떤 학생에게는 인상적이었던 것 같다.
새로운 말을 배워서 좋았어요. 그 말이 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나는 그게 실존적 고민이냐고 물었고, 그 학생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토끼와 다람쥐 사이에 존재하는 무수한 스펙트럼 사이에 설 수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커다란 행복감을 느꼈다. 실존적 고민을 이렇게 이해시킬 수 있다니. 상상하지도 못한 진전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