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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Dec 12. 2017

좋아하는 작가를 나의 일부분으로 만드는 방법

어느 누구보다 더 가까이 작가에게 다가가는 방법

독서하면서 문득문득 느끼는 기시감


"세상 아래 새로운 게 없다"는 말을 참 좋아한다. 논어의 "술이부작(述而不作 : 듣고 배운 걸 전할 뿐 새로 창작하지 않는다)"이라는 말도 같다. 다양한 관점에서 곱씹을 게 많다. 위대한 작가의 위대한 생각도 새로울 게 없다면 위대한 작가와 나도 비슷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읽었을 때 처음에는 그 위대함에 눈이 부시지만, 읽기를 계속하면 위대함은 어느새 친숙함으로 바뀌고 나 자신과 포개지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


대학 시절 박노해 시인을 좋아했다. <노동의 새벽>에 나오는 시를 얼마나 많이 베껴 적었는지 모른다. 특히 시인의 시는 쉬웠고 눈에 잘 그려져서 좋았다.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책은 놀라울 정도로 내 생각과 일치했다. 작가가 꼭 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형도의 시는 어떤가? 대학 시절의 감정을 가득 채웠던 그 글들은 징검다리처럼 여기까지 나를 건너오게 해주었다. 대학 시절이었으면서도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기형도 시인의 '노인들'이라는 시는 언제 어디서나 환기시키는 상황들 때문에도 잊지 못한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기형도 시 '노인들')


엄마가 4박5일 동안 집을 비웠을 때 세 살배기였던 둘째는 엄마를 찾아서 울었다. 옹알이에서 겨우 벗어난 아이가 그리움을 알겠는가, 외로움을 알겠는가. 나는 그의 입이 되어 앵무새처럼 재잘거렸다.


엄마 보고 싶어. 엄마 없으니까 엄청 보고 싶지. 하늘만큼 보고 싶어. (손가락 두 개 펼치며) 이만큼 보고 싶어? 엄마한테 전화해볼까? 엄마 전화 안 받네. 문자 보낼게. 엄마도 민서 보고 싶대. 빨리 교육 끝내고 와서 맛난 거 먹자고 하네. 엄마 오면 뭐 하고 싶어?


아이 옆에서 한 시간은 떠들었을까? 아이가 나에게 안기며 편안히 잠이 든다. 다음 날부터는 엄마 보고 싶다고 울지는 않았다. 아이의 감정을 내가 다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의 '말하는 책'이 되었던 것이다. 아이는 귀로, 눈으로, 표정으로 나를 '독서'했다. 이렇게 아이는 자신의 감정에 맞는 언어 옷을 찾았을 때 평화를 찾는다. 작가는 나와 같다. 다만 작가는 언어를 찾은 것이고, 나는 아직 내 언어를 찾지 못했을 따름이다.





"이 작가는 나잖아?!"라고 느끼는 순간 메모 독서는 무르익는다


위대한 작가들은 나의 일부분을 이룬다. 위대한 작가들은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 갔지만, 그들은 나, 즉 '미래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썼기 때문이다. 내가 그를 읽음으로써 위대한 작가들은 생을 이어가고, 내가 그의 말을 메모하고 공감하고 나의 생각으로 만듦으로써 위대한 작가들은 새로운 생명을 얻고 움직일 수 있다.


내가 메모하는 작가 중에서 유난히 자주 등장하는 작가가 있다. 그 사람이 만들어낸 인물이나 문장들은 다른 것에 비해서 유난히 나를 떨게 하고, 한 입 베어 문 카라멜처 심장에 이빨 자국이 생긴 듯하다. 이런 경험은 메모의 양이 어느 정도 찼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책 한 권을 읽었을 때 "이것은 나야!"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생각을 반대하는 논거들이 너울처럼 밀려드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적어도 여러 시간이 더 경과한 후에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때 살인자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열병을 앓고 있었다. 공작은 꼼짝 않고 조용히 옆에 앉아서, 환자의 비명과 헛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떨리는 손을 황급히 뻗어 그의 머리와 뺨을 어루만져 달래 주듯이 쓰다듬었다. 하지만 공작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고, 방으로 들어와 그를 에워싼 사람들도 알아보지 못했다. 만약 슈나이더 교수가 스위스로부터 나타나 예전의 제자이자 환자인 공작을 지금 본다면, 치료차 스위스에 처음 도착했던 공작의 상태를 기억해 내곤, 손을 내저으면서 마치 그 당시처럼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백치!>
- 도스또예프스끼 장편소설 『백치』마지막 장면
 

도스또예프스끼 후기 장편들을 대부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메모도 많이 남겼다. 위 장면은 '백치'라는 장편을 읽었을 때 너무 강렬하게 남은 나머지 다른 스토리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다. 자신의 연적(戀敵)이자 친구인 로고진이 애인을 죽이고, 애인이 죽은 방에 주인공 미쉬낀 공작을 초대하고 나서 벌어진 일이다. 어린애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별명이 '백치'인 주인공은 제정신이 아닌 로고진의 머리를 쓰다듬고 볼을 비비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나는 스스로를 미쉬낀이라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대목을 읽으면서 사랑의 무서운 소유욕을 가진 로고진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나는 소설처럼 순수하고 순결한 감정의 소유자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나의 희망사항이자 지향일 뿐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이 장면과 비슷한 삽화를 한 번 더 사용했다.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인 것으로 기억한다. 시장 한가운데에서 깜빡 잠든 아기엄마가 온갖 소음에도 평온한 표정으로 깊은 잠이 들었지만, 아기의 쌔근거리는 소리에 번쩍 잠이 깬 장면이다. 미쉬낀 공작은 주위의 물음도 못 알아듣고,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로고진의 비명과 헛소리만큼은 뚜렷하게 느꼈다.


도스또예프스끼는 평생을 종교적 불신과 회의에 괴로워했고 사랑에 집착했으며, 노름에 미쳤다. 나의 삶은 그와 매우 닮았다. 그래서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은 유독 메모할 게 많았고, 되도록 많은 작품을 읽으려고 했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영혼이 나에게 와 있다는 것을 나는 메모 독서를 하면서 처음 알았다.


만약 어떤 작가를 나의 일부분으로 만들고 싶다면 그의 작품을 부지런히 메모하라. 유독 당신에게만 들릴 것이다. 그 작가의 속삭이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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