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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승주 작가 Jan 03. 2018

대관절 어디다 밑줄을 그어야 할까?

메모 독서가 그려준 큰 그림, 그리고 큰 꿈

메모 독서를 하다가 만만찮은 벽을 발견하다


제가 부지런이 책 내용을 베끼고 있는 모습을 한참 보고 있던 지인이 묻습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베껴?


베낀 메모지를 사진 찍어서 올리면 온라인 친구들은 묻습니다.


어떤 기준으로 베끼시나요? 베끼는 원칙 같은 게 있나요?


저는 이 질문을 받고 "어떤 책을 읽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이 생각났습니다. 남이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죠. 책을 읽다 보면 다음에 어떤 책을 읽을지가 떠오르고, 책 내용을 메모하다 보면 어떤 부분을 메모하면 좋을지 떠오르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잘 몰랐던 독서 초기에 데카르트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일단 한 권 잡고 읽기 시작하면 다음 읽을 책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독서든 메모든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일입니다. 한국인들에게는 이것이 꽤 어려울 수 있습니다. 시키는 것에 익숙하면 스스로 뭔가를 만든다는 게 꽤 난감한 일이니까요. 책을 읽다 보면 "이 책을 읽어라"는 메시지가 월권이라고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당연시되고, 시키는 대로 읽는 독자들도 많죠.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에 따라 책을 읽고 메모를 한다는 것은 생전 안 썼던 근육을 쓰는 것과 같은 무게감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벽을 넘어야 자유롭게 읽고 생각하고 살아갈 수 있는 걸요.


수업을 하면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어떤 책을 읽을까요?"입니다. 만약 메모 독서와 관련된 강의를 하게 된다면 "어디에 밑줄을 그어야 하나요?"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에 밑줄 그으세요."라는 대답은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 대신 메모 독서만에 할 수 있는 세계를 알려드릴 수는 있습니다.



제 졸저 《인문고전으로 하는 아빠의 아이 공부》에 이렇게 베껴 적을 게 많았다니. 사진 게재를 기꺼이 허락해주신 노경희 선생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메모 독서가 그려준 가까운 미래 : 큰그림 메모


이북과 종이책에 대한 스웨덴의 한 대학 실험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같은 수업 내용을 한 그룹에서는 이북으로 공부하고, 다른 그룹에서는 종이책으로 공부하게 했죠. 결과는 어떻게 나왔을까요? 이북으로 공부한 집단은 단순기억에 강점을 보인 반면, 종이책으로 공부한 집단은 폭넓고 다양한 지식, 문맥의 흐름에 강점을 보였습니다. (관련기사 보기)


메모 독서는 종이책 읽기의 강점을 극대화한 방법이기 때문에 실험으로 증명된 효과 역시 극대화할 수 있습니다. 어디에 밑줄을 그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이렇게 바꾸는 게 가능하다는 의미입니다.


메모 독서로 어디까지 밑줄을 칠 수 있나?


저는 큰그림을 그리면서 메모를 합니다. 메모로 책을 읽으시려고 한다면 한 가지 주제를 머릿속에 떠올리세요. 저는 <10대와 마주하는 인문고전_공자의 논어>편 집필을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에 "공자"라는 큰 주제를 생각하면서 밑줄을 긋습니다. 고증학의 대가 최술의 《수시고신록》, 《수시고신여록》을 읽을 때는 논어와 공자철학에 대한 후세 학자들의 아전인수와 신화 덧붙이기에 집중했고, 《공자, 잠든 유럽을 깨우다》를 읽을 때는 공자가 17~18세기 유럽 지식인들에게 미친 영향에 관해서 주로 밑줄 긋고 베꼈쓰기를 했습니다.


이것은 책을 읽을 때 하나의 주제나 질문을 가지고 읽으라는 요청과 거의 같은 말입니다. 한 가지 주제에 대해서 집중하면서 책을 읽고 메모까지 남긴다면 그 분야에서 그 사람은 최고의 전문가가 되는 것입니다. SNS의 발달로 '쓰기의 대중화'가 폭발했고, 새로운 작가들이 많이 등장할 것입니다. 이들이 기존의 전문가들을 완벽하게 대체할 것입다. 기존의 전문가들은 대개 자신의 성공에 취해서 뼈를 깎는 자기반성과 공부를 게을리할 것이 분명하고, 극소수의 전문가만 살아남을 것입니다. 세계사적으로 유사한 전례가 있죠. 인쇄술이 서양으로 전해졌을 때 빗장으로 잠겨 있던 지식의 대중화가 일어났고 세상은 건강하게 일신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불고 있는 저자 열풍은 지식의 대중화를 재현할 것입니다.


저도 "작가"라는 명함을 가지고 있지만, 이 직업은 예전과는 성격이 달라질 것입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작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작가, 가정을 돌보는 작가, 불을 끄는 작가, 공사장에서 일하는 작가... 이렇게 무한하게 많아질 것입니다. 그야말로 꿈 같은 이 상황이죠. 이 새로운 직업 "작가"를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작가"라는 직업은 따로 없으며, 마치 모자나 안경 같은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한 사람이 약자라면, 자신의 언어를 가진 사람은 더 이상 약자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아줌마 작가를 배출하기 위해서 애쓰고 있고, 중학생 작가만들기를 꿈꿉니다. 이들이 자신의 언어를 갖게 될 때 세상의 부조리가 설 자리는 거의 없어질 것입니다. 저는 그저 종이를 펼쳐 놓고 인상적인 책의 한 구절을 베껴 적을 뿐이지만, 마음속에는 이런 꿈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큰그림을 가지고 책을 읽고 메모를 하면서 당신의 언어를 되찾고, 당신의 책을 꼭 세상에 활짝 펼쳐주세요.



※ 매거진 메모 독서 20년에 관심을 주시는 분들을 위해 조그만 선물을 마련했습니다. 엑셀에 하는 데이터 독서에 관심이 있거나, 샘플파일을 받고 싶은 분들은 댓글에 메일 주소를 입력해 주세요. 또는 dajak97@hanmail.net 이메일로 문의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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