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과 고전문학, 영화, 웹툰을 곁들여서..
그림책 읽을 나이는 이미 지났어요!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무식함'을 인증하는 말이 되지 않을까 한다. 만약 중학생이 이 말을 한다면 그것은 부모의 무지 때문이다. 그림책에 대한 이해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아이에게 그림책을 오해하도록 키웠기 때문이다. 나는 중학생들과 그림책을 읽는다. 어떤 그림책을 읽는데 중2 소년이 묻는다.
선생님, 이거 엄청 수준 높은데요. 몇 학년이 읽는 거예요?
나는 말 없이 띠지를 보여줬다.
로베르토 인노첸티는 그림책의 세계적인 대가다. 그의 팀이 오랜 작업을 거쳐 이탈리아의 집 한 채에서 100년 동안 일어났던 일을 그려냈다. 엄청난 고증과 문학성, 다양한 감정을 담아낸 역작이다. 이 그림책을 성인 대상 강연 때 읽은 적이 있었는데 한 남성분의 반응이다.
선생님, 저는 이탈리아의 역사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내전'이 일어난 일은 처음 들어보네요.
스페인 내전과 이탈리아 내전은 세계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이탈리아는 무솔리니가 파시즘 공포정치를 한 것만 알고 있는데, 이탈리아 민중들의 레지스탕스 역사는 생각보다 알려지지 않았다. 소년병 징병을 피하기 위해서 아이들을 감추고 이를 쫓는 정부군과의 보이지 않는 전쟁은 거인과 괴물을 피해 아이들을 땅속에 숨기는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보게 만드는 《그 집 이야기》를 1번으로 소개한다.
얼핏 보면 만화처럼 돼 있는 이 책은 사실 진로교육의 본질을 꿰뚫는 대단한 책이다. 물론 학교 교육이나 제도 교육에서 이야기하는 '진로 교육'과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아이들 진로에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진로 교육 정책에 찌들어 있는 사람이라면 《제가 잡아먹어도 될까요?》의 메시지가 무척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을 읽는 중학생들은 메시지의 본질을 잘 접수할 것이다. 진정한 진로란 부모님의 고리타분한 말을 거부하는 것이고, 가족과의 투쟁을 통해서 도약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그런 도약을 위해서는 가족의 사랑이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는 것을 이 책만큼 잘 그려낸 책을 나는 보지 못했다.
공민권법이 통과된 1964년의 미국 남부 풍경을 다루는 실제 경험 이야기. 나는 인권과 관련된 중요한 텍스트 중에서 <앵무새 죽이기>보다 <1964년 여름>을 1등으로 친다. 왜냐하면 《1964년 여름》은 아빠인 에티커스 변호사가 나오지 않고 소년들의 뜨거운 우정만으로 이야기를 전개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형식적인 민주주의, 절차적인 민주주의와 실제적인 민주주의의 차이를 설명할 때 이 책을 애용한다. 고작 대통령을 객관식으로 뽑는 업적만으로 자화자찬하기에는 지금 상황이 너무 엄중하지 않은가? 아이들도 알 것이다. 기업에서의 갑을관계, 특성화고 3학년 졸업예정자가 기업에 실습가서 죽지 않게 만들어주는 민주주의는 아직도 요원하다는 것을 실제 있었던 역사적인 사건과 그 이면의 이야기로 날카롭게 그려냈다. 공민권법은 단지 빈 밥그릇일 뿐이다. 밥은 별도였던 것이다.
▲ <알리바마 이야기> 또는 <알리바마에서 생긴 일>이라는 제목의 영화와 <앵무새 죽이기>를 함께 보면 좋겠다.
나는 가수와 연예인을 지망하는 중고등학생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으로 국가나 학교가 필독도서로 《길거리 가수 새미》를 지정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내가 가르쳤던 아이는 장래희망을 연예인에서 재벌 부인으로 바꿨다. 가수지망생 생활을 오래 한 친구를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 그럴 거면 서울대는 왜 가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서울대를 가야 재벌 2,3세를 만날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했다. 매우 솔직한 진로 설정이지만 나는 자기계발서를 끊으라고 조언했다. 청소년들에게 자기계발서는 '마음의 담배'다. 톱스타로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누려봤던 새미가 길거리 가수로 되돌아가기까지의 여정이 매우 논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그려져 있다.
뮤지컬 영화 <시카고>와 이 책을 함께 읽는다면 더더욱 좋다.
학교 폭력 또는 왕따와 관련된 그림책 중에서는 가장 좋았던 작품이 《까마귀 소년》이다. 사실 학교 폭력 문제에서 잘 다뤄지지 않는 주제는 선생님에게 당하는 폭력이다. 엄밀히 말해서 학교 폭력은 학생들끼리 벌어지는 폭력뿐 아니라 학교 선생님이나 학폭위(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 같은 어른이 학생에게 하는 폭력까지를 포함해야 제대로 된 설명이 된다. "어른들은 어린이들을 무시하고, 자신 이외에는 생각하지 않는 입으로만 선한 악마입니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10층에서 투신했던 한 청소년의 일만 보더라도 우리가 학교폭력의 의미를 얼마나 협소하게 받아들이는지 똑바로 보여주지 않는가?
한 가지의심할 여지조차 없이 분명한 사실이 있다면, 창조적인 아이들은 또래뿐 아니라 선생님에게서까지 미움받고 괴롭힘을 당한다는 것이다. - A.매슬로, 《인간 욕구를 경영하라》
《까마귀 소년》은 진정한 의미의 학교 폭력의 대명사다. 뿐만 아니라 학교 폭력을 극복하고 폭력을 가했던 모든 학생과 어른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깨달음을 주면서 공동체 정신을 회복시켰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선구적인 그림책이기도 하다. 이 책의 작가인 야시마 타로는 이 책으로 1956년 칼데콧 명예도서상 수상했고, 이 책 외에도 <빨간 우산>, <바닷가 이야기>로 칼데콧 상을 세 번이나 받았다. 모든 미래는 부모와 선생님을 통과해야 하기에 까마귀 소년에 나오는 이소베 선생님 같은 분들을 사회는 간절히 그리워 한다.
'다문화'라는 말은 만들어진 취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운영될 뿐만 아니라 효과도 나타내고 있다. 제도화된 다문화 정책은 '동화주의 정책' 또는 '제국주의 정책'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정책의 대상자들을 억누르는 작용을 한다. 사정이 이와 같기 때문에 감수성이 대단한 아이들은 제3세계에서 온 아이들이 뭐라고 하면 '이 XX가 다문화 주제에 어딜 까불어'라고 뱉는다. 아이들은 배운 대로 한 것뿐이다. 현재의 다문화정책은 당연히 아래와 같이 변화되어야 한다.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과 그 가족을 위한 다문화 정책을 하면 문화가 다양해지는 방향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중국 가족이 오면 중국 문화가 덧붙어 우리 문화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 스리랑카나 베트남 등도 마찬가지다. 다문화 정책을 건강하게 하면 세계의 문화가 우리 문화에 보태져 문화 자체가 강력해진다. 물론 이것은 지혜로운 문화정책을 가지고 있는 경우에 한해서다. 《손님》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그림책으로, 그림책 수업을 들었던 성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그림책이었고, 수업을 받은 중학생이 가장 기억에 남았던 그림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심지어 '제노포비아'의 씨앗 상태를 면밀히 관찰할 수 있도록 해주기도 한다. 다문화 정책과 제노포비아 문제는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손님》을 읽고 생각을 미리 준비해둔다면 자신감 있게 다문화라는 주제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클로드 부종의 《강철 이빨》을 넣을까 고민하다가 《너희들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단다》를 넣은 까닭은 노인의 입장에서 아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노인이 되었을 때의 상황과 일상을 풀어주기 때문이다. 문장이 아주 좋다. 시적이기도 하고 명상적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고 있으면 실제로 노인이 되어 생활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도록 해주는 책이라면 나는 가장 훌륭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성인 대상 강의를 할 때 맨 처음 이 책을 넣었는데 수업이 끝나고 감동받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첫 수업과 수업 평가 사이에는 무척 오랜 시간이 있었는데 수강생들이 잊지 않고 이 책을 호명해준 것이다.
재밌는 것은 노인뿐 아니라 젊은 사람들로부터도 많이 추천을 받았다는 점이다. 친정 엄마를 떠올리거나 할아버지를 떠올리거나 시아버지를 떠올리기 때문이다. 이른 시기에 배우자를 여의고 사는 나이 든 어머니 또는 아버지에게 사랑이 찾아왔을 때 자식 놈들이 얼마나 죄를 많이 지었나? 나이 든 사람은 사랑도 없는 줄 아냐? 어른되라고 키워놨더니 늙도록 어린 아이처럼 구는 자식놈들을 보는 늙은 부모의 마음을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라고 간절히 외치는 소리 같아서 책을 읽는 내내 기분이 먹먹해지기도 했다. 만약 우리 홀어머니에게 늦은 사랑이 찾아온다면 나는 그 분을 업고라도 집에 들이겠다. 《너희들도 언젠가는 노인이 된단다》를 읽지 않았다면 해볼 수조차 없는 생각이다. 웹툰으로 화제를 모았던 <발레리나>를 함께 읽으면 좋겠다. 5권 완결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나이가 들더라도 그림책은 무시하지 말아라. 나는 나이가 41이지만 아직도 그림책에 배울 게 많고, 배울 건 더 많다. 왜냐하면 그림책은 어린 시절을 소중히 여기는 어른들이 만들었기 때문에 어린이도 읽고 청소년도 읽고 어른도 읽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