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 독서와 '다시 읽기'[재독再讀]의 관계
똑같은 한 권의 책이라도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나 의식에 따라 그 재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히라노 게이치로)
저는 메모 독서를 하는 초창기에 '다시 읽기'[재독再讀]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다시 읽기 예찬론자가 되어 저의독서방법 또는 책 관련 강의를 할 때는 수강생들에게 다시 읽기로 유도할 수 있도록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첫 번째 독서와 둘째 독서의 차이를 잘 알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과 책을 알아가는 과정을 비교하면 쉽습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한눈에 띄는 사람이 A가 있는 반면, 첫 대면에는 도무지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 B가있죠. 만약 첫인상 때문에 A를 선택했다거나 자신의 배우자감으로 선택했다면 어떨까요? 근검절약을 잘 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지독한 수전노일 수도 있고, 차문을 열어주는 것에서부터 커피 따르는 것까지 손 한번 안 대게 친절했던 사람이 무서운 소유욕과 집착을 보이는 사람인지도 모르죠. 그런 사람은 두세 번 정도 만나보고 찬찬히 살펴봐야 하고, 내 인생에 중요한 사람인 경우에는 열 번을 만나도 부족하죠. 중국에서 전해진 설화에 가까운 이야기이지만, 전설의 임금인 요堯가 순舜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줄 때는 자신의 딸들을 차례로 시집 보내고, 몇 년 대리청정을 시킨 후에야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어떤 책을 읽어 보고 전혀 재미없고 힘들기만 한 경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우연히 그 책을 다시 집어들자 어찌된 셈인지 매우 재밌을 뿐만 아니라 감동적이기까지 했습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는 어려운 설명이 너무 많아서 힘들었습니다. 한 구절을 읽고 전의 구절과 연결되지 않아서 전의 구절로 돌아가서 다시 읽은 게 여러 차례입니다. 참 사람을 지치게 만들었던 책이었던 것 같습니다. 파스칼의 《팡세》는 참 재미가 없었고 종교 이야기를 할 때는 페이지를 건너뛰기도 했습니다.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은 내 인생의 인내심을 발휘해서 읽었지만 전쟁 장면이 너무 지루해서 덮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책을 다시 집어드는 데 20년 가까이 걸렸죠. 제가 읽었던 책 중에서 가장 미안한 책입니다. 만약 이 책들을 힘들다고 버렸다면 정신이 얼마나 황량해졌을까 생각하니 몸서리가 쳐집니다.
어떤 문장이 내 삶이 된다고 할 때 그것은 앞에 '두 번 읽은'이라는 말이 생략된 것입니다. 단번에 내 인생의 말이 되는 게 몇 가지나 될까요? 제가 슬픔에 빠질 때, 이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한 무기력을 느낄 때 무너지지 않도록 떠받치는 힘은 놀랍게도 한 줄의 말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슬픔의 원인을 인식하는 한에서 슬픔은 수동이기를 멈춘다. 그러한 한에서 슬픔이기를 멈춘다. - 스피노자, 《에티카》
슬픔의 원인을 인식하는 데 성공하지 않더라도 인식하려는 시도만으로 우울감이나 무기력감이 대부분 해소되었습니다. 나는 이 문장을 어디서든 떠올릴 수 있도록 적어둡니다. 그리고 인생의 책으로 선정된 것들은 5년이나 10년에 한 번씩 '다시 읽기'를 합니다. 제가 유년 시절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관점은 프랑스 시인 보들레르가 어느 책에서 남겼던 한 줄의 문장에서 기인합니다. 보들레르는 시대를 너무 앞서 갔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탄압을 많아 당했던 시인이었죠.
천재적 인간은 굳건한 신경을 갖고 있지만, 어린아이는 나약한 신경을 지니고 있다. 전자에게는 이성의 중요성이 막대하지만, 후자에게는 감수성이 거의 심신의 전부를 차지한다. 그러나 천재성 또한 마음껏 되찾은 어린 시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이제 튼튼한 기관과 제멋대로 축적된 재료들을 모두 정리해 주는 분석적 정신을 갖춘 어린 시절에 지나지 않는다. - 보들레르, 《꿈꾸는 알바트로스》
이 문장을 접하고 나서 어린이를 다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어린이의 감수성과 아직 표현되지 못한 이성을 제가 보태면 아주 멋진 작품이 탄생합니다. 어린이, 청소년과 어떻게 소통하는지 터득하기까지는 보들레르의 문장 하나가 큰 힘이 되었습니다. 당신의 삶에 큰 영향을 준 문장은 무엇인가요?
저는 좋았던 책의 경우 읽으면서 한 번 읽고, 메모하면서 두 번 읽고, 데이터로 만들면서 또 한 번 읽습니다. 그리고 기록했던 내용을 가지고 글을 쓸 때 다시 한 번 보니까 많게는 네다섯 번 정도의 독서를 합니다. 똑같은 책을 두 번 잡고 처음부터 다시 읽는 방법은 잘 쓰지 않습니다. 제가 인상적이었던 메모를 읽는 것으로 충분할 뿐 아니라 문맥이 궁금하면 해당 부분의 책을 펼치며 앞뒤로 읽어보고 필요한 부분을 보충적으로 읽으면 됩니다.
저는 어린이, 청소년, 성인들을 대상으로 그림책 강의를 많이 하는 편입니다. 대상에 따라서 수준을 달리해서 보지만 여러 번 읽는 장치를 두는 것은 똑같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던져서 다시 읽게 만들 수도 있고, 짧은 글을 쓰면서 다시 읽게 할 수 있고, 독서활동지를 채우면서 다시 읽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다시 읽기입니다. 제 수업을 듣는 사람 중에는 예전에 그 그림책을 읽었던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저와 한 번 더 읽고 나면 전혀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림책 안에 작가가 의도했던 세계와 그림책 내용과 연결되는 인간 정신의 깊이 있는 세계로 안내하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다시 읽게 만드느냐?
제가 이 질문에 매우 공을 많이 드는 까닭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아래와 같은 반응을 많이 접했기 때문입니다.
엄마, 나 한 번 읽은 책은 다시 안 읽는 거 알지?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책에 접근하는 사람이 매우 많다는 사실은 이제 하나도 놀랍지 않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과 싸우기 위해 '다시 읽기'를 더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책은 '첫사랑'의 대상이 될 수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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