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손가락, 아버지 1

by 다작이

아버지라는 의미는 내게 그런 것 같다. 마냥 아버지를 기억하거나 기념할 때와는 또 다른 의미도 있다는 것을 말이다. 자식으로서 그냥 아버지를 생각할 때는 가지지 못했던 생각들을, 어느새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처지에서 그 역할을 늘 되새겨야 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도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게 아픈 손가락이었다. 보통 아픈 손가락 운운하면 그건 자식을 두고 하는 얘기일 텐데, 적어도 내 경우엔 그렇지 않았다. 살아 계실 때에는 얼른 돌아가시길 빌었다. 일생 동안 내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준 적이 없는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인 성격 탓에 그 긴 세월을 온통 상처투성이로 살게 했던 장본인이 바로 아버지였다.


5년 전에 위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는 학력이 무척 짧았다. 국졸이었다. 어떻게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않았냐고 하겠지만, 형제가 많았던 어머니 역시 국졸이다. 부모님 두 분이 모두 국민학교 졸업자인 우리 집에서 명색이 대학원까지 나온 나는 어마어마한 고학력자인 셈이다. 그러건 말건 간에 아버지께서는 단 한 번도 당신의 학력이 미미한 것에 대해 회한은 없어 보였다. 솔직히 정확히 알 수는 없다. 경상도 상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자식인 내게는 일부러 내비치지 않은 것일 수도 있으니까. 그런 아버지가 항상 내게 하시던 말씀이 두 가지 있었다.


가방 끈 길다고 잘 사는 건 아니다.

가방 무겁게 해서 다닌다고 공부 잘하는 건 아니다.


한국전쟁이 터지던 해에 7살이었던 아버지는 잠시 밖에 나가셨다가 피란민들의 인파에 휩쓸려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던 곳에 이르렀다고 했다. 엄마가 보고 싶다고 울면서 길거리를 헤매던 중 트럭을 타고 지나가던 누군가가 아버지에게 손짓을 했다.

“내가 너거 엄마한테 데려다줄 테니 나를 따라 가자.”

그렇게 도착한 곳에서 아버지는 무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더부살이를 했다. 그때 아버지를 데려간 분의 여동생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게 고모할머니로 살아오셨다.


원래 더부살이는 남의 집에서 먹고 자면서 일을 해주고 품삯을 받는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면 한 번도 품삯을 받은 적은 없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베어 실어다 날라야 했다. 틈틈이 소여물을 먹여야 했고, 온갖 집안 청소를 비롯한 허드렛일은 아버지가 도맡아 하셨다고 했다. 그런 고행은 열 살도 채 되기 전부터 시작되어 독립해서 그 집을 나오기 전까지 그 생활은 이어졌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다. 불법 감금에 아동의 노동력 착취, 그리고 명백한 인권 탄압과 다름이 없는 일이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어쨌건 간에 학교까지 보내주고 그 오랜 세월을 키워줬으니 그만하면 된 것이다,라고 아버지는 오래된 과거를 회상하시면서 늘 말씀하시곤 했다.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게 그들이 아버지에게 돈을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원망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스물일곱 살엔가 대구시 환경미화원(당시엔 그냥 청소부라고 불렀습니다)에 취업하자마자 대구로 나와 자취를 하셨다. 비로소 더부살이에 종지부를 찍게 된 순간이었다. 사실 지금은 환경미화원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으로 부르고 있지만, 당시에는 청소부라고 하면 무척 천시하던 직업이었다. 그래도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국민학교밖에 못 나온 내 주제에 그 만한 게 어디냐?”


근 30년 뒤 아버지는 중구청으로부터 장기근속의 공을 인정받아 환경미화원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하나 맡으면서 청소 일에서 해방되셨다. 내가 보기엔 거의 유령 직책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지부장이라는 그 이름을 늘 자랑스러워하셨다. 어느 해인가 내게 그런 말씀을 하셨다.

“올해 새로 들어오는 환경미화원 면접을 이번에 봤는데, 70프로가 대졸자더구나. 나는 국민학교만 졸업했지만, 내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졸자가 수두룩하단 말이야. 봐라, 가방 끈 길다고 반드시 잘되는 건 아니잖냐?”


그렇게 살아온 인생이었다. 언젠가 한 번은 내가 아버지에게 친부모님을 찾고 싶지 않냐고 여쭤 본 적이 있었다. 때마침 그때 KBS 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다. 수년 동안 KBS 대구 방송국과 서울 방송국을 오고 가며 애타게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한 아버지는 내게, 낳은 정 못지않게 기른 은혜도 크다고 하셨다. 불가피하게 친부모와 떨어져 지내게 되었지만, 어쨌건 간에 그때껏 키워주신 양부모님을 친부모처럼 섬겨왔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지금까지 제사상엔 그분들이 오르고 있다.


반백 년을 약간 넘어서는 동안 살아보니 지식과 지혜는 확연히 다른 차원의 것이란 생각이 든다. 지식적으로는 대학원을 졸업한 내가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보다 훨씬 똑똑하고 유능하지만, 삶의 지혜는 아직도 당신의 발끝도 못 따라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언젠가 나도 저 위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뵙게 되면 그 오랜 세월 힘들게 살아오시느라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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